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종(Liberty Bell)과 미국 건국의 완성

자유의 종(Liberty Bell)과 미국 건국의 완성

2020-02-15 0 By worldview

월드뷰 02 FEBRUAR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2


글/ 조평세(트루스포럼 연구위원)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역사공원에 가면 공원 한복판에 언제나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의 줄을 볼 수 있다. 옆에 위치한 독립기념관(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서명된 건물)보다 훨씬 더 긴 줄이다. 바로 공원 중간에 전시된 자유의 종(Liberty Bell)을 가까이서 보기 위한 행렬이다. 매년 75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는 데 비해, 이 18세기 유물은 매년 2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이 종의 전면에는 뚜렷한 균열이 보이고 종의 머리둘레에는 “Proclaim LIBERTY Throughout all the Land unto all Inhabitants Thereof. Lev. XXV. v X”(이 땅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레 25:10)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자유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 자유의 종에는 놀라운 역사와 우리에게 주는 큰 함의가 숨겨져 있다.

독립기념관을 배경으로 전시된 리버티벨의 현재 모습.


자유의 종(Liberty Bell) 이야기


우선 자유의 종을 둘러싼 전설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자유의 종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최종 승인됨과 동시에 크게 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던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 건물 홀의 문밖에서 귀를 쫑긋 세워 엿듣고 있던 한 아이가, 독립선언문이 승인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종탑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종이 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후 역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 관계는 이 이야기와는 다르다. 시민들에게 처음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종을 울렸던 것은 나흘 뒤인 7월 8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울렸던 종은 자유의 종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자유의 종은 당시 사실상 버려진, 제대로 울리지도 않았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 종은 1751년 펜실베이니아 주 의장이었던 아이작 노리스(Isaac Norris)가 주 건물에서 사용하기 위해 런던에서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 도착 후 하역하는 과정에서 깨져버린다. 주조공(鑄造工) 찰스 스토우(Charles Stow)와 존 패스(John Pass)가 두 번이나 종을 다시 녹여서 제작해보지만, 수개월의 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은 실패작이었다. 종은 낭랑하게 울리기는커녕 그냥 무거운 쇠가 부딪히는 둔탁하고 거북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결국, 노리스는 런던에서 새로운 종을 주문해야만 했고 펜실베이니아 주 건물에는 두 개의 종이 생기게 되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첫 번째 종은 뾰족한 종탑에 그대로 두고, 두 번째 종은 4층 돔에 비치해 매시간을 알리게 했다. 1776년 당시 종탑은 계단이 썩어서 올라가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을 알렸던 종은 지금의 자유의 종이 아닌 두 번째 주문한 종인 것이다. (이 ‘정상적인’ 종은 이후 어느 성당에 기증되어 사용되다가 부서졌고, 종의 일부를 다시 녹여서 만든 작은 종이 현재 빌라노바 대학에 걸려있다.)

자유의 종은 급기야 1843년 2월 22일 조지 워싱턴 생일에 더 이상 못 쓸 정도로 심각한 균열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상한 소리만 내다가 결국 깨져서 못 쓰게 된 이 종은 어떻게 미국의 독립 정신과 자유의 상징인 ‘자유의 종’(Liberty Bell)으로 부활하게 된 것일까? 우선 당시 배경을 살펴보자.


미국 독립선언과 노예제의 모순


1776년 선포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자명한 명제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의 해방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863년에야, 그것도 처절한 전쟁을 치르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제퍼슨이 적은 “모든 사람”은 흑인 노예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물론 18세기 중반까지 미국인들에게 노예제는 경제·사회 구조 – 특히 현금 작물 재배가 주된 경제 활동이었던 남부 지역 –에 깊이 뿌리내린 ‘필요악’으로 인식되어왔다. 또한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제퍼슨이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포함한 선언문 서명자의 절반이 노예를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 1760년대부터 이미 노예제에 대한 반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고찰이 있었고, 미국의 국부들은 분명히 그들의 독립정신이 노예제의 현실과 모순됨을 뼈아프게 인지하고 있었다.

