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익의 〈동성애는 죄인가〉에 대한 비판적 서평
2020-02-14
월드뷰 02 FEBR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허호익은 최근 <동성애는 죄인가: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성찰> (서울: 동연, 2019)을 출간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편에서는 성경이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고 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동성애에 대한 최근의 동향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애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은 성경해석 상의 오류, 동성애의 선천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연구결과에 대한 최근 재해석의 간과, 서구세계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된 과정에 대한 편향된 관점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제1부에서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한 본인 자신의 이해를 소개한 다음, 제2부에서 기독교와 서구 국가의 동성애 범죄화의 역사와 근대 이후에 전개된 동성애 합법화의 역사를 소개한다. 제3부와 제4부에서는 동성애와 질병과의 관계문제를 다루고, 제5부에서는 교회와 교단들이 동성애와 동성혼을 받아들인 과정을 소개한 다음, 마지막 제6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한국 사회와 교계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성경이 동성애가 죄임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는 한다. “성서 시대의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동성애 금지 관련 일부 구절에 비판적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성서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성서가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69쪽)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
저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어낸 “민담”(22쪽)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 기록이 민담이라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안에 있는 기적적인 요소를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신학자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증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저자는 아브라함이 낯선 사람 셋을 환대한 이야기와 소돔이 낯선 사람 둘을 박대한 이야기를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상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 100% 같은 패턴에 따라 진행되는 법은 없다.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독특한 부분도 있다.
저자는 ‘상관하다’라는 동사가 구약성경에서 ‘안다’라는 뜻으로 대부분 사용되었기 때문에 소돔 사건에서도 같은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하고 있는데, 오히려 창세기에서는 대부분 성관계를 뜻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무리의 요구에 대하여 롯이 딸을 내줄 때 무리가 자기 딸을 단순히 “안다”라고 생각하면서 내주었을까? 롯은 이성 간의 불법적인 성관계보다 동성 간의 불법적인 성관계가 훨씬 악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딸이 강간을 당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남성 간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것은 롯이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간청했던 이유다. 그것은 사사기 19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에 대한 강간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런 망령된 일” 곧, 동성애만은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것이다. 두 천사는 무리가 동성애를 행하려 하고 있음을 확인한 즉시 소돔 성 파괴 작업에 착수했다.
저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은 행위에 있음을 논증하기 위하여 에스겔 16장을 인용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과정에서 고의적이고도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소돔의 죄는 16장 49절과 50절에 명시되어 있는데 저자는 49절만 딱 떼어내어 인용한 것이다. 49절과 50절은 한 문장이며, 49절과 50절은 병렬접속사 “웨”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소돔이 멸망한 죄는 49절이 말하는 가난한 자를 돕지 않은 죄와 50절이 말하는 “가증한 일”을 행한 죄 두 가지였다는 뜻이다. 가증한 일은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 일탈 말고는 달리 해석될 수 없는 표현이다. 더욱이 유다서 7절이 말하는 “다른 육체”와 베드로후서 2장 7절이 말하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은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해석이다.
저자는 주로 보수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성애 반대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효율적인 무기로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를 빈번하게 인용한다(72-73, 197-98쪽). 아마도 적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은 동성애의 선천성에 관한 것인데, 스토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동성애가 선천적인 성적 지향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알려진 논문들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잡지에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고, 많은 교단과 교회가 이 논문들을 검증하지도 않은 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던 때였다. 스토트도 이 논문들을 분별해낼 만한 안목이 없었다. 나중에 이 논문들은 모두 표본조사의 편향성, 조사결과의 왜곡, 수치 조작 등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최근에는 과학계에서 더,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적 지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 2019년 미국 하버드대와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공동으로 47만 7,522명의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행한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 발표는 동성애 유발 유전자는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동성애의 선천성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따라서 동성애는 왼손잡이나 장애인과 같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저자의 논지(79, 240-41쪽)는 무너졌다. 왼손잡이나 장애는 선천적일 수 있지만, 동성애는 선천적이 아니다. 저자는 과학의 연구결과라는 이름으로 증명되지 않은 채 회자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왜곡되고 통속적인 이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UCC, 영미의 성공회, PCUSA, 대다수의 유럽과 미국의 루터교 교단들, 미국 감리교 등이 왜곡된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성급하게 받아들여 동성애를 정당화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며, 목사 직분과 교회 직분을 동성애자들에게 허용하는 결정을 한 것은 교회사상 돌이킬 수 없는 경솔한 실수였다.
