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선물
2020-01-27
월드뷰 01 JAN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1 |
글/ 조혜경(소설가)
뉴욕을 떠나 필라델피아 리누드가든으로 이사한 때는 겨울이었다. 꽁꽁 얼었다가 녹은 땅에 이삿짐 차 바퀴가 빠져 밤늦도록 이사가 지연되었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열린 옆집 현관문 사이로 밖을 살피는 눈동자가 보였다. 우리 가족은 더 조용히 조심조심 이사를 마쳤다.
봄이 되도록 나란히 현관문이 나 있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어느 날 계단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앉아 바람을 쐬고 계셨다. 90 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한 뚱뚱한 몸, 남루한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두 다리는 종아리와 발목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찐빵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는 세 살 딸아이를 앞세워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침은 드셨어요?”
“그럼!”
“뭘 드셨어요?”
“샌드위치”
“그럼, 점심엔 뭘 드세요?”
“샌드위치”
“저녁엔요?”
“샌드위치”
“날마다요?”
“날마다!”
“수프와 함께요?”
“아니.”
나는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마리아 할머니. 90년 동안 한 번도 필라델피아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국 전쟁에서, 딸은 유방암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아침에도 샌드위치, 점심에도 샌드위치, 저녁에도 샌드위치를 드시는, 하지정맥류가 심해 두 다리에 쪽빛 혈관이 아이 손가락 두께로 도드라지는,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도 잘 걸을 수 없는 할머니. 60살이 넘은 사위가 이 주일에 한 번씩 들러 장보기와 청소를 도와준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옆집 문을 두드렸다.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물으면 할머니는 아주 낡고 작은 동전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어놓은 2불이나 3불을 꺼내주시며 바나나 3개, 터키 햄 4쪽, 하는 식으로 아주 소량의 장보기를 부탁하셨다. 할머니의 주문을 맞추기에 주시는 돈은 대개 조금 부족했지만, 우리는 우리 장바구니에서 나눠 오렌지 2개나, 토마토 3개를 함께 드리고 돈이 남아 더 샀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먼저 우리 현관문을 두드리셨다.
“우리 집 유리창을 좀 닦아 줄 수 있니?”
“댓스 마이 플레져!(기쁨으로 해드릴게요!)”
나는 할머니가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무언가를 청하시는 게 무척 기뻤다. 처음 들어가 본 할머니의 집은 노인이 홀로 오래 거주한 데에서 날 법한 모든 복합적인 냄새들로 꽉 차 있었다. 남편과 내가 유리창을 닦고, 냄새가 밴 침대 매트리스를 꺼내 햇볕에 말리고 진공청소기로 집안을 한 번 밀어드리고, 물걸레질까지 마치고 나자 할머니는 환히 웃으며 ‘20년 만의 대청소’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낡고 작은 지갑에서 2불을 꺼내 딸아이 손에 쥐여주셨다. 그날 저녁 나는 할머니께 야채수프와 잡채를 만들어 갖다 드렸다. 그릇을 찾으러 가자 너무 오랜만에 먹어본 ‘홈메이드 수프’라며, ‘오리엔탈 스타일 누들’(잡채)도 스페셜한 맛이었다고, 엄지를 척 올리며 그릇 위에 바나나 한 개를 선물로 얹어주셨다.
힘겹게 계단까지 나오셔서 하염없이 앉아계시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90년 동안 필라델피아를 한 번도 떠나본 일이 없다는 할머니를 모시고 뉴욕의 맨해튼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여드리며 ‘여긴 뉴욕이에요! 드디어 필라를 벗어났지요?’라고 말하며 함께 웃고 싶었지만, 당시 우리에겐 자동차가 없었고, 남편은 자전거로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1년 반을 살고 리누드가든을 떠나던 날, 이삿짐을 싣는 내내 할머니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의자에 앉아계셨다. 차에 타기 전 인사를 하고 껴안자 드리자 ‘너무 작은 것’이라며 두 개의 선물을 주셨다. 아이보리색 슬립과 코티 분. 딸이 살아있을 때 선물로 주었던 것을 아껴두고 쓰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20년을 넘게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의 보물이었다. 할머니도 나도 두 손을 서로 잡고 웃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너희 가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할게!”
