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적 정치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을 다시 읽으며

2019-11-18 0 By worldview

칼빈주의적 정치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을 다시 읽으며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글/ 이명헌(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는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매우 중요한 현실정치가였다.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적 세력, 그리고 가톨릭 세력에 맞서는 켈빈주의 정당인 ‘반(反)혁명당’을 결성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 초 네덜란드의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입장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반(反)혁명당은 여러 번 연립정부에 참여하였고, 그가 직접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네덜란드 현대 사회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일종의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는 그와 그 정당의 기독교적 현실 정치참여는 어떤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졌을까? 그가 남긴 <칼빈주의 강연>이라는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그가 1898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행한 칼빈주의에 대한 6개의 강연을 묶은 것인데, 그 중 제3장의 주제가 “칼빈주의와 정치”이다. 여기에서 카이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여러 다양한 영역들과 국가권력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앞의 두 질문이 관련성이 높으므로 이 글에서는 거기에 집중하기로 한다.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카이퍼는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기독교적 세계관의 틀 속에서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는 우선 “죄악이 정부의 권위가 나타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즉, 죄로 인해 타락한 상황에서 “법과 정부가 통치하는 권위 없이 산다면 지금 지상에 지옥이 펼쳐질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타락한 세대를 홍수로 몰살하셨을 때 있었던 이 세상의 모습을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며, “정부는 일반은총의 도구로써, 방종과 가증함을 제어하고 악에 맞서서 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정부는 피조물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작품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종이다.”

두 번째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정부의 권위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도시들에서든 국가에서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개인은 순종해야만 하니, 형벌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서 그렇게 해야 한다.”

카이퍼는 이 같은 칼빈주의적 국가관을 당시에 지배적이던 두 가지 관점, 즉 ‘국민주권론’과 ‘국가주권론’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그 특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가 보기에 국민주권론은 프랑스 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고방식으로 그 사상에 따르면 “모든 권력, 모든 권위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이 모여 많은 인간이 되고, 국민이라 하는 많은 인간들 속에 모든 주권의 가장 깊은 근원이 들어있다.” 이 같은 사고의 바닥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에 맞서려는 자연 즉, 인간 자체 안에 있는 것 외에는 삶의 보다 깊은 기초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 고백이 깔려있다고 본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왕좌에서 몰려나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그 왕좌에 올려 진다.” 카이퍼는 이 같은 국민주권론이 결국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굴복하는 자기비하(卑下)를 정당화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와 달리 칼빈주의적 국가관 즉, 국가권위의 근거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상에 따르면, 국가권위에 대한 순종은 인간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고 밝힌다. “여러분의 호흡이 그 코(鼻)에 있는 사람의 아들 앞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치욕스럽게 낮추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신 분의 권위 앞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높여준다.”

국민주권론의 기초가 무신론이라면, 국가주권론의 기초는 범신론이다. “인간과 인간의 모든 연계 중에서 국가이념(國家理念)이 가장 높고, 풍부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하여 국가는 신비주의적 개념이 되었다.” 카이퍼는 이 이론으로 인해 국가가 신격화되고, 국민들은 실정법의 근거에 대해서 질문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고 비판한다. “국가신격화 앞에 굴복하는 것이 각 국가 구성원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였기에 억압받는 자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 안의 모든 초월적 법이 소멸되었다. 법문(法文)에 적혀있는 법 이외에 다른 법은 없다.” 반면, 칼빈주의적 국가관에 입각하면 국가의 권위에 더 기꺼이 양심으로 순복(順服)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법이 불의를 뒷받침할 때에는 “가장 높은 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항의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불어 넣어준다.”는 것이다.

 

삶의 각 영역들과 정부

 