한 예로 대륙회의에 참여하며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벤자민 러쉬(Benjamin Rush)는 1773년 글에서 미국의 자유는 인류 전체의 자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노예제와 같은 악행에 반대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들은 미국의 독립운동과 노예해방을 같은 ‘자유’로 이해하고, 노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미국의 건국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벤자민 러쉬(Benjamin Rush).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 자신도 당시 150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버지니아 농장주였지만, 노예제의 사악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 2년 전인 1774년 쓴 글에서 이미 제퍼슨은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했고 그 목적은 인권에 반하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퍼슨은 그렇게 스스로부터 끊지 못하는 노예제에 대해 평생 죄책감과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추후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과 그 공의가 영원히 잠들어있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이 나라에 내려질 심판에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그가 고백했을 때, 사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끊어내지 못한 악행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클렘슨(Clemson) 대학의 정치철학 교수 브래들리 톰슨(Bradley Thompson)은 미국의 독립이 사실상 ‘노예제를 끝내기 위한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776년 독립선언 이후 노예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던 북부 주들은 연이어 노예제도를 불법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버몬트는 1777년에, 뉴햄프셔는 1779년에, 펜실베이니아는 1780년에, 로드아일랜드는 1784년에 노예제를 전면 금지시켰고, 코네티컷은 1784년부터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북부 주에서 가장 노예 인구가 많던 뉴욕과 뉴저지에서도 노예 해방론자들의 오랜 투쟁 끝에 결국 노예제가 폐지됐다(각각 1799, 1804년).

심지어 노예 인구가 전체 인구의 거의 40%나 차지했던 남부 주 버지니아에서도 1782년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연방 차원에서도 1787년, 추가 편입되는 영토에서는 노예제를 금할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듬해 통과된 연방헌법에는 1808년부터 노예무역도 폐지할 수 있는 조항을 담기도 했다.


1776년의 독립정신을 되살린 자유의 종(Liberty Bell)


그러나 노예제는 그렇게 점진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예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남부의 농업은 점점 더 노예제에 대한 의존성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790년 인구 조사는 많은 노예 폐지론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1776년 독립선언 당시 약 50만 명으로 추정됐던 노예 인구가 20여 년 만에 70만 명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업혁명과 맞물려 18세기 말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면(cotton)에 대한 수요는 19세기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미국 전체 수출의 거의 60%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제 미국의 경제·사회적 현실은 그 독립정신과 완전히 괴리되어 버린 것이다.

급기야 1854년에는 새로 편입하게 된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서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Kansas-Nebraska Act)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은 투표를 통한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이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인간의 천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결정일 뿐 아니라, 미주리 주를 제외한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미주리 타협안’(Missouri Compromise)을 사실상 폐기시키는 것이었다. 점점 풍요와 안정을 누리게 된 미국인들은 그렇게 독립정신을 망각하고 양심이 무뎌져 갔다.

1830년대 노예폐지운동가들의 팸플릿 표지 리버티벨.

이즈음 미국인에게 경종을 울리며 나타난 상징이 바로 자유의 종이다. 1830년대가 되자 미국인들은 이 종에 새겨진 레위기 말씀을 기억했다. “이 땅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이 말씀은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희년으로 지키며 잡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들은 1780년대 건국 이후 50년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하며 이제는 노예들에게 해방을 주어야 함을 설파했다.

1835년에 노예 폐지 단체가 처음으로 “The Liberty Bell”이라는 글을 통해 노예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고, 연방헌법 제정 50주년인 1837년에는 <Liberty>라는 노예 폐지 잡지 표지에 이 종의 그림과 함께 “Proclaim Liberty”(자유를 공포하라)라는 제목이 달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 종은 ‘자유의 종’으로 회자되며 미국인들의 잠들었던 독립정신과 양심을 깨우게 된다. 자유의 종이 오늘날 자유의 상징이 된 것은 어떤 전설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한 노예 폐지 운동가들 덕분이었던 것이다.

자유의 종 전설을 그린 삽화.

