근원(fontes)인 성경의 빛에서 본 인간과 공동체
2021-01-03
월드뷰 JAN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글/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종교개혁은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었다고 다들 인정한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표어인 “근원에로(ad fontes)!”는 르네상스를 일으킨 사람들이 흔히 쓰던 말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의 한 부분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르네상스 사람들과 개혁자들은 가려는 방향이나, 기본적 정조(ethos)나, 그 근본 사상 내용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고, 심지어 대립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점에 따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이전 중세시기와 상당히 다른 성격을 지닌 소위 초기-근대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 특히 르네상스의 경우 사상적으로 중세 천주 교회와의 연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이후의 소위 근대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르네상스가 돌아가려는 근원(fontes)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의 문화와 교양이었다. 그래서 통속적인 라틴어에서 벗어나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Cicero 106 BC–43 BC), 버질(Virgil, Publius Vergilius Maro, 70 BC~19 BC) 등의 고급스럽고 수려한 라틴어와 그 문장들과 그 문학을 탐구했다. 또 그리스 문헌들을 라틴어 번역본이 아니라 헬라어(그리스어, 희랍어希臘語)로 직접 읽고 그 묘미를 찾아내려고 하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미술 양식을 다시 추구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의 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 중심주의(humanism)였다. 물론 중세의 과정을 걸쳤기에 이전의 완전히 이교적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적 신(神)개념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는 인간 중심주의가 나타난다. 그런 르네상스적 입장을 잘 대표하는 인물이 서구 지성인의 선구자로 흔히 언급되는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이다.
에라스무스와 초기 근대적 인간관 그리고 근대적 인간관들
에라스무스는 19살(1488년)에 수도 서약을 하고, 1492년 4월 25일에 천주교 사제로 신품성사를 받았다. 그는 사제로 살면서 천주 교회가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통속적 라틴어로만 성경을 읽던 당시에 헬라어 사본을 그런대로 많이 찾아보고, 당시 상황에서 없는 것은 자신이 라틴어로부터 헬라어로 번역했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와 신성로마 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허락 하에 최초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해 낸 큰 공헌을 했다(1516). 르네상스적인 근원에로 가자는 것을 성경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 일에 영향을 받은 것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가 헬라어로 낸 신약 성경을 읽고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서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이 나오자 이를 하나하나 필사하면서 공부하고 로마서는 전부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적 인물로 르네상스의 방법을 교회에 적용시켰다. 그 이후로 구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유태인의 히브리어로 보아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고,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에 히브리어에 근거해서 구약을 잘 번역하고 제시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후에 스트라스브르그(Strasbourg), 케임브리지(Cambridge), 그리고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친 임마누엘 트레멜리우스(Immanuel Tremellius, 1510~1580)이다.
