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영향과 장진호 전투 지원팀

장진호 전투 영향과 장진호 전투 지원팀

2020-09-20 0 By worldview

월드뷰 SEPTEMBER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1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장진호 전투의 영향


6·25 한국전쟁 당시 함경남도 북단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1950년 11월 27일 밤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 세계 동계(冬季)전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長津湖)전투 에서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어떻게 성공적인 철수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많은 전쟁 영웅의 이야기가 탄생하였지만, 이러한 전쟁 영웅 뒤에는 알려지지 않고 묻힌,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고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그들의 이야기가 묻혀 버리고 왜곡까지 된, 젊은이들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중공군이 6·25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후,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야간이동을 통하여 함경남도의 산악지대에 잠입했다. 함경남도에는 미 10군단 예하의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미 육군 3사단이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국군 1군단 예하의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3사단은 함경북도에서 작전 중이었다.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 사단 중 10개 사단을 동원해 1950년 11월 27일 밤부터 개마고원의 장진호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예하 31연대전투단에 공격을 가해왔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인근의 장진호.
일자: 1950년 11월 1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유엔군과 국군 북진.
1950년 11월 27일 한반도 북동부 전선.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장진호 전투 위치.
1950년 11월 27일 ~ 12월 11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몇 배에 달하는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해온 중공군은 미 10군단을 궤멸시키고, 국군 1군단도 전멸시키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은 자신들도 큰 피해를 보았지만, 중공군 제9병단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장진호 전투는 유엔군이 흥남항까지 철수하는 동안, 1950년 12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유엔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어 그들이 더는 남쪽으로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어 성공적인 흥남철수가 가능하도록 이바지하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은 서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특히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로 전투가 아닌 동상이나 부상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다.

장진호 전투는 초반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그때의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 장진호 동안에 배치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의 투혼과 희생이 한국전쟁의 흐름을 공산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저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에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카투사와 대한민국 경찰 중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장진호 서안(西岸)의 유담리(柳潭里)에서 시작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장진호 남단(南端)의 하갈우리(下碣隅里)로 옮기려고 트럭에 싣는 작업 중인 미 해병 1사단.
일자: 1950년 11월 말.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1950년 11월 28일부터 유엔 공군 전투물자공수사령부의 C-47 수송기에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 병사들에게 전투에 필수적인 탄약, 통신장비 등을 낙하.
일자: 1950년 11월 말.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미 공군 전투물자공수사령부 소속 C-119 수송기가 장진호에 고립된 유엔군 소속의 미군과 연합국 병사들에게 음식물, 탄약, 군수물자 등을 공중 보급. 영하 27도의 추운 날씨로 이 사진 한 장을 찍은 후 사진기 렌즈가 얼어붙어 더 이상의 촬영이 불가능했다. 당시의 공중 보급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미 공군 전투물자공수사령부의 공중 낙하 보급 기술은 6·25전쟁 기간 내내 향상되었다.
일자: 1950년 11월 30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철수하는 유엔군 –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장진호 서안(西岸)의 유담리(柳潭里)에서 장진호 남단(南端)의 하갈우리(下碣隅里)로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 7연대 병사들. 미 해병 1사단장은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일자: 1950년 11월 29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초반 전투에서 중공군 59사단, 79사단, 90사단(90사단 일부는 장진호 동안의 공격에 참여)의 공격에 철저히 맞서 그들이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한, 극렬한 전투를 통해 많은 사상자가 나와 결국은 부대가 와해된 미 7사단 31연대 전투단 지휘관과 병사들은, 단 2개 대대 병력으로 다른 어떤 부대보다 많은 중공군 80사단, 81사단, 90사단(90사단 일부는 장진호 서안의 공격에 참여) 3개 사단의 총 21개 대대 병력을 맞아 10.5대 1의 전투를 치렀다. 이들이 장진호 전투의 초기 전투 기간 중 5일간이나 장진호 동안에 중공군을 묶어두고 치명타를 가하지 못했다면, 중공군 3개 사단이 하갈우리에 위치한 미 해병 1사단 지휘본부를 공격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미 해병 1사단 전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진호 동안을 공격한 중공군의 수가 이렇게 많았던 것이 밝혀진 것은 장진호 전투가 있었던 1950년부터 40여 년이나 지나 중국의 자료보관소가 비밀해제를 통해 당시의 자료를 공개한 후였고, 그전까지는 한국인 병사인 카투사가 병사들의 50%를 차지했던 미 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이야기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있었다.

