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이 옳았다!
2020-02-18
월드뷰 02 FEBR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1 |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 6·25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은 처음부터 참전키로 했다.
– 중국 공산당의 위성국인 북한 공산군이 패퇴함으로써 직접 참전하게 된 것뿐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과 철저한 안보 의식 결여
2020년은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01년 10월 14일, 6·25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참석한 이후 국가 안보 교육을 시작한 필자는, 그동안 아스팔트 거리에서 5,200여 회 이상 <생명의 항해 6·25 한국전쟁 사진전>과 <6·25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지원 세계 67개국 국기 퍼레이드>를 해 온 사람으로서, 경제가 발전하면 안보도 강해진다고 착각하고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오히려 더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더군다나 2010년 6·25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때처럼, 국가 예산을 빼먹기 위한 안보 관련 흉내 내기 행사만 많아지겠구나 하는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6·25 한국전쟁 3대 영웅인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김창룡 특무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기를 소망해왔다. 특별히 6·25 한국전쟁 3대 영웅은,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던 북한 김일성이 언급했던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유엔군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국군에 깊이 침투해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솎아냈던 김창룡 특무대장 세 명 때문에 한반도 공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탄식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먹고 살만하면 되었지, 안보가 무슨 상관이야”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2008년 6·25 한국전쟁 사진전을 열었을 때는 전시된 사진을 촛불 시위대가 모두 불태우기도 했었고 청계광장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두 명을 데리고 나온 어느 젊은 엄마가 맥아더 장군 사진의 눈을 우산 꼭대기로 찍으면서 “이놈 때문에 통일이 안 됐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중공군 개입과 전세의 역전
1951년 1·4후퇴는 38선을 넘어 북진 통일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한없이 밀려났던 시기였다. 그러나 전세를 다시 역전 시켜 지금의 휴전선 인근까지 유엔군과 국군이 그들을 밀어붙이자, 수세에 몰린 공산군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상을 시작하였고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공산국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 포로들을 살리고자 인도주의적인 휴전협정으로 6·25 한국전쟁은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지난 70년간 2,500만 북한 주민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마나 다름없는 삼대 세습 공산 독재 정권 아래에서 집단 노예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에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 당시의 전쟁 상황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한반도를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분석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이 분석은 그동안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접근이라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 누가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정확한 전세 분석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자 유엔군 사령부는 새롭게 나타난 적은 북한 공산군이 아니라, 약 30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유엔군이 전적으로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으며 당분간 공격보다는 방어로 전환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겠다.”라고 하는 내용을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했다. 한반도의 전쟁이 ‘새로운 전쟁’으로 돌변하자 미국은 새로운 정책과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만주 폭격과 중국의 해안 봉쇄는 물론 중국(대만)의 국민 정부군을 투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국제적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한 워싱턴의 트루먼 행정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정책 결정자들은 맥아더 사령관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던 1950년 11월 30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식적인 성명을 통해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 당시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 소련의 참전을 유발하여 유럽까지 전쟁의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국제 안보상의 문제였다.
영국과 중국 공산당의 밀월 관계는 없었는가?
그 당시 1950년 12월 6일,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 Attlee, 1883-1967) 영국 수상이 미국을 찾아 원자폭탄 사용을 극구 만류시켰던 것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더 많은 자료를 조사해야겠지만 지금까지의 분석으로는 영국 정부는 당시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홍콩 문제를 이유로, 중공 공산당이 보낸 군대를 괴멸시키는 것 자체에 많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병사를 보내 대한민국을 지킨 영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20년간 수집한 6·25 한국전쟁 자료 중에는, 심지어 1954년 8월 24일 클레멘트 애틀리 전(前) 영국 수상이 중국 공산당 주은래(周恩来) 총리와 만찬에 앞서 건배를 하는 장면의 사진도 있다. 이 장면은 필자에게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과연 진정한 우방은 누구였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누가 우리의 편인가조차도 정확히 판가름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 유엔군의 대부분을 차지한 미군이 그나마 대한민국을 지키고 북진통일을 하려고 했던 그 열정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 안보 우려와 한반도의 위기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6·25 한국전쟁의 상황이 급변하자, 전쟁이 유럽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될 것으로 우려한 많은 유럽의 정치가들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간의 공방은 그 당시의 국제적인 정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미군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인가를 결의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당시에 유피아이(UPI: 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휴 베일(Hugh Baille) 사장은 유럽의 많은 정치가와 회견한 결과에 의거,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11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럽의 정치가들은 아시아의 전쟁을 유럽 방위 기구의 성립을 방해하는 악몽으로 보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전신을 발송하고 맥아더 사령관의 답변을 요구한다.
중공군의 급작스러운 참전으로 인해 휘하의 많은 유엔군 병사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있던 극한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지휘관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보낸 전문(電文)을 게재한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보낸 전신문]
1950년 12월 1일, 금요일, 뉴욕 월드 텔레그램 판1950년 12월 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UPI) – 다음은 맥아더 사령관이 오늘 UPI의 사장인 휴 베일에게 보낸 전신문의 전문(全文)이다.