그렇게 자유의 종을 통해 일깨워진 미국인들의 양심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해에 노예제 폐지를 전면 기치로 내세운 공화당이 창당했고, 또 일리노이 주 하원을 끝으로 정치 무대를 떠났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격노해 다시 정치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7년 만에 공화당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은 1861년 2월 22일, 워싱턴에 입성하는 길에 필라델피아에 들러 자유의 종을 마주하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만약 [독립의] 그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저는 이 자리에서 암살당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건 다짐으로 백악관에 들어간 링컨은 바로 그해 4월부터 만 4년간, 무려 7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을 통해 전국의 노예를 해방시킨다. (남북전쟁 사망자 수는 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미국인 사망자 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리고 남부 주의 항복을 받아낸 지 6일 만에 암살당한다. 그렇게 미국은 그 독립정신과 자유를 위한 위대한 희생을 통해 노예를 해방시키고 건국을 완성했다.


한국의 자유의 종(Liberty Bell)과 대한민국 건국의 완성


남북전쟁 이후 자유의 종은 계속해서 미국인들에게 그 1776년의 독립정신을 상기시키는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1885년에서 1915년까지는 8개의 세계박람회를 거치며 약 400개의 도시에서 전시되었고, 더 이상 운반이 불가능할 정도로 균열이 심해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 전시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벤 구리온, 넬슨 만델라 등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 관료들이 자유의 종을 다녀갔다. 필라델피아에서 1919년 4월 1차 한인회의를 개최한 서재필과 이승만도 시가행진 후 독립기념관 내부에서 사진 촬영을 했던 것으로 볼 때 자유의 종과 그 새겨진 말씀을 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50년 트루먼 행정부는 자유의 종과 똑같은 복제품을 55개 제작해 당시 미국 48개 주와 기타 영토 및 수도 워싱턴에 비치하기도 한다. (수도 워싱턴에 비치되었던 자유의 종은 관리 소홀로 현재 행방불명 상태에 있지만, 2017년 개관한 Museum of the Bible에서 자유의 종과 똑같은 모형을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자유의 종은 히로시마와 베를린에도 있으며, 독립선언 200주년인 1976년에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을 마주한 곳에 자유의 종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한국에는 자유의 종이 없을까? 한국에는 모형이 아니라 아예 미국의 살아있는 ‘자유의 종’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에 창설된 미군 기지 캠프 리버티벨이다. 1986년부터 캠프 키티호크(Kitty Hawk)와 통합되어 캠프 보니파스(Bonifas)로 변경되었고 2004년에는 지휘권이 한국군에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판문점 기지는 미군들 사이에서 ‘캠프 리버티벨’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 기지에서는 1967년 8월 북측에서 기관총을 무차별로 난사해 미군 2명이 사망하기도 하고, 1976년에는 북한군이 미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와 배렛(Barrett) 중위를 도끼로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여전히 미국은 한국 ‘리버티벨’에서 그 독립정신과 자유를 위한 숭고한 헌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종의 역사가 현재 한국에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미국이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를 기반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도 청년 이승만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독립정신을 뿌리내렸다. 또 미국이 노예 해방을 꿈꾸며 나라를 건국했던 것처럼,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도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자유 통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이 자유의 종에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는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유지로 받았다.

하지만 풍요와 안위 속에서 우리는 북한 동포 해방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이제는 우리가 누렸던 자유마저 박탈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도 이제, 자유의 종의 성경 구절을 통해 독립정신을 회복한 미국이 남북전쟁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 건국을 완성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다시 굳게 잡아 노예 상태에 빠진 동포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완성할 때다.

<pyungse.cho@gmail.com>


참고자료

Joseph J. Ellis (2000), Founding Brothers: The Revolutionary Generation, Random House.
Bruce Feiler (2009), America’s Prophet: Moses and the American Story, Harper Collins.C. Bradley Thompson (2019), America’s Revolutionary Mind: A Moral History of the American Revolution and the Declaration That Defined It, Encounter Books.


글 | 조평세

영국 킹스컬리지런던(KCL)에서 종교학과 전쟁학을 공부하고 고려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트루스포럼 연구위원으로 미국에 거주하며 보수주의 블로그 <사미즈닷코리아>(samizdatkorea.org)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