모두가 용맹하였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특히 장진호 전투 초기 장진호 서안과 동안에서 처절한 방어전을 통해 공산군을 방어하지 못했다면, 중공군의 계획대로 한반도 북동부에 있는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 전체가 궤멸되었을 것이다.

많은 전사가(戰史家)는 장진호 전투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무너졌다면 유엔군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실제로 중공군 지휘부는 장진호 부근에 원래 미 해병 1사단만이 주둔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중공군 9병단 예하의 12개 사단 병력을 투입하여 미 해병 1사단을 철저히 궤멸시키고자 했었다. 그런 후, 북진한 미 육군 7사단, 미 육군 3사단, 국군 1군단의 수도사단과 3사단, 국군 해병 1연대를 차례로 모두 전멸시켜 유엔군의 힘을 위축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몰아내고, 한반도 공산화를 이루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중공군 지휘부에는 그 계획이 성공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였다.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소장의 탁월한 작전과 지휘 아래 병사들의 놀라운 투혼과 후방 지원 세력의 총합 지원체제를 통해 장진호 철수를 성공해 오히려 이 싸움에서 중공군 9병단(12개 사단, 약 12~13만 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 결과로 중공군의 함흥과 흥남 지역 진출이 2주일간 지연되어 한반도 북동부 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중공군 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의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한반도를 금방 공산화할 것 같은 기세로 밀어붙이던 중공군의 3차 공세는 후속 병력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경기도 수원 일대에서 저지당하고 더는 전진을 할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다시 공산군을 반격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공격으로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로 24Km를 철수하기 위해 5일 밤낮의 사투를 벌인 끝에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7연대의 부상병들은 마침내 구출의 손길을 찾을 수 있었다. 미 해병대원뿐만 아니라, 영국 해병대원,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생존병, 대부분 카투사인 한국인 병사들, 대한민국 경찰은 흥남항으로 철수하기 위해 새로운 제대 편성을 하였다. 미 해병 공병대원들은 활주로를 만들어서, 공군, 해군, 해병 항공단의 비행기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여 마침내 부상병이나 동상에 걸린 병사들을 후방으로 보내어 입원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자: 1950년 12월 2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미 육군 3사단 제92포병대대의 대원들이 함흥 북쪽에서 155밀리 곡사포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하는 유엔군 병사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엔군은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 생존 병사들로 구성된 임시 대대, 영국 해병 41특공대, 한국인 카투사 병사들, 대한민국 경찰들로 구성되었다.
일자: 1950년 12월 2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서 유엔군과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지역의 견디기 어려운 강추위와 식량부족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장진호 전투 초기부터 중공군 포로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 체포된 포로들도 많았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자발적으로 투항해오는 포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서 장진호 동안에서 생존한 미 육군 7사단 31연대 병사들로 구성된 임시대대의 병사가 중공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2월 초.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언덕의 참호에 숨어서 공격하던 중공군을 유엔군 항공기의 근접지원으로 격퇴한 후에 미 해병대원들이 진격하고 있다. 흥남항에 정박한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 근접항공지원팀의 공격 목표지점인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일자: 1950년 12월 초.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장진호 전투 지원팀 – 총합 지원체제(Total Supporting Systems)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장진호로부터 철수한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 영국 해병 41코만도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 고토리 등의 중간중간에 만들어 놓은 원진(圓陣)을 거치면서 조직적인 철수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휴식과 재보충, 재보급을 받는 방법으로 후퇴하면서 이들은 가능성이 희박했던 철수 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지휘관과 병사들의 놀라운 투혼과 막강한 화력의 우월성이 장진호 철수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후방 지원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바로 국력이었고 여럿이 힘을 합쳐 싸웠던 유엔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산군이 이러한 총합 지원체제를 갖춘 유엔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인해전술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모두가 힘을 합쳐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1950년 12월 6일 장진호 남단(南端)의 하갈우리(下碣隅里) 돌파작전 때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 생존 인원으로 구성된 임시대대 병사들이 함께 방어를 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2월 6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1950년 12월 8일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서 고토리(古土里)로 철수하면서 이송한 미 해병, 영국 해병, 한국인 카투사 병사들의 시신을 고토리에 조성한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일자: 1950년 12월 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1950년 12월 함경남도 북단(北端) 개마고원 지대의 장진호 남쪽의 고토리(古土里)에서 흥남항을 향해 남쪽으로 철수하는 유엔군과 같이 이동하는 중공군 포로들. 당시는 영하 30도 가까운 추위였는데 중공군은 옷은 두툼했으나 신발이나 장갑 등 기타 물품의 보급은 충분치 못했다. 장진호 전투 당시 그들의 지휘관은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일자: 1950년 12월 초.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장진호에서 성공적인 철수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총합 지원체제에 대한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1. 유엔군 사령부 : 유엔군 사령부는 장진호에서 모든 유엔군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철수할 수 있도록 총합 지원체제를 구성하고 진행하는 데 중추 역할을 하였다. 유엔군 사령부 예하의 단위 사령부가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지만, 이것은 철수 작전을 명령하고 지휘한 유엔군 사령부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하였다.

