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2021-01-02 0 By 월드뷰

월드뷰 JAN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신념의 사람, 고당 조만식


지금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념의 갈등, 지역적인 갈등, 세대 간의 문제, 국제 질서의 변화 등등 수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어디에 기초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기초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위에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생각나는 인물이 고당 조만식이다. 그는 구한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일제 시대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민족 운동을 했으며, 해방 공간에는 지독한 혼돈 속에서 자유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소련과 김일성에 의해서 희생을 당했다. 극심한 혼란 가운데 있는 지금 조만식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만식이 태어난 서북(西北)지방은 조선 시대에 차별받는 지역이었지만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었다.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서구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서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중심에는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주로 해외에 있었고, 1930년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 서북지역의 기독교를 대표해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조만식이었다. 그의 진가는 그가 해방 공간에서 보여준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남한에는 수많은 정치지도자가 나서서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북한에는 오직 한 사람 조만식 장로가 있었다. 조만식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하나님이 “이북은 다섯 도를 조만식, 단 한 사람에게 맡으라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사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조만식과 대등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소련도 처음에는 조만식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따라 준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눈앞의 이익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조만식은 1946년 1월 소련의 요청을 거부하고,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다가 1950년 10월 조국 통일의 제단 위에서 목숨을 바쳤다. 자유 민주국가로 통일된 한반도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조만식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온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에서 신앙을 지키고, 실력을 양성하고, 경제력을 갖게 하고자 했다. 동시에 일본을 향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3·1운동에 가담했고, 주기철 목사와 함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믿음을 지켰으며, 일제 말에는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해방을 기다렸다.

이런 분명한 자기 소신은 해방 이후 소련과의 대결에서 더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북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소련군의 만행을 비판했으며, 소련 편에 서서 신탁통치를 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반탁 운동에 나서 끝까지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2. 끝까지 한국 교회와 함께한 기독교 신앙인


조만식을 생각할 때에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갓 열 살이 넘었을 때,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된 한석진의 아들과 함께 서당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처음 접했으나 당시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다음 해 갑오개혁이 진행되자 조만식은 서당을 그만두고 평양에 가서 장사를 배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장사에 성공하면서 술과 노름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조만식은 장사 동료 한정교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조만식은 새 문명을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05년 어느 날, 평양에 새로 세워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는 지금까지 사귀던 술친구들을 모아 놓고, 실컷 술을 마시고는 “오늘까지는 과거의 조당손(조만식의 아호)이고, 내일부터는 조만식이다.”라고 선언했다. 조만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조만식의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 그는 숭실학교 교장인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조만식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서울에 오면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의 집에 머물렀는데, 방응모는 자신의 손자 방일영으로 하여금 조만식을 시중들게 했다. 어린 방일영은 조만식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만식은 일본 패망의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뒷산으로 올라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했다. 아마도 조만식은 한국 교회가 가장 사랑하는 기독교 민족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일 것이다.

그는 항상 기독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그는 동경의 YMCA를 중심으로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파송된 한석진 목사와 함께 이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 교회는 장감연합교회로 조만식은 여기에서 초교파적인 연합 운동을 했다. 바로 여기에서 2.8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장이 된 그는 지리나 역사를 가르쳤지만 동시에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사 겸 교목이었다. 조만식은 특히 오산학교에서 자신의 기독교적인 삶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 함석헌, 한경직, 김홍일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유명한 소설가 이광수가 교사로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신자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났다. 이 당시 이동휘나 여운형도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만식은 끝까지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많은 기독교인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존 교회와 거리를 두었는데, 조만식은 항상 한국 교회와 함께 일했다.

3·1운동 이후에 그는 오산을 떠나 평양으로 가서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는 이곳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기독교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 조선 사회에 일본과 서구로부터 잘못된 물질주의가 들어오자 교회는 절제 운동을 통해 이런 세속주의와 대결했다. 조만식은 당시 한국 교회가 강조하던 절제 운동에 큰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일제 말, 조만식은 산정현교회의 장로로서 담임목사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지켜 주었다. 원래 주기철은 조만식의 오산학교 제자였다. 조만식은 그를 산정현교회로 초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 말, 산정현교회는 대표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본거지였는데 여기에는 주기철 목사뿐만이 아니라 조만식 장로도 있었다.

