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폭망인데, ‘절대 지존’이 된 김정은
2020-09-21
월드뷰 SEPT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2 |
글/ 정교진(북한학 박사)
현재 북한에서 김정은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은 ‘최고 존엄’이다. 지난 6월 초, 김여정(김정은 친동생)의 대북전단 살포 비난 성명을 시작으로 북한에서는 대남공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때 인민대중이 목이 터지라고 외쳤던 구호가 ‘최고 존엄 모독에 대한 불벼락 보복’이다. 활활 타오르는 보복항전의 결기는 대남군사행동 직전까지 치달았다. 김정은의 보류 지시로 일단락되었지만 말이다.
이 당시 북한 내부에는 작은 변화, 아니 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전문가들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수개월 전 김정은이 두문불출한 이후부터, 그의 신병이상설, 리더십 위기설, 김여정 제2인자설, 리더십 교체설 등으로 온통 그의 여동생 김여정에게만 관심이 쏠렸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양상이 이 당시 나타났는데, 김정은이 명실공히 절대 지존이 된 것이다. 경제는 폭망하고, 외교는 죽 쑤고 있는데 말이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상징, 수령의 쓰임새
북한의 정치(사상)체제는 ‘수령제’이다. 북한에서의 ‘수령’은 최고 존엄을 가리키는 용어이자 최고지도자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현재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을 직접 수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서기 전, 김정일도 수령으로 불리지 않았다. 2012년 김정은에 의해 ‘영원한 수령’으로 추대된 바 있지만, 이후에도 김정일 수령, 수령 김정일처럼 그의 이름 앞뒤에 직접 수령이 붙여지지는 않았다. 단지, 김일성과 함께 ‘선대 수령님들’, ‘위대한 수령님들’이라고 통칭되었을 때만 수령의 이미지와 그 상징성을 지녔을 뿐이다. 북한학자인 필자가 볼 때, 이것이 북한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점이다.
이 같은 표기방식은 북한의 당 문건, 정치문건뿐만 아니라 북한의 주요 언론매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것은 북한 내부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하나의 룰(rule)이다. 이런 점에서, 수령 상징은 여전히 김일성의 고유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초부터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바로, 김정은과 수령 상징을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다.
2019년, 신적 위치의 수령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린 김정은
북한에서 수령은 ‘당중앙위원장’(김일성), ‘총비서’(김정일), ‘당위원장’(김정은)처럼 당 직함이나 ‘주석’(김일성), ‘국방위원장’(김정일), ‘국무위원장’(김정은)처럼 헌법상의 직함이 아니다. 대표적인 최고지도자의 상징이다. 그런데, 수령은 ‘태양’(김일성:주체의 태양, 김정일:선군의 태양, 김정은:세계의 태양)과 ‘어버이’처럼 3대 부자가 온전히 공유하는 지도자 상징이 아니라 김일성의 고유영역이었다.
북한에서 수령은 최고지도자의 풍모를 ‘신비화’, ‘신격화’시키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선전선동 기제다. 수령과 늘 한 쌍으로 나오는 구호는 바로 ‘최고 존엄’이다. 그런데 작년(2019) 초에 김정은은 수령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었다. 수령 존재론의 재해석이라고 할까, 수령에 대한 의미의 전환을 꾀한 바 있다. 2019년 3월 6일 개최된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꾼대회> 참가자들에게 김정은이 보낸 서한 ‘참신한 선전선동으로 혁명의 전진동력을 배가해나가자’에는 ‘수령’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렸다(2019.3.9. 자 노동신문).
