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입법이 기독교 상담에 미치는 영향

포스트모더니즘 입법이 기독교 상담에 미치는 영향

2020-09-15 0 By worldview

월드뷰 SEPTEMBER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2


글/ 김지연(약사)


창조 질서 vs 법 vs 영혼 돌봄 상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라는 구절을 통해 기독교인 상담자들은 성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천부적인 것임을 전제하고 내담자들이 성별 정체성 등으로 혼란을 겪을 때 성별 속에 드러난 하나님이 부여한 기능적 질서를 잘 지키며 살도록 돕고 상담해 왔다.

혹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 등의 말씀을 통해 바른 결혼관을 탑재하고 이러한 가치체계가 명료하게 믿음의 세대들에게 전수되도록 상담해 왔다.

남녀의 구별, 그 둘의 연합인 결혼. 나아가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보편적 질서는 기독교에서 출발하고 있다. 기독교 상담가에게 성경은 기독교 영성을 논함에 있어서 영적 분별(spiritual discernment)의 유일한 가이드라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진리여야 함을 믿는다. 그러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 걸쳐서 최근 기독교적 가치 체계 자체가 심각하게 배제당하기 시작했고 이 현상은 기독교 상담의 현장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LGBT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전 세계 27개국에서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 등 인권과 시민권에 기초하여 동성결혼을 전면적으로 혼인의 형태로 포섭하고 이를 법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동성의 동반자 관계를 혼인 관계와 유사하게 법적으로 보호하는 시민 결합(Civil union)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들을 포함하면 전 세계 36개 국가가 동성 커플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감독이 동성결혼 소송을 걸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동성애 관련 법제화의 시도가 있다(국제앰네스티. 2016.11.05.)

이러한 사조 속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사람은 주어진 성별이라는 순리에 감사하며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자녀를 낳고 하나님을 섬기며 독처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이 옳다는 기독교적 인식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다. 교육과 상담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뚜렷하다. 실제로 많은 포스트 모더니스트(postmodernist)들에 의해 서구의 기독교적 보편성은 제거해야 할 거대 담론(meta-narrative)으로 간주되고 있다. 상담에서 보편성이 제거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실상 기독교적 기존 가치관들이 상담에서 점차로 배제됨을 의미한다.

국제 엠네스터 엔블럼.


기독교 상담의 영역으로 침투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담자의 영성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이미 상담학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상담학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상적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기독교 영성으로 영혼을 돌보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들어 소위 “젠더 내담자”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동성애(성적 지향)와 성별 전환(성별 정체성)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사례가 젊은이뿐 아니라 장년층에서도 급증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08년도에 성별 전환 시술을 원하여 상담하는 여자 청소년들의 상담이 10년 새에 4,415퍼센트 증가했다(크리스천투데이. 2018.09.19.).

기독교 상담자들은 이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과 시선을 품고 굳건한 영혼 돌보미로 서야 한다. 동성애로 고민하는 내담자 혹은 성별 정정 수술을 고민하는 내담자를 대하는 기독교 지도자의 영성은 매우 중요하다. 말씀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영성을 다져온 상담자가 동성애로 고민하는 내담자를 단 한 번에 자발적인 탈동성애 결단으로 이끌어 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다. (물론 탈동성애란 동성애적 행위나 충동을 온전히 끊어 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시작함을 의미하므로 탈동성애 결단을 유지하도록 지지하는 상담과 교육을 이후에도 병행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내담자가 자신도 모르게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로 물들어 있는 경우 이런 기독교 상담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생식기를 절제하고 트랜스젠더가 되려고 하는 내담자에게 그것이 당신의 결정권이라고 성별 정정을 부추기는 상담을 해주면서 ‘나는 인류애를 실현 중이야.’라고 착각하는 상담자를 만난 내담자의 영혼을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볼 것인가.

모든 교회의 리더가 공감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거대 담론은 결국 ‘기독교적 진리’라는 점이다(Kuby, Gabriele. 2018).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중무장한 개인이나 사회는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했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돕고 자녀들은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을 일구는 것이 기독교 내지는 자본주의가 강요한 잘못된 거대 담론이라고 치부하고, 그 구조를 해체하는 일에 매진한다. 이러한 사조는 궁극적으로는 성경에 근거하여 상담하고 지도하는 기독교 영성 지도자들을 공격한다. 성경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기독교적 서구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메타 내러티브”에 불과하다 치부하고, 이 메타 내러티브를 타파하여 성경을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도록 방치하고 관용하는 사회로 변질되는 이때, 건강한 기독교 상담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기독교 상담에 있어서 내담자의 영성이 갈수록 중시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 질서를 교회 안으로만 가두고 모든 공적인 영역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점령한 사회 분위기가 내담자의 영성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치인설몽(痴人說夢)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영성 지도가 가능한가?