이런 분명한 기독교 신앙은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종종 조만식을 요릿집으로 초청하여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조만식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럴 때마다 조만식은 자신은 기독교 장로이기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조만식은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연설한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입이 마르도록 소련군을 찬양했지만, 조만식은 오히려 오늘의 해방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독립을 기도했고, 이에 하나님이 조선 민족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독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조만식을 비과학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했지만, 조만식은 자신의 신앙을 공산주의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김일성도 기독교 가문 출신이었다.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에 지도자로 나타나자 친척들은 그를 초청하여 감사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잔치가 끝난 다음에 김일성은 동료들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스탈린 원수가 쏴 죽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능글맞은 김일성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지만, 마음속에는 무신론적인 세계관이 가득했다. 조만식은 해방 후 북한 사회의 중심이었고, 특히 자유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해방 후 3·1절은 북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싸우는 날이었다. 원래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북한 사회의 민주화를 기원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에는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로 가서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면 조만식은 호텔 발코니에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은 북한에서 일종의 민주화 성지가 되었다.


3. 실력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기독교인으로서 민족 운동에 깊이 연관된 것은 그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였다. 잘 알다시피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운 학교이다. 조만식은 이 학교의 교사로, 그리고 교장으로 일했다. 그가 이곳에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이승훈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일으킨 위대한 민족 운동가이다. 이승훈은 3·1 운동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장이었던 조만식과 깊이 상의했을 것이다. 조만식은 3·1운동 당시에 독립을 위해서 큰 노력을 했으나 33인에 이름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1919년 2월 조만식은 오산학교의 다른 교사와 함께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려고 한 것이 들통 나서 학교에서 사임했고, 그 이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려다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3·1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한성정부를 만들기 위해 각 지역 대표들의 이름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이 명단에 첫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 이만식인데, 많은 사람이 이만식이 누군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였다. 당시 모임을 주도한 이규갑에 의하면 이만식이 바로 조만식이라는 것이다. 손병희가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조만식은 전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출소 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가 평양에 다시 돌아와서 맡은 직책이 바로 YMCA 총무였다. YMCA는 원래 서울 중심의 기독교 단체였으나, 조만식은 이 단체를 평양에도 세워 평양 시민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평양 YMCA는 평양 시민운동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조만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만식은 자신의 시민운동이 지역색에 매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벌인 캠페인이 “고향을 묻지 맙시다.”라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소위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과거의 강압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서 일정 부분 조선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사령의 개정이었다. 과거의 회사령은 일본인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어 조선인들이 회사를 만들기 어려웠는데 그것이 폐지된 것이다. 조만식은 이것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이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조선인이 회사를 설립하려면 먼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어서 기업의 가치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우선 회사를 만들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므로 저축조합을 만들어서 자본을 조달하도록 했고, 조선인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물산장려운동을 통해서 민족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만식의 노력 덕분에 평양은 조선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교육령도 개정했다. 3·1운동 이후 완화된 교육령에 근거해서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다시금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일제는 조만식의 교장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만식은 평양에서 산정현교회 장로들과 함께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조선의 경제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당시 새로운 교육령은 조선에도 대학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서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소위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시도했다.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선에도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에 놀란 일본은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 조만식은 물산장려운동이나 교육 활동과 함께 농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한국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에는 산업화가 막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이 농촌을 떠나고 있었다. 당시 한국 교회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장로교 총회와 YMCA가 이 농촌 운동의 중심이었다. 조만식은 YMCA의 총무이자 장로교 장로였다. 조만식은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기독교농촌연구회’를 만들어서 농촌 문제를 연구하는 한편, 이상촌을 만들어서 당시 농촌 문제에 실질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그는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판매망을 구축하여 공산주의식의 소작쟁이보다는 협동조합을 통해 실질적으로 농민을 돕고자 했다.