2. 유엔 공군사령부(미 극동 공군사령부) : 유엔 공군사령부는 한국에 주둔하던 미 5공군의 협조를 받아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유엔군에게 보급품을 운송하는 유엔군 수송기를 소련의 신예 미그전투기(MiG 15)로부터 보호하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한반도 상공에 출현하기 시작한 소련의 미그전투기는 아직 그에 대적할 전투기를 동원하지 않은 당시 유엔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줄 수도 있었다. 또한, 15일 동안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 철수하던 유엔군 병사들은 철수하는 동안 유엔 공군사령부 예하 전투물자 공수사령부로부터 1개 사단에 필요한 전투 지원 물량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의 보급품을 공중 투하나 중간중간의 활주로를 통해서 보급받을 수 있었다.

유엔군과 비교할 때 추가 보급품이 거의 없는 상태의 중공군이 각종 전투용 탄약과 포탄, 식량 등과 같은 전투에 가장 필수적인 보급품뿐만 아니라 중장비까지도 적시에 지속해서 지원받는 유엔군을 대적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C-119 수송기 313대와 C-47 수송기 37대가 총 1,580.3톤의 보급품과 장비를 투하하였으며, 심지어 교량도 투하했다. 당시 황초령 고개의 폭파된 다리를 대체할 교량의 투하는 세계 전투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었고, 이러한 고도의 기술을 포함한 후방부대의 철저한 지원을 받는 미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을 중공군이 대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950년 12월 10일까지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와 고토리 야전활주로에서만 총 240회나 출격하여 273.9톤의 보급품을 공수하였고, 총 4,689명의 부상병을 항공기로 후송하였다.

또한, 미 해병 1사단의 부상병을 후방으로 이송하는 한편, 새로운 보충병을 항공기로 하갈우리와 고토리 야전활주로를 통해서 충원하여, 철수하는 부대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작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지원하였다.

3. 유엔 해군사령부(미 극동 해군사령부) : 중공군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자 위기에 처한 유엔군 지상군을 지원하는 근접 항공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엔 해군사령부 소속의 해군 제독 에드워드 이웬(Edward C. Ewen) 소장이 지휘하는 77기동항모단(Task Force 77-Fast Carrier Force)의 해군 함재기들은 장진호에 고립된 병사들과 한반도 북동부에 산개된 유엔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날씨만 문제가 없으면 그들은 매일같이 수백 번씩 출격,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유엔군을 지원하여 이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지원하였다. 또한, 77기동항모단에 소속된 함정들은 장진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내륙지역까지 다다르는 함포 사격으로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유엔군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해군 함재기 지원과 함포 사격뿐만 아니라, 한반도 북동부의 비행장인 연포공항으로부터 출격한 미 해병 1항공대 소속 3개 해병 비행단 항공기 외에 흥남철수를 지휘한 90상륙지원단(Task Force 90-Commander Amphibious Group I)의 미 해군 항공모함 3척에서 발진한 미 해병 1항공대 소속의 함재기 지원도 있었다. 미 77기동항모단은 장진호 철수의 성공 이후에도, 계속해서 60일 이상을 해상에 있으면서 철수 작전에 참여할 정도로 흥남철수작전이 성공리에 완료될 때까지 크게 기여하였다.

4. 미 해병 1항공대 : 필드 해리스(Field Harris)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 1항공대는 장진호 전투 기간 내내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동안의 미 7사단 31전투연대단에 근접 항공지원을 제공하였다. 항공지원은 중공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였다. 미 해병 1항공대는 미 해병 1사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부터 장진호에서 흥남항으로 철수한 12월 11일까지, 해병 1사단과 함께 주둔하면서 폭격 위치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해병 1항공대 소속 전술항공통제반의 협조로 3,703번의 비행을 하였다.