사회 문화적 태도로 드러나는 악은 법치 국가 안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즉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법의 영향력을 통해 필연적으로 드러난다. 즉 법치국가에서 법은 국민의 모든 삶에 영향을 주며 필연적으로 영성에 영향을 준다. 악한 법은 악을, 선한 법은 선을 도모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함수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내담자의 영성과 사회제도는 매우 밀접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영성이란 없다. 세상의 문화가 낳은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내담자의 삶의 지평에서 교차로처럼 만난다. 우리는 그 견디기 힘든 긴장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상담가의 자세여야 한다.

영적 분별을 흐리는 세계관이 가득한 구조 속에서는 내담자의 영적 성장이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예를 들어 법치국가에서 반성경적인 법이 만들어진다면 그 법을 준수해야만 하는 모든 국민은 영적 분별에 훼방을 받거나 시험에 들 수 있다. 생명, 즉 한 인간의 영혼을 대하는 나라(사회, 개인, 공동체)의 태도가 하나님이 한 인간의 영혼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될수록 그 나라(사회, 개인, 공동체)의 영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공동체 혹은 개인이 영혼을 대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자세와 동떨어질 때 그 영성은 저질스러워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생명주의 운동 진영은 기독교가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고 이러한 기독교 생명주의 운동의 관점에서 봤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얼마나 기독교 영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논하고 이에 대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하여 상담과 교육에 적용해야 한다.


기독교 상담의 자리까지 밀고 들어온 포스트모더니즘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의 구별을 ‘영적 분별(spiritual discernment)’이라고 부른다(Gerald G. May. 2006). 영적 분별을 중시하는 기독교인들의 영성은 반드시 포스트모더니즘과 부딪힌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고전 13:6).”,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등 수많은 성경 구절이 선과 악의 구별, 나아가 악과는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심기를 끝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최대의 미덕은 바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분별을 허물어뜨리는 대책 없는 관용(tolerance)적 태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이상적인 사람은 절대적인 가치나 기준을 포기한 상대주의적이고 관용주의적인 사람이다. 거대 담론에 의해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는 옳고 그름을 개인이 각자 판단하거나 그런 것 자체를 부인하면서 사회에서 상대방과 불편한 표현을 하지 않고 살도록 최적화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사람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구별을 무너뜨리는 관용, 즉 악과 선 혹은 참과 거짓의 구별 자체를 오히려 문제시하고 모두 관용하자는 태도이므로 기본적인 영적 구별을 전제로 한 영성 지도와 맞지 않게 된다.