결국 조만식의 독립운동은 실력을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일제시기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국 등지에서는 외교를 통해, 중국에서는 무장 투쟁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일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는 조선에서는 실력을 양성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사실 이 같은 인재가 없었다면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만식의 ‘실력양성운동’을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원원장 시절 집무실에서의 조만식 선생.
1945년 9월.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4.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싸운 민주주의자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중경의 임시정부를 봉대(奉戴)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제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지하 공산당 세력을 중심으로 공산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조만식의 대답은 분명했다. 조만식은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를 봉대해서 민주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이 점에서 조만식이 해방 직후 세운 ‘평북 건국준비위원회’와 여운형이 서울에서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는 달랐다. 여운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웠지만, 조만식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1945년 8월 해방되고, 아직 소련군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 북한, 특히 서북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평북에는 이유필 장로와 한경직 목사, 평남에는 조만식 장로, 황해도에는 김응순 목사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만일 소련의 강제적인 힘이 아니었다면 해방 후 북한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하고, 이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위적으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로 만들어 버렸다.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가 설립된 것은 북한 주민의 뜻이 아니라 소련과 소수의 공산주의자가 합작해서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은 조만식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만식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주도해서 정국을 이끌어 가려고 했다. 조만식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가능하면 이들과 협력하여 북한 사회에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1945년 10월, 조만식은 소련이 제안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장을 거부했다. 만일 조만식이 그것을 수락했다면 그것은 바로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련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세웠다. 전후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은 한반도를 친소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핵심은 친소 인사를 중심으로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만식의 생각은 달랐다.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북한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에 진주하며 가옥과 식량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했다. 이에 조만식은 강하게 분노했다. 그는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Ivan M. Chistyakov)를 찾아가서 “당신들은 점령군이오? 해방군이오?”라고 따졌다. 또, 1945년 11월에 일어난 신의주 학생의거를 보면서 조만식은 소련군을 찾아가서 그들의 만행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로 인해서 조만식과 소련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나 소련군과 조만식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신탁통치 문제 때문이었다. 소련은 근본적으로 조만식을 친소 인물로 만들어서 미국과 협상하려고 했다. 소련은 조만식에게 자신들의 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만일 조만식이 소련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그것을 거부했다. 당시 일제에서 해방되어 독립의 기쁨을 맛보았던 한국인들로서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만식은 친소 인물이 되어 소련의 비호 아래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꿋꿋하게 민족 독립의 길을 가고자 했다. 결국, 조만식은 1946년 1월 고려호텔에 연금되었고,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서 그들의 길을 가고자 했다.

많은 사람이 조만식이 고려호텔에 연금됨으로써 그의 공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한반도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외상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남북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 것을 결정했다. 이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한반도에 어떤 정부가 들어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근본적으로 북한은 통일시켜 하나의 친소 그룹으로 만들고, 남한은 분열시켜 좌/우의 두 그룹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북한의 친소 세력과 남한의 좌익 세력이 합하면 2:1이 되어 정국을 자신들의 구상대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북한을 김일성과 조만식의 두 그룹으로 나누고, 남한을 좌, 우, 중도의 세 그룹으로 나누려고 했다. 남북을 좌, 우, 중도의 2:2:1로 만들고, 나중에 중도를 미국 쪽으로 오게 해서 민주 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조만식을 친소 인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미국으로서는 조만식이 북한에서 우익 세력으로 생존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회담의 주요 과제 가운데 조만식을 참여시킬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소련은 조만식이 친소 세력이 되지 않는 한 참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어떻게 하든지 조만식을 참여시켜 북한에 민주 세력을 존속시키고자 했다.