또한, 미 해병 1사단 지원 468번, 국군 1군단 지원 67번, 미 육군 7사단 지원 56번, 미 육군 3사단 지원 8번 등 총 599번의 근접 항공지원을 기록하였고, 근접 항공지원 외 다른 임무는 항공 정찰과 일반적인 폭격이었다. 이러한 지원으로 미 해병 1항공대는 장진호 전투와 철수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미 해병 1항공대장 필드 해리스 소장은 자신이 지원하던 장진호 전투에서 아들을 잃었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필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미 해병 1사단 7연대 3대대장 윌리엄 해리스(William F. Harris) 중령은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실종되었다.

5. 미 10군단 지휘본부, 미 육군 7사단, 미 육군 3사단 :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철수하는 부대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미 10군단 지휘부와 미 육군 7사단, 미 육군 3사단은 최대한의 지원을 하였다.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앨몬드(Edward Almond) 소장과 그의 지휘부는 장진호 전투에서 고전을 하는 부대를 구출하려고 유엔군 사령부와 유엔 공군사령부, 유엔 해군사령부 등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이들의 지원을 최대한 유도하여 장진호에서 병사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장진호 동안에 합류하지 못하고, 인천상륙작전 때부터 함께 고락을 나눠왔던 동료가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미 7사단 31연대 2대대 병사들은 12월 1일부터 고토리에 도착하여 미 해병 1사단 1연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다.

고토리에서 출발해 진흥리를 거쳐 함흥~흥남까지는 미 육군 3사단이 방어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철수할 수 있었다. 특히 미 3사단은 부대의 별칭을 따서 만든 특수지원팀인 ‘태스크 포스 독’을 만들어 철수를 지원하였는데, 이때 미 3사단 병사 중에서도 중공군과의 교전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다.

아직도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이 아무런 도움이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철수한 것으로, 지나치게 ‘그 겨울의 전설’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2개 대대 병력으로 중공군 21개 대대 병력에 맞서느라 무참하게 희생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의 큰 희생이 뒷받침되었고, 진흥리에서 흥남항까지의 철수는 미 육군 3사단의 철저한 방어가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리상으로 볼 때도 장진호에서 진흥리까지의 거리(56Km)보다 진흥리에서 흥남항까지의 거리(72Km)가 훨씬 먼 거리였다.1)

또한, 이후로도 6·25 한국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고 많은 희생을 하였던 미 육군 7사단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을 7사단 행진가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6. 자유세계 국민의 염원 :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철수하는 부대의 안전한 철수 뒤에는 그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부모, 형제, 아내, 연인, 자식, 친구들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만이 아닌 자유를 사랑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몸과 마음을 함께했던 당시의 유엔참전국과 의료진 지원 국가, 물자 지원 국가 등 전 세계인의 염원이 함께했었다.

이 항공사진은 장진호 인근의 개마고원 산악지대를 헤치고 고토리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대열. 유엔군은 떼거리로 달려드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흥남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 북한 피란민들도 흥남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가고자 유엔군을 따라나섰다.
일자: 1950년 12월 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파괴된 교량과 임시 교량 공중 투하 – 1950년 12월 9일 중공군이 해발 457미터 깊은 협곡에 있던 황초령 고개의 유역변경식 발전소 수문에 있는 교량을 5미터 가량 폭파하여, 중장비, 중화기 등과 함께 이동하는 유엔군은 더는 철수를 하지 못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유엔 공군사령부 예하 전투물자 공수사령부에서, 교량도 투하해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당시 황초령 고개의 폭파된 다리를 대체할 교량의 투하는 세계 전투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일자: 1950년 12월 9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1950년 12월 10일 철수하는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전투에서 생존한 병사들로 구성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 생존병력으로 구성된 임시대대(국군 카투사, 국군으로 활약한 대한민국 경찰, 영국군 특공대 포함) 대열과 뒤섞여 움직이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 이들은 중공군을 피해 자유와 생명의 세계인 대한민국으로 가고자 따라나섰다. 이들 북한 주민들에 숨어서 유엔군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는 중공군 때문에, 철수하는 미군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군 지휘관들은 북한 주민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도록 피란을 허용하였다.
일자: 1950년 12월 10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맺음말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당시의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고자 다른 나라 사람이 싸우다가 전 병력이 궤멸당할지도 모르는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을 잘 모르고 있었고, 지금도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무심하고 야속한 사람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깊이 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한반도는 전선(戰線)이 따로 없이 바로 내 앞뒤가 전선이었고, 모든 국민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어 남의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매일 매일의 생활을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영향과 후유증이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쟁이 무서운 것이고,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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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