네덜란드 학교에서 우리 가족에게 제공한 기숙사는 일반 주택 사이에 있는 한 채의 주택이었다. 집과 집 사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양쪽 벽은 다른 집과 공유하는 로우하우스였다. 언어도 낯선(비행기가 ‘플리흐따흐’라니!) 그곳에 도착한 첫날 저녁 무렵 누군가 벨을 눌렀다. 문을 열자 키가 큰 노부부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웃으며 서 계셨다. 바로 옆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룹과 예니라고, 이웃이 된 것을 환영한다고, 무엇이든 도울 일이 있으면 아무 때나 자신의 집 벨을 누르라고 말씀하셨다.
네덜란드에서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잠자리에 들려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큰 상자 하나가 문밖에 놓여 있고 아무도 없었다. 예쁜 포장지에 싸인 상자를 풀어보니 상자 안에는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적힌 선물이 들어있었다. 예니 할머니 글씨였다. 다음날 성탄 축하 인사를 드리며 선물 감사하다고 말하자, “끌라인 까도쳐, 헤?(작은 선물이지?)”하고 웃으셨다.
4년 반 동안 이웃으로 살면서 딸아이가 등굣길에 개에게 물렸을 때, 남편이 갑자기 위궤양으로 배를 움켜쥐고 아파할 때, 셋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아기용품을 준비할 때, 심지어는 자전거 타이어에 펑크가 났을 때까지도 나는 힘들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주저함 없이 옆집 벨을 눌렀다. 그때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혜경! 걱정하지 마! 우리가 너를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며 내 등을 두드려주셨다.
또 할머니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가 장을 보고 네덜란드식 걸쭉한 강낭콩 수프 끓이는 법도 배우고, 불고기, 잡채, 돼지고기 두루치기, 냉면 같은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 할머니는 내게 남은 고추장과 한국 밥통을 선물로 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가끔 쌀로 밥을 지어서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만들어 먹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암스테르담 한국상점에 나가 고추장, 된장, 간장을 사다가 밥솥과 함께 선물로 드리면서 말했다. “헤일 끌라인 카도쳐!(너무나 작은 선물예요!)”
필라델피아의 마리아 할머니는 우리가 그곳을 떠난 지 2년 뒤 돌아가셨다. 92년 동안 한 번도 필라델피아를 떠나 여행해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결국 천국으로 첫 여행을 떠나셨다.
네덜란드의 룹 할아버지는 심장이 안 좋아져 그 집을 팔고 아파트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돌아보니 그분들은 우리 가족이 가장 춥고 배고팠던 유학 시절 우리의 길에 동행이 되어주셨던 분들이었다. 무엇이든 ‘작은 선물’이라며 웃으셨지만, 그들과 함께함이 우리에겐 큰 선물이며 위로였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거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린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 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가수가 노래를 잘하는 것인지, 곡이 좋은 것인지, 가사가 심금을 울리는 것인지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무슨 주책인가. 이제는 성년이 된 딸이 볼까 봐 후다닥 눈물을 훔쳤다.
지난 십 년 어간 나는 언제까지나 나의 길에 동행자가 되어줄 줄 알았던 가족들을 잃었다. 그 존재만으로 내게 힘이 되어주셨던 아버지, 6·25 때 남편과 작별하고 유복자를 평생 홀로 키우심으로 단단한 가정을 이루어 삶이 곧 본이셨던 작은 어머니,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주기도문을 외우고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해주셨던 시어머니.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린 엄마. 멀리 계신 예니, 룹, 그리고 마리아.
지금도 그립기만 한 그분들을 영원히 볼 수 없다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다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아주 작은 선물,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 주님이 주신 크고 거대한 선물, 부활과 영생이 있기에,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울 수 있지만, 소망이 있다.
임마누엘!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