“위대성 교양에서 중요한 것은 수령은 인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민의 령도자라는 데 대하여 깊이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위대성을 부각시킨다고 하면서 수령의 혁명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됩니다. 수령은 인간과 생활을 열렬히 사랑하는 위대한 인간이고 숭고한 뜻과 정으로 인민들을 이끄는 위대한 동지입니다. 수령에게 인간적으로, 동지적으로 매혹될 때 절대적인 충실성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신비화·신격화되었던 기존 수령의 위치를 매우 인간적 풍모로 인민들이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동지적 개념의 성격으로 전환시켰다. 쉽게 표현하면, 신비화시켰던 수령을 인간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적 위치에 놓였던 수령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린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북한정권의 지도자상징정치 연구”)을 쓰면서 김정은의 수령 등극 시기에 관심을 가졌던 필자의 눈에는 상반된 두 가지로 읽혔다. 김정은이 자신의 신격화 작업이 현실적으로 벽에 부딪히니까 어떻게든 수령으로 등극하기 위한 하나의 꼼수인가. 아니면, 자신을 굳이 신격화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인가. 어쨌든, 수령의 위치를 대폭 하향조정 했던 김정은은 작년에 수령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 합의가 결렬되었지만 계속해서 대화를 모색하던 시점에서 외부세계로부터 독재정권, 비정상국가라는 눈총을 피하기 위한 측면으로 보인다. 당시 ‘정상적인 지도자’ 코스프레가 김정은에게 있어 가장 큰 숙제였다. 작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은 것 또한,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김여정의 대북전단 비난 성명부터 시작된 김정은 띄우기
2020년을 ‘정면 돌파의 해’로 내세운 김정은에게 있어 외부세계의 눈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2018년 평화공세 이전으로 다시 회귀하며 대미·대남 강공드라이브를 걸었다. 중국이라는 뒷심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내심, 중국에 기대어 난국을 모면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큰 변수가 생겼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것이다.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김정은은 부랴부랴 북중 국경을 폐쇄하며 중국인 관광객의 유입을 올 스톱시켰다. 휘청거리던 북한경제는 곤두박질쳤다.
내부 동요가 충분히 짐작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인지 김정은은 두문불출했고 태양절 참배식에도 불참했다. 이후, 김정은 신병 이상설이 터져 나왔고 급기야 리더십 위기설 및 리더십 교체설이 나돌았다. 차기 리더십으로는 김여정이 점쳐졌다. 대북전단 문제를 제기하며 대남 비난 성명을 앙칼지게 한 김여정의 인상이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6월 23일, 당중앙군사위를 소집한 김정은이 대남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하면서 리더십 교체설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왜 북한은 뜬금없이 대북전단 살포 문제를 들고 나왔는가. 그것도 김여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말이다. 내부단속, 내부통제 측면이 강하다. 민심의 동요 및 이반으로 내부통제가 절실했던 것 같다. 김여정을 선두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서 대북전단 비난 성명, 시위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대중시위에서 내걸었던 것이 바로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 대중적 시위를 기점으로 김정은의 권위와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김정은과 수령 상징을 연계시키는 시도도 나타났다.
김정은 절대지존의 상징, ‘수령’ 등극 초읽기
그 시도는 노동신문 6월 11일 자에 실린 ‘최고존엄은 우리인민의 생명이며 정신적 기둥’이라는 논설에서 포착되었다. 이 글에는 특이하게도 ‘수령’ 용어가 12차례(수령옹위 포함)나 나온다. 내용 전체를 읽어보면 ‘수령’ 용어를 작심하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느낌이 든다. 12차례 중, 10군데가 문맥상 ‘수령’이 김정은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2군데는 확실히 김일성-김정일을 가리킨다. 그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한 생을 바쳐 키우신 영웅적인 우리 인민은 조국이 무엇이고 인간의 참된 삶이 어떤것이며…
나머지 10군데의 수령은 김정은을 가리킨다고 봐도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그 문장들 몇 개를 직접 가져와 봤다.
이번에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우리의 신성한 최고존엄, 우리 인민의 정신적 기둥을 다쳐놓은 것은 우리 인민을 우습게 여기고 롱락한 것이다. 자기 수령, 자기 령도자의 존엄을 지켜싸우는 인민의 보복 열기가 어떤 것인지, 최고존엄을 건드린 추악한 행동으로 차례질 징벌의 불벼락이 어떤 것인지 이제 적들은 똑바로 보게 될 것이다.
누가 봐도 ‘자기 수령’은 김정은을 가리킨다. 이 문장 다음에는 아래 문장들이 나온다.
수령옹위는 우리 인민의 사상정신적특질의 근본핵이다. 수령에 대한 충성을 의무이기 전에 삶의 요구, 량심과 의리로 여기고 그 어떤 천지풍파가 휘몰아쳐와도 자기 수령을 온 넋과 심장을 바쳐 따르는 인민은 이 세상에 오직 우리 인민밖에 없다.