조만식은 해방 공간에서 한반도에 어떤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5년 8월 말, 소련군 사령관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나라는 개인의 자유와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는 나라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소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내세워 전략상 이런 정책을 수용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실제로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갔다. 조만식은 이 같은 소련의 행위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해 10월 평양에서 소련군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조만식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나라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식은 당시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카이로 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여야 하며,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보았다. 신탁통치를 강요하는 소련 사령관에게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며, 이것을 강제로 막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7월 조만식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차 북한을 방문한 미국 대표 브라운(Brown, W.G.) 소장에게 자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소련이 말하는 인민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이 말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임을 분명하게 했다. 조만식이 고려호텔에서 연금되어 있을 때, 그의 많은 동료는 월남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건국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조만식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 남한에 ‘조선민주당’을 만들어서 정치 활동을 했다. 조선민주당은 신탁통치는 반대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는 참여하기를 원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제대로 열리면 조만식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만식의 정계 복귀는 어려워졌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1947년 가을 유엔 총회는 총선거를 하여 한반도를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이 총선거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렀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게 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에 이북을 대표하는 인물이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래서 조만식 대신에 조만식이 세운 조선민주당 부당수이며, 월남 인사인 이윤영을 총리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총리임명에 실패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윤영은 감리교 목사로서 제헌 국회에서 기도했던 인물이다. 해방 공간에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월남했지만, 조만식은 월남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조만식에게 월남을 권유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월남해 버리면 북한에는 김일성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며, 이것은 북한을 통째로 공산당에게 바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월남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북한의 공산화를 막았다.


5.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되었을 때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신앙과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분명한 철학을 갖고 살아간 지도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필자는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조만식 장로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조만식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조만식은 초지일관 신앙의 사람이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인물이 기독교 신앙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떠났는지 모른다. 이광수, 이동휘, 여운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조만식은 그렇지 않았다. 조만식은 단지 신앙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배경은 기독교였다. 그는 자신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산정현교회 장로들과 항상 중요한 일을 상의했고,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조만식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기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조만식은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조만식의 활동 근거는 평양이었다. 그는 평양을 근대적인 도시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는 평양의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상인, 기업가, 교육자들을 하나로 묶어 일본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했다. 평남 도지사가 이 지역의 행정적인 수반이라면 조만식은 이 지역 사회의 대표였다. 그는 평양에 시민운동을 일으켜 공적 기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했기에 지역적 지지 기반이 조선의 어떤 지도자들보다 튼튼했다. 이런 지지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소련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셋째, 조만식은 국내에서 실력 양성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민족주의자이다. 한일병합 이후 독립운동에는 여러 길이 있었다. 외교를 통해,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으나 국내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조만식은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농촌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상업을 일으키고, 회사를 세우도록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사업을 했다. 그렇게 일본이 허용하는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최선을 다해 민족을 위해서 일했다.

넷째, 조만식은 우리 한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동체가 나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웠고, 일본에서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Democracy)’라는 근대 민주 교육을 경험했다. 이런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분명한 입장을 가졌으며 개인의 자유, 소유권의 확립, 종교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병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조만식은 민족의 통일을 항상 생각했다. 해방 후 조만식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38선이다. 소련이 그에게 이북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취임을 요청하였을 때, 이것을 거부한 이유는 이런 직책이 바로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할 때도 분명히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을 포함하는 중앙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식은 절대로 공산주의식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이 제대로 대접받은 민주 사회로의 통일이 그의 꿈이었다.

여섯째, 조만식은 자유 세계와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해방 후 북한에서 소련군을 경험한 그는 한반도의 통일과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소련이라고 보았다. 북한의 공산당과 김일성이 큰소리치는 것은 오로지 소련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만식은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해방 후 그는 북한에 있었지만, 남한의 미 군정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만식은 해방의 상황에서 일본에 대하여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수백만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데, 조선의 일본인을 박해한다면 일본에서 조선인들 역시 박해를 당할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다. 그는 맹목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었다.

일곱째, 조만식은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도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의 바탕에는 도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조만식은 물질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직책을 맡았으나 월급을 받지 않았다. 자신의 생활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충당했다. 조만식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다. 그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처음 한 일은 거지를 집에 데려다가 자기 옷을 입힌 것이었다. 그는 해방 후 평양 고려호텔에 머물 때도, 자신의 돈으로 방값을 치렀다. (당시 김일성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저택을 여러 채 갖고 마음대로 사용했다) 그가 절제 운동을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생활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맺음말


2021년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조만식과 같은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함석헌은 해방 후 하나님은 조만식에게 북한을 맡겼다고 했는데, 지금 하나님은 이 혼란한 대한민국을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실까? 2021년, 하나님께 다시 조만식과 같은 지도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 저서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