늘 남자로 알고 지내던 이웃집 아저씨가 어느 날 “나 이제 여자예요.”라고 말하며 여성복을 입고 여자 같은 몸짓을 할 때 기독교 정신으로 중무장한 사람은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어서는 안 되며 성별 정정은 창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중무장한 사람은 “당신이 여자라고 느낀다면 나도 거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당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당신의 성별 정정을 관용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기독교 상담학 안으로의 무분별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동성애를 기독교적 가르침대로 그릇된 행동이라고 전제하는 것을 멈추고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혹은 혐오적 “편견”을 감소시키는 용어들로 바꾸어 쓰라고 슈퍼비전을 하는 상담가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 상담가임을 자처하면서도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고 존중과 배려를 받아야 할 개인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성경적으로 죄인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이 “편견”이라고 치부되는 상담의 현장을 상상해 보라. 과연 그 상담을 내담자로 하여금 진리의 길로 이끄는 성경적 상담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중무장된 상담자는 동성애를 죄라고 전제하고 상담하는 것 자체를 혐오적 발언 혹은 폭력적 발언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영혼을 죄의 길이 아닌 선의 길로 인도해야 함을 아는 기독교 상담가는 그릇됨조차 옳다고 말해주는 잘못된 관용을 경계한다. 친절을 택할 것이냐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택할 것이냐는 우리의 삶에서 늘 던져지는 질문이고, 이는 크리스차니티(christianity)로 가득한 사람이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가득한 사람이냐에 따라 향방이 갈린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로 꽉 차 있는 내담자는 영혼 돌보미 즉 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영혼을 인도하기는 굉장히 힘든 사조를 탑재하고 있는 셈이다. 영적 분별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혐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나간다면 성령 안에서의 영성 인도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주제별 편견 감소’라는 명목으로 동성애자(homoxexual)라는 표현보다는 ‘성소수자(sexual minority)라는 단어를 쓰자고 하는 기독교 상담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동성애는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되며 인권의 영역에 포함시켜서 보아야 한다는 세상의 가치관을 서슴없이 답습하고 그대로 상담하고 교육하는 영성 지도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현대 상담학의 모습이 기독교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 상담학이 영성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영성은 영적 분별없이 논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 유력한 신학대학교 대학원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 기독교 상담학과 교수는 강의에서 “사람들의 (타고난 성별이 아닌) 성적 선호성을 존중하라. 사람들이 성적으로 선호하는 명칭을 사용하라. 선호성은 시간과 함께 변하고 같은 집단 내 사람들조차 그들이 선호하는 명칭에 대해 이견을 갖기도 한다. 특정 상황에 적절한 성별 호칭을 결정하라. 참여자들에게 선호하는 성별 호칭을 물어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호칭을 붙이는 것을 피하라. 넓게 범주화된 명사를 사용하라. 성소수자, 비혼자, 알코올 중독을 가진 사람들, 조현병을 가진 사람들 등등”이라고 교육하고 있다. 이는 그 교수가 심각하게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성소수자를 지지하기 위해 의도적이라고 한 발언이라기보다는 이미 상담학 안으로 침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의 일면일 뿐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내담자의 영적 성장이란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분별하는 것을 전제한다. 올해 6월 29일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의 결정판이기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죄라고 분별하는 것이 혐오죄다”라고 선포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기독교 상담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적용된 각종 반기독교적인 법안과 영성 지도자의 할 일


성경 말씀을 부인하는 성령 충만은 불가능하다. 한 시대와 한 나라가 반성경적인 법과 제도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속에서 계속 만들어 갈 때 그 시대와 나라를 살아가는 내담자들의 영성의 침해는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아합왕이 박수무당을 공무원으로 뽑아 귀신을 부르는 공식행사를 국가 차원에서 치르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데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내담자들의 영성, 골방 영성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더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적어도 기독교 상담자라면 기독교 진리에 근거하여 상담하되,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영혼을 구하는 상담을 해야 할 것이다. 영혼 돌보미로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 지평이 활발하게 개척되어야 하며 상담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제임스 오어(James Orr)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상담의 영역에서도 복음만이 참되고 포괄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는 그리스도의 선포로 돌아가야 내담자를 궁극적으로 도울 수 있음을 기독교 상담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tybjyok@naver.com>


참고문헌

Gary W. M, David G. B (2011), <영성지도 심리치료 목회상담 그리고 영혼의 돌봄>, 아침영성지도연구원.
Gerald G. May (2006), <영성 지도와 상담>,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명재진 외 5인(2020), <포괄적 차별금지법,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밝은생각.
김지연 (2020), <나의 어여쁜 자야>, 두란노.
Gary W. M, David G. B (2011), <영성지도 심리치료 목회상담 그리고 영혼의 돌봄>, 서울: 아침영성지도연구원.
Kuby, Gabriele(2018), <글로벌 성혁명>, 서울: 밝은 생각.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 개정 2020. 2. 21. [가족관계등록예규 제550호, 시행 2020. 3. 16.] > 종합법률정보 규칙)
서울가정법원 1992.11.20, 자, 92브80 결정; 광주지방법원 1995.10.5, 자, 95브10, 결정 등
대법원 1996.6.11., 선고, 96도791, 판결; 원심판단은 서울지방법원, 1995. 10. 11. 95고합 516 판결
프란시스 쉐퍼(2011), <낙태 영아 살해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생명의말씀사.그레이크 바르톨로뮤(2008), <세계관은 이야기다>,  IVP.


글 | 김지연

이화여자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백석대학교 중독상담학 석사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영남신학대학교 특임교수이며, 차세대바로세우기학부모연합 상임대표, 사단법인 한국가족보건협회대표, 사단법인 한국보건정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동성애의 확산에 따른 의료보건비용의 증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보건의료정책 전문가과정(HPM) 우수 연구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덮으려는 자, 펼치려는 자>, <너는 내 것이라>, <나의 어여쁜 자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