그런데 이렇게 원어에 근거한 성경 공부를 기반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사회를 새롭게 하자는 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간접적으로 큰 공헌을 한 에라스무스가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이를 그저 개인적 성향을 차이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후에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벌인 논쟁에 나타난 사상적인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인간 중심주의와 하나님 중심주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 휴머니즘과 후에 칼빈이 강조하는 기독교 휴머니즘은 상당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 중심적인 기독교 휴머니즘을 드러낸다. 그에 비해서 에라스무스는 끝까지 인간 중심적인 기독교를 대변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주어진 정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면, 그에 근거해서 더한 은혜가 주어질 것이고, 그 은혜에 근거해서 노력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참으로 지당한 공로로 받으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하지만 또한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노력도 공로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루터에게 찬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서구 사상에서는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해가 나타났다. 하나는 인간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보며, 그것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대적 인간관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창조의 고귀함에서 떨어져서 그의 모든 측면이 오염되어 구속과 계속되는 은혜가 없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문제만 만들어낸다는 매우 비관적인 인간관 –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낙관적인 인간관 – 이다. 인간 중심의 인간관은 인간의 노력으로 상당히 좋은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개인과 그에 근거한 사회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그것이 후에 때로는 공동체주의로 발전하기도 하고 (이상한 형태로 변질된 것이 파시즘, 나치즘 등의 집단주의적 생각이다), (계급 없는 사회를 우리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공산주의 사상을 낳기도 했고, 아니면 고도의 개인주의를 낳기도 했다. 그러므로 서구의 다양한 사회사상은 대부분 에라스무스적, 르네상스적 인간관을 한편으로 이끌어 나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적 인간관과 사회관
이에 비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비추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고, 은혜가 주어진 후에도 그가 은혜에 근거해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공로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구원에 관해서 무능하다. 또한, 이 세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그 스스로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사회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일반 은총(common grace)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억제하고, 사회와 국가와 역사가 존재할 수 있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가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모두 일반 은혜 때문이다. 일반 은혜 때문에 인간 공동체가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일반 은혜는 구원하는 은혜가 아니니,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인간됨을 드러낼 수도 없고, 사회가 온전해질 수도 없다. 일반 은혜로 유지되는 사회는 마치 난파선에서 계속해서 물을 퍼내야 유지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은 멸망하도록 된 사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하는 은혜인 특별 은총(special grace)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특별 은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형상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비로소 진정한 자아(self)가 될 수 있게 된다. 특별 은총 없이 인간은 자아가 되기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참된 자아가 아닌, 헛된 노력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실상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조용히 절망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종교개혁이 말하는 철저히 성경적 관점에 의하면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을 때 사람은 진정한 개인도 못되고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 하든지 – 그 결과 중의 하나가 자살이다. 그러나 자살의 아이러니가 있으니, 자기 생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기주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이 되었다고 하나 사실은 참된 자신이 아닌 허위 의식적 존재가 되고 만다), 진정한 공동체도 이룰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늑대다(homo homini lupus).
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특별 은총이다. 특별 은총이 작용할 때 인간은 구속을 받아들이고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다. (르네상스적 인간관은 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끝까지 저항한다. 그래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대립적인 세계관이다.) 오직 하나님과 관련하여 자신이 된 사람 – 즉, 참 개인(하나님 앞에 외롭게 선 단독자!)은 자신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음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여기 진정한 공동체 존재 가능성이 있다. 개개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성도들의 교통(communio sancrorum), 즉 교회의 존재적 특성과 책임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참 개인이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도 참된 관계를 맺어 가는 진정한 공동체를 드러낼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미 구속된 사람들, 즉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런 책임과 과제를 의식하게 된다. 은혜(Gabe)로부터 책임과 과제(Aufgabe)가 주어진다. 이와 같은 루터적이고 종교개혁적인 통찰은 오직 성경에서 온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그러면 아직 특별 은혜 가운데 있지 아니한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포기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 가지 일을 지속해서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낸 개인과 공동체를 잘 드러내어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실 수 있도록 열심히 살며,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개인이 있게 하는 사람이고, 참된 공동체가 있게 하는 일의 토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의 큰 함의를 알고 힘써야 한다.
둘째로, 일반 은총 가운데서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나은 판단을 하도록 제대로 된 여론을 형성하고 간접적 영향력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한다. 개개인을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태속에 있는 연약한 개인을 위하는 운동을 하도록 일반 은총 가운데 노력해야 한다. 개개인이 건강해야 건전한 사회와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을 폭넓게 알리고 그래도 이 세상이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하고, 역사가 전진해 나가도록 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다.
종교개혁적 인간관에 충실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눈 감아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은총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덜 악한 것을 계속 선택할 수 있도록 이웃에게 자극을 주는 사회의 등에(쇠파리, horse-fly)로 작용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살던 아테네에서 이 역할을 하던 소크라테스와 같은 작용을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도 궁극적 문제 해결의 길이 제시된 성경적 가르침으로 가게 하려고 더 힘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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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언약교회 협동목사이자 월드뷰 편집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