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2020-02-19
월드뷰 02 FEBR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2 |
글/ 주연종(사랑의교회 포에버 평생교육원 담당 목사)
현재 지구상에는 유엔 기준으로 195개국, 올림픽 회원국 기준으로는 206개국, 국제표준화기구(ISO) 인증 기준으로는 249개국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분단국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영원한 국가는 없다
현존하는 국가 중 그 역사가 1천 년을 넘기는 국가가 얼마나 될까? 일단,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最古)의 기록을 가진 나라는 이집트인데 약 4,500년 전의 문명과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국가들의 연대기를 살펴보면 미국의 경우는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니 역사가 250년밖에 안 되었다. 인도는 베다 시대를 시작으로 나타난 국가 형태가 마우리아 왕조를 거쳐 무굴제국의 형성과 쇠퇴를 보이다가 결국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1947년 인도 공화국이 탄생했으니 미국보다 더 젊은 신생국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1949년 10월 수립되었으니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탄생한 신생국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탈리아는 1870년,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반도를 통일한 후 이탈리아왕국을 선포하였지만 현재의 이탈리아 공화국은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공포됨으로 탄생한 것이다. 독일은 800년 12월 25일, 당시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왕 샤를마뉴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며 “왕은 이제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라고 칭하며 시작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 국가였다. 그러나 느슨한 연합체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 대주주는 교황이었고 황제는 제국내의 왕들 중에서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제국조차도 1806년 8월 6일, 마지막 황제 오토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으며 해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던 비스마르크는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2제국”(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으로 한 게르만족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에 대한 별칭)을 선포하며 자신을 수상으로 칭하고 출발시켰지만, 제2제국도 1918년에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뒤로 독일은 히틀러에 의해 제3제국을 소망했지만 2차 대전의 패망으로 좌절되었고, 1945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형태로 통일을 이루어 현재의 독일로 재편되었다.
한때, 유럽대륙과 러시아, 중국까지 지배했던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기마민족, 유목 생활의 한계를 딛고 팍스 몽골리카를 실현한 듯했으나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에 이르러 명나라에 정복당한 후 다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지금의 몽골은 1924년에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했었던 세계 역사상 소련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1992년에 이 체제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단지 역사적 추억에 그칠 뿐 당대의 문자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에 독립을 선언하고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에 다시 주권국가를 설립하기까지 무려 2500년이나 걸렸다.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된 후 제대로 된 주권을 갖지 못했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은 오래되었지만 그 국가가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현재의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를 13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독일 지역만 해도 2000여개의 영방(領邦)으로 분할되었던 때도 있었고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의 유럽은 제후들이 통치하던 최소 400여개의 국가 형태의 통치 단위가 있었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던 중국도 부계사회와 적장자(嫡長子) 계승이라는 이른바 종법제도(宗法制度)가 정착되어 가정 → 가족 → 종족 → 사회 → 국가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상당 기간은 시골의 촌락 단위 공동체가 봉건 형태의 결속을 통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국가는 불완전한 형태의 기구에 불과
국가는 명멸하는 세포와 같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 언어를 나누어 그들을 흩으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선지자를 세워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시는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다(렘 1:10).
어거스틴은 지상의 국가를 강도단으로 칭하며 통치욕으로 짓밟고 굴복시키는 행위를 “큰 강도질”로 묘사함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구별하였다. 칼빈은 세속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정당한 통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받는 세속적 통치와 더불어 양심의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는 것에 해당하는 영적인 통치를 동시에 받아야 하므로 이중통치하에 우리가 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어거스틴의 두 국가론을 수용한 것이다.
더구나 칼빈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섭리가 그리스도인 관리들과 그리스도인 스스로 성화의 삶을 통해 세속국가, 즉 정부에 전달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국가를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교정되어야 할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루터 역시 칼빈과 유사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두 권세를 세우셨는데 그 하나는 영적 권세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백성들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 권세로서 비 기독교인들과 사악한 자들을 다스리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인간의 죄에 대해 징벌을 하시고 인간의 탐욕과 죄가 낱낱이 드러나도록 하셨다고 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전쟁통에도 자기가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한 인간이 한 놈인들 있겠느냐”는 스크루테이프의 지시를 통해 전쟁으로 인해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갈까 봐 조바심을 가지는 사탄의 모습을 표현했다. C.S. 루이스는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전쟁을 통해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신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대하 20:15).
그렇다면, 우리가 한 국가를 지고지순한 가치로, 혹은 궁극적 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혹시 그 나라를 뽑고 파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큰 강도질에 해당하는 전쟁을 통해 통치자의 탐욕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 그 나라를 뽑아내려는 행위는 그 나라를 심고 건설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밖에는 없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은 그것을 선언하고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그 외의 모든 지상의 나라들은 명멸하는 세포와 같고 부초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세우시고 멸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잠재적이고 조건적이다.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의 법도와 윤리를 따르거나, 혹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그런 나라여야 하는 조건이 필요하다(롬 13:3). 최소한 그의 백성들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고 보장하는 역할을 하는 나라여야 그 나라의 존재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나라가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의 놀이터로 변해 있다면 그런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소멸되고 파괴되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깃발을 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정작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촛불을 든 세력에 저항하여 “이건 나라냐”라고 깃발을 들고 달려 나왔다. 그런데 어떤 깃발을 들고 어떤 구호를 외쳤든 상관없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 두고 싶다. 우리가 잘 지켜내도 대한민국은 언젠가는 소멸되게 되어 있다. 한반도에 가장 오래 유지된 국가가 조선왕조 500년이니 그 이상 간다고 해도 이 나라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깃발을 들고 외치고 기도하고 몸을 던져야 할까? 국가보다 더 상급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런 것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존재한다.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진리는 영원하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사 40:8). 진리는 그 자체가 법이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원리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진리라고 하셨다(요 14:6). 우리는 진리를 위해 깃발을 들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고 그 말씀을 대적하는 세력과 사상에 맞선 영적 싸움의 깃발을 올려야 한다. 국가를 지키는 데 앞서 진실을 지켜야 한다. 성경은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규정하고 있다(요 8:44). 따라서 거짓과 싸워야 한다. 윤리를 팽개치고 정의와 공정을 땅에 묻어버리려는 세력과도 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부의 인권을 유린하고 학대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과 논리와도 싸워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동성애이다.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수많은 논리와 기준들이 몰려 있다. 동성애를 조장하고 이를 합법화하고 이를 비판하는 것을 처벌하는 국가는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이고 빨리 파멸되어야 할 국가인 것이다. 우리는 국가를 지킬 것이 아니라 진리와 진실과 윤리와 인권과 공정과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이를 굳건히 지켜내야 한다. 명멸하는 국가를 앞세운 국가주의가 아닌 진리의 말씀, 진실을 지킨다면, 그것이 지켜지는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꿈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주의자가 아니다. 굳이 표현하면 천국주의자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다(빌 3:20).
<yeonjong65@gmail.com>
글 | 주연종
총신대와 동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20년간 군목으로 활동하였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Th.M)과 미, 풀러신학교(D.Min 과정) 등에서 수학을 했고, 총신대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서는 <영국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진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