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발키리”

“작전명 발키리”

2019-11-26 0 By worldview

“작전명 발키리”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글/ 장지영(이대서울병원 임상조교수)


톰 크루즈 주연의 “작전명 발키리(원제: Valkyrie, 2009년 작)”는 15차례의 히틀러 암살 작전 중 마지막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원래 발키리 작전은 히틀러 사망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예비군을 소집해 주요 정부 기관을 장악하여 나치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한 안전망이었다.

나치군 대령 폰 슈타펜버그(톰 크루즈 역)는 이 작전을 역으로 이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종전 1년 전 ‘독일은 위대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총살당한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영화였지만,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그릇된 야욕을 품은 지도자가 한 국가를 패망으로 내몰 수 있음과 그러한 악함에 선동되는 국민, 그리고 유사한 역사적 패턴이 현재도 반복되는 걸 보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얼마 전 인사 청문회에서 “나는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할 수 있다.” 등 본질적으로 본인이 사회주의자임을 천명한 조국이 법무부 장관에 지명되는 것을 보며 나치의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짙은 어둠이 이 나라를 뒤덮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치의 독일과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이 오버랩 되는 건 지나친 기우일까?


1. 사회주의의 광기, 인간 존엄성의 말살


요즘 집권 여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아명처럼 붙이는 ‘극우’라는 표현은 사실 히틀러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가 표방한 ‘국가 사회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극우 세력은 국가를 유기체적 존재로 인식하여 국가를 숭배하고 인종주의 성향을 보이며 평등을 혐오한다. 즉, 전체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정치 사회적 자유의 제한뿐 아니라 수단적 폭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깃발 역시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깃발의 붉은 배경은 피, 즉 국가를 위한 국민의 희생을 상징하고, 가운데의 하켄크로이츠는 고대 게르만족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런 극우의 특성은 오히려 조국 전 장관이 한때 몸담았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조차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다수의 국민들을 ‘극우’로 매도하는 현실을 보자면 무식의 소치인지 뻔뻔함의 극치인지 구분이 어려운 실정이다.

전통적 의미의 사회주의란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옹호하거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기적 국가,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통제를 옹호하는 이념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사용자에 따라 좀 더 다양하게 정의되는 광의의 단어이다. 조국 전 장관이 말한 사회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90년대 초 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기관지 <우리사상>에 가명으로 기고한 2편의 글을 살펴보면 생각의 실체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다. <우리사상> 1호의 기고문은 레닌의 혁명 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을 정당화 및 선동하고 있다. 2호의 기고문은 남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사노맹의 행동 목표와 강령을 제시하는데, 사적 소유와 계급 철폐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무장봉기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과거의 조국이 주장한 사회주의 정책이란 선택적 복지가 아닌 전 국민에 대한 배급제를 주장하는 것에 가까우며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국 전 장관은 사노맹에 가담했던 일을 “부끄럽지도 자랑스러워서 하지도 않는다.”라며 궁극적으로 이념적 전향을 거부했고 여전히 과거의 사상에 귀속되어 있음을 전 국민 앞에 선언한 것이다. 이런 인물을 대한민국의 사법 질서를 수호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속내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역사를 통해 실패로 검증된 사회주의가 지금까지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이념,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이 극단의 사상은 국가를 이루는 두 핵심 집단인 위정자들의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노력과 수고 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국민의 탐욕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더해가며 존속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구조와 제도를 혁명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고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에 종속된 개인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도 존엄할 수도 없다. 한 개인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독단자로서의 지위가 침해받지 않을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부여되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이는 국가가 무상 복지를 제공한다고 주어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그러한 시도들이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전락시킨다는 것을 베네수엘라가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에 퍼져 있는 국가 권력의 선한 의도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는 조국 전 장관 스스로가 잘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입시 및 장학금 특혜, 본인의 교수 임용 문제, 위장 전입, 재산 증식 의혹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모자라는 조국 장관의 비리와 위선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선의를 가장하며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장악해 온 위정자들의 탐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은 존엄하지만 연약하고 탐욕적인 분명한 한계를 지닌 피조물이기에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사회 구조와 제도 역시 전적으로 선할 수 없고, 이를 통해 이 땅의 유토피아를 구현할 수도 없다. 또한 인간은 전적인 은혜로 죄의 대속과 구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한 타락한 이전의 모습으로 너무나도 쉽게 회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사회주의의 교묘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는 유일한 길은 모든 국민이 자신이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하고 독립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1933년 총선에서 나치가 1당이 되었을 당시만 해도 40% 초반의 의석만을 차지했으니 과거 독일 국민에게도 나치에게 저항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일 국민들은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설정하고 아리안 민족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나치의 악의적 선동에 저항하지 못하고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은 어떠한가? 광우병 사태와 촛불 시위를 되돌아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과거 독일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어둠이 짙게 드리울수록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신변의 위협과 희생을 각오하며 목소리를 내는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보면 우리의 대한민국은 나치의 독일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난다.


2. 크리스천의 시대적 소명


“나는 나의 조국에 충성을 다해 왔지만, 지금 이것은 나의 조국이 아니다.” – 폰 슈타펜버그 대령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나치와는 다른 독일인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우린 그와 다르다는 걸 전 세계에 보여줘야 해).” – 크레스토프 대령

“아브라함에게 10명의 의인만 있었어도 소돔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독일은 의인 1명이면 충분하네.” – 루드비히 벡 대장


슈타펜버그 대령은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지만 자신의 기독교적 신앙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를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슈타펜버그를 보며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히틀러에 반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이자 히틀러 암살 운동에 가담한 죄로 순교하신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교회는 ‘나치 민족주의를 통해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오게 하겠다.’라는 잘못된 이상을 갖고 나치에 협력했고, 소위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운동’은 히틀러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재건과 온 세계의 번영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인물로, 나치스는 행동하는 기독교라고 선전했다. 나치 정권에 협력하지 않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한 일부 그룹도 있었으나 이들 역시 유대인 학살과 같은 나치의 만행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본회퍼는 이 운동의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도중에 중단되긴 했지만, 그는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베를린 방송 강의를 통해 히틀러에 대한 우상 숭배적 태도를 경고했고, ‘교회와 유대인’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쫓아낸 독일 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받던 중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을 받고 도미했으나 독일의 크리스천들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나의 상황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고 기도할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때에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히틀러 암살에 깊이 가담하는데, 히틀러가 총통인 독일의 패망을 앞당기는 것이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지만 신앙인으로서 살인을 도모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신학적 숙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의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매 순간 가장 적절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1942년, 그의 나치 전복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되고 1945년, 나이 39세에 교수형을 당한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요즘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참으로 험난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내신 본회퍼 목사님의 삶과 신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힘과 격려를 준다. 우리는 세상의 청지기로 부름받았기에 현실의 아픔과 정치 사회적 문제를 외면한 채 종교적 순수성만을 추구할 수 없다. 자기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 그리고 세상이 진리를 폄훼하고 위협할 때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역사적 책임이다. 이는 단지 정치적 스탠스의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영원한 의의 편에 서는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우리 모두가 시대적 소명을 온전히 감당해내고 이를 통해 이 땅에 회복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lidia0826@hanmail.net>


글 | 장지영

이화여대 의과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서울병원 임상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기독교 보수주의 청년 단체 트루스포럼의 이화여대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