저자는 근대에 들어와서 사회가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하고, 서구의 일부 개신교 교회들과 교단들이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하여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을 동성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나 인권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전제하고, 동성애에 대한 발전된 새로운 이해가 열리기나 한 것처럼 길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의 역사가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 점점 더 깊은 세속화의 길로 빠져들어 왔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서구 역사는 보편적인 도덕 규범으로부터 이탈하여 도덕 규범을 해체하고 상대주의적인 타락과 혼돈의 길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역사해석을 철저히 간과하였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애로 정당화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과정은 인류 문명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퇴보해 오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보라. 지금 유럽과 북미의 기독교계의 상황을! 유럽대륙과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캐나다의 교회가 거의 다 죽어 버리지 않았는가? 미국의 복음주의 계열과 오순절 계열의 교회들을 제외한 자유주의 교단 교회들의 세력이 현저히 약화 되지 않았는가! 이 두 대륙의 도덕적 규범의 붕괴와 해체는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어 있지 않은가!
저자는 자아 이질성 동성애와 자아 동질성 동성애를 구분한 후에, 자아 동질성 동성애 곧 성인들이 합의하여 행하는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8, 58, 61, 226쪽). 그러나 동성을 향한 성애는 창조 섭리가 아니라 후천적인 것으로서 선택의 문제다. 프리들랜더가 말하듯이 동성애가 “사회적 성”이라면(79쪽), 더욱더 동성애는 선택의 문제가 된다. 사회는 사람이 자기 의지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있으며, 이 능력으로 얼마든지 동성애를 중단할 수 있다. 성인이 상호 동의하에 동성애를 하기로 선택했다면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며, 동성애가 죄이자 창조 섭리를 거스르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했다면 그 행동은 명백히 죄다.
저자는 동성애에 빠진 한국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이성애를 추구하는 청소년들보다 4배 이상 높다는 조사결과를 제시한 다음, 그 원인을 뚜렷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탈동성애를 권고하는 이성애자들의 책임으로 돌린다(95, 201-206, 304쪽). 다시 말해서 전환치료가 동성애를 하는 청소년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228쪽). 저자는 동성애를 하는 과정 그 자체가 보건의료적인 심각한 폐해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저자의 논지는 동성애를 정상적인 관습으로 인정해 주고, 일체의 탈동성애 노력과 치료를 하지 말라는 말인데, 이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가 탈동성애를 원하고 있으며, 상담과 치료를 통하여 동성애라는 어두운 굴레에서 벗어나 밝은 삶을 회복하고 있다. 저자는 동성애자를 동성애라는 어두운 굴레로부터 나오지 못하도록 영구적으로 가두어 놓고자 한다.
저자는 동성애보다 훨씬 더 심각한 다른 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동성애만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90쪽), 동성애의 죄성을 너무 강조하면 다른 죄들에 관한 관심이 저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죄가 심각한 죄라고 해서 동성애가 죄임을 말하지 말라는 것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것이 듣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죄들을 끌어들여서 아전인수로 이용하는 잘못된 태도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많은 행위도 죄라고 같이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밖에도 차별금지법의 의도나 성경이 말하는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에 대한 잘못된 이해 등과 같은 오류들이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동성애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이 순종해야 하는 성경의 보편적인 도덕법에 따라 명확하게 죄로 규정되고 있는 성애인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 곧 생물학적 질서와 보건의료적 질서 등에도 저항하는 심각한 죄라는 것으로 파악하고, 동성애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유일하고 바른 기독교적 접근법이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