청춘도 생명도 수령의 안녕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수령의 절대적 권위를 보위하는 길에서 한 몸이 그대로 성새, 방패가 되려는 것이 우리 인민의 확고부동한 신조이다.
위 문장들에서 확인한 것처럼, 수령, 수령옹위, 수령결사옹위 용어들이 김정은을 직접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 논설이 나오기 전에도 직접 김정은을 수령으로 지칭하지 않았지만 위 문장들과 유사하게 ‘수령’ 용어가 김정은을 가리키는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필자도 그 점을 깊이 유념했다. 그래서 수령용어가 들어간 이전 기사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위의 논설이 나오기 2일 전인 6월 9일 자 노동신문 ‘무자비한 징벌, 이것이 분노한 인민의 대답이다’에서는 김정은을 분명히 ‘당 중앙’으로 지칭하고 ‘당중앙결사옹위’라고 표현했다.
“당 중앙을 옹위하여 총 폭탄이 될 신념을 만장약한 총 쥔 병사들, 수백만 청년들 아니 전민이 무장하고 전국이 요새화된 금성철벽의 나라 조선이 분노로 치떨며 활화산같이 끓고있다.”
이 기사보다 앞서서 ‘수령’, ‘수령옹위’, ‘수령결사옹위’ 용어가 나오는 노동신문의 기사내용을 검토해 보았을 때 직접적으로 김정은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이나 문구는 나오지 않았다. 6월 3일 자, ‘온 나라를 미덕미풍의 대화원으로 가꾸시여’ 기사에서도 수령결사옹위의 대상은 김일성-김정일에 국한되었다.
지난 6월 달에 ‘수령결사옹위’ 용어가 들어간 기사 및 논설은 약 20개였다. 그 전달인 5월에는 5개였다. 이들 중 ‘수령결사옹위’의 대상으로 김정은을 가리키는 기사는 없었다. 그 이전의 4월(10곳), 3월(8곳), 2월(24곳), 1월(12곳)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신문을 보면, 6월부터 분명히 김정은을 수령에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6월 30일자 ‘조국강산에 끝없이 울려퍼지는 위인송가’라는 기사에서 <김정은장군찬가>를 ‘수령송가’라고 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멸의 혁명송가 <김정은장군찬가>는 새로운 주체 100년대 수령송가의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노래는 작년까지만 해도 단지 ‘혁명송가’라고 지칭되었다(청년문학, 2019.01).
북한 사회(체제)의 진면모
북한에서 김정은은 ‘최고 존엄’으로 추앙받지만 그에 대한 충성구호는 ‘당중앙결사옹위’였다. 유훈통치를 철저히 이행했던 김정일보다 훨씬 야심가인 김정은 성에 찰리가 없다. 김정은의 야망은 ‘최고 존엄’, ‘절대 지존’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바로 김일성의 자리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죽은 김일성이 다스리는 정치시스템을 유지했었다. 김정은의 야망은 이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태양절 참배 불참이 아주 좋은 예이다.
김정일은 엄두도 못 내었던 것을 김정은이 과감히 시도하기 시작했다. ‘수령결사옹위’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김정은, 그야말로 절대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인간적 수령으로서가 아니라 신비화, 신격화된 수령 김정은으로 말이다.
지난 6월, 김여정의 등장은 최고존엄 김정은 수령결사옹위의 화신으로 등장한 것이다. 김일성 수령결사옹위의 화신이 김정숙(김일성 부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정일도 김정숙의 총대정신을 토대로 ‘선군정치’, ‘선군사상’을 작동시켰었다.
경제는 폭망하고, 외교는 완전히 죽 쑤고 있는 김정은이 신적 자리인 수령, 그 절대 지존이 되다니… 이것이 바로 북한사회이다.
<ezekiel21@snu.ac.kr>
글 | 정교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B.A.)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북한 선교(탈북자 사역)를 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국내선교회 북한선교부장을 역임했으며,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북한학과(Th.M. 및 Ph.D.)를 졸업했다.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하고 있으며, 사랑깊은교회(침례교)에서 청소년부를 담당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역사 위에 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