일찍이 인간의 인내심이 이처럼 심하게 시험받은 적은 없었고, 인간 행동에는 고도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6·25 한국전쟁 동안보다도 더 지속적이면서도 확고하게 보여준 때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 초기부터 북한군이 완전히 격퇴될 때까지 중립지대라는 이점을 가진 불가침 지역으로부터의 중국공산당의 지원은 공공연하고도 악랄하게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국경지대에서부터 남쪽의 전선까지 보급로가 길어지다 보니 보급은 공습으로 저지당하기도 하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 괴멸당할 정도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래로 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해 유엔군이 공산군의 보급로를 통제하는 지역이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은 그들의 국경선에서 급박한 전선으로 가는 방법으로 야간 행군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중공군 당국자는 야음과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공중 감시망과 공습을 피하면서 군대와 보급 물자를 대규모로 전진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11월 20일에 아군의 대진격이 있었는데, 군단과 사단으로 편성된 약 20만 명의 중공군들이 압도적인 군세로 우리의 전선에 부딪혀 왔습니다. 철저히 통제된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비밀리에 초기 전쟁 준비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압도적인 군세로 대한민국에 타격을 가하려 했던 북한의 전략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도 변함없이 추종되었다는 사실이 아군이 원래의 계획에 맞춰 북진하였기 때문에 밝혀진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중국 공산당은 – 이것은 미래의 공격에서도 반복되겠지만 – 은밀히 정체를 감추고 공격하는 은막전술(隱幕戰術)을 이용해 유엔군을 파멸시킨 후 막강한 병력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분명한 목적인 한반도를 단숨에 정복하려던 전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어마어마한 자신들 군대의 인명 손실을 발생시키면서, 수적인 우세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성공한 전략이 없진 않지만, 전략을 조기에 드러냄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전략적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유엔군 사령부는 패퇴한 북한군을 지원하는, 젊고 숙련된 데다 신무기로 무장하고 끊임없이 증강되어 수적인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과의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습니다. 현재 상황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경선을 넘어 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공격만을 허용한 원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가 싸우는 이유에 대해 숭고함을 부여해 준 대원칙과 기준을 분명히 밝히고, 나아가 이 전쟁을 국지전화하여야 한다는 범세계적인 열망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져 왔고, 지금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북한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 내내 우리는 국경선을 소심하다 할 정도로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국경선을 넘어 보복할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권고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원칙 아래 모든 장병과 참전국들은 싸워왔으며, 필요하다면 비할 바 없이 용맹하게 계속해 싸울 것입니다. 대원칙을 준수하고 앞서 말씀드렸던 유엔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내린 결단이었기에, 유럽의 언론이 책임 있는 지면에서 무책임하게 언급한 것을 지적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응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지 정보가 부족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유엔 공동 창설국과 그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엔의 결정에 따라 본 사령부에 주어진 사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승전할 때나 역경 속에서도 본 사령부는 지휘방침과 명령에 따라 정확하게 군무를 수행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본관은 매우 근시안적이고도 일방적인 견해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인들에게야 유럽의 번영과 안녕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서구, 특히 아시아로부터는 공격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모든 우호적인 정책과 재정적인 지원은 단지 유럽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사용하여야 할 지원을 삭감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 침해도 결국 유럽의 자유에 대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자유의 문제는 범세계적인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유를 완전히 잃게 되는 근원이 됩니다. 만약 이곳 아시아에서 적의 도전에 불굴의 결의로 용감히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유럽의 전장에서 싸우게 될 것이고, 어쩌면 패전할지도 모릅니다.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수립된 모든 전략과 전술은 전적으로 유엔의 결정에 따른 것이며, 본관이 지휘한 바는 주요 단계마다 사전에 보고하였고 흔쾌히 승인받았습니다. 본관은 사령부의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 38선이나 평양 또는 국경선 못미처 어느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권고를 어떤 당국으로부터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엔 당국의 소관이었으며, 그랬다면 지휘부는 그에 따라 실행했을 것입니다. 중공군의 맹습에 대한 책임을, 정도를 불문하고 전쟁 자체의 전략적 방향에 돌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유엔에 대항하여 참전키로 한 결정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근본 원칙으로서, 그들의 위성국인 북한군이 패퇴함으로써 직접 참전하게 된 것뿐입니다.
지휘관의 갈등과 고민
중공군의 전쟁 개입은 한국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중국 공산당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침공했다”라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라고 하지만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든 간에 그들의 침략은 단순히 한반도 북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철수만을 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북서부 전선에서 미 8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과 북동부 전선에서 미 육군 10군단이 주축이 된 유엔군의 완전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난 후, 한반도에는 극히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950년 12월 30일 맥아더 사령관의 중국 본토 공격 건의가 있었고, 1951년 1월 10일 합동참모본부에 재차 공격을 건의한 것만 보아도 상황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현재 상황에서는 남한에서 전선을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유엔군의 철수는 불가피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지킬 것인지 결정하여야 합니다.”
1951년 1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친서를 보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전쟁은 한반도 내에서만 국한해야 하며, 38선에서 휴전 협의를 시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미 8군을 철수하라.”
당시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가지 극한 상황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1951년 1월 9일 처음으로 유엔군 사령부가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철수에 대비한 대한민국 정부의 피란 계획을 수립했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1951년 6월에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되기까지 했었다.
만약 철수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한반도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만약 한반도에서 핵폭탄이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을 포기하고 피란을 떠났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의 갈등을 이야기하지만,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손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목적과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지휘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고, 대한민국과 자유세계의 은인들이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도 인류의 생명은 존중되어야만 하고, 세계 평화를 정착시켜야만 한다는 대원칙 아래 이루어진 방법론상의 갈등과 대립이었을 뿐이다.
<mv14000@gmail.com>
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