카이퍼의 독특함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영역들의 주권에 관한 사상, 즉 ‘영역주권론’이다. 그에 따르면 가족, 회사, 학문, 예술 등은 “국가에 힘입어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규칙을 국가의 권위로부터 빌려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사회적 영역들로서 각각 그 내부에 “하나님의 은혜로 지배하는 높은 권위”가 있고 거기에 순종한다.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다양한 영역들은 유기적 성격을 갖는 반면, 국가 혹은 정부는 기계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양자 사이에 항상 긴장이 있다는 점이다. “한 국민 내에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유기적 삶의 표현들이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고 이들 위에 정부의 기계적인 단일성 강박이 나타난다. 이로부터 모든 마찰과 충돌이 일어난다.” “정부가 기계적 권위로 사회적 삶에 깊숙히 들어와서 그것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기계적으로 규율하려는 경향을 항상 가진다. 이것이 국가권력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사회적 삶은 끊임없이 정부권위를 그 어깨에서 떨어내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이 같은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학교 논쟁’이다. 네덜란드 정부가 자신의 이념에 입각해서 학교 교육의 표준을 정하고, 종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한 학교에 대해서는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서 기독교 교육을 하려고 했던 초중등 학교들이 고사(枯死)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및 카톨릭 교도들이 각각 정치세력으로 강하게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퍼는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한 가운데 있었고, 이러한 사회영역과 정부권력 간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학교뿐 아니라 사회영역 전반에 존재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유기적 사회영역과 정부 권력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카이퍼는 그 답이 ‘헌법 질서의 구축’에 있다고 보고 칼빈주의가 그러한 해법의 발견과 실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카이퍼는 하나님이 여러 삶의 영역들 각각에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해주신 권위들을 국가가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은 정부권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권위에게 길을 비켜준다. 학문적 삶, 예술적 삶, 농업, 산업, 상업, 지역단위의 삶, 그 어느 것도 정부권위에 자신을 맡기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정부는 삶의 여러 영역들을 그저 방치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카이퍼는 정부가 다음과 같은 임무를 지고 자율적 삶의 영역에 개입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1) 영역과 영역 사이의 충돌이 있을 때 반복해서 각자의 경계가 존중되도록 강제할 임무 (2) 개인 그리고 영역들 내의 약자들을 우월한 측의 학대로부터 보호할 임무 (3) 사회 구성원 모두가 국가의 자연적 통일성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적 그리고 금전적 부담을 지도록 강제할 임무

 

칼빈주의와 헌법적 질서

 

카이퍼는 이처럼 정부의 임무를 인정하지만, 어떻게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인가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며, 시민들이 자기 자신들의 고유 권리를 통해서 정부의 권력남용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보고 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결속체(結束體)1)에 대해서 가진 권리를 기반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저지해야만 한다. 여기에 정부의 주권과 사회적 영역 사이의 협력의 출발점이 있으며 그 협력은 헌법이 규율하고 있다.” 더불어 국가권력과 사회적 영역사이의 헌법적 규율은 칼빈 자신이 실제로 시행했던 바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구체적 모습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의회의 형성과 개인의 투표권의 출현이라는 형태로 바뀌기도 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오래된 칼빈주의적 사고 즉, 모든 계층과 신분의 국민에게, 모든 영역과 분야의 국민에게, 모든 단체와 자치 기관의 국민에게, 건강한 민주주의적 의미에서 법의 제정에 대한 영향력을 법적으로 규율된 형태로 부여하려는 사고가 남아있다.”고 본다. 그리고 칼빈주의가 특히 역사적으로는 “시민사회의 권리와 자유의 근거를 정부 권위의 동일한 원천(源泉)로부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로 언급한 것과 같은 국가주의적 흐름에 맞서는 “제방(堤防)을 구축했다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카이퍼는 삶의 여러 영역에 국가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규칙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런 규칙을 정함에 있어서 모든 계층과 단체에 속한 국민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헌법적 질서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에 권위를 주신 하나님께서 삶의 각 영역에 대해서도 고유의 권위를 주셨기에 그러한 권리의 주장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카이퍼의 용어를 써본다면, 우리나라는 프랑스 혁명전통에 따른 국민주권론이 교과서적 담론이 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문제에 국가를 끌어들이려는 범신론적 국가주의 행태도 강하다. 각자가 속한 영역에 부여해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소중히 받들고, 그 주권과 정부권력을 헌법적 틀 속에서 조화시키라는 카이퍼의 권고는 오늘날 여기서도 귀 기울여 들을 만 하다.

<moseslee65@gmail.com>

 

1) 네덜란드어판에서는 bundel이라는 단어인데, 영문판에는 buidel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지갑(purse)’으로 번역되어 있다.

 

글 | 이명헌

서울대 경제학과와 독일 괴팅엔대 농업경제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인천대학교 경제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독교경제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남서울 은혜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농업경제학이 전공이지만, 노사관계, 국제경제, 조세재정 등 여러 경제문제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기독교적인 비전을 제시한 카이퍼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