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에서의 기독교인과 정치참여

2019-11-16 0 By worldview

한국 근대사에서의 기독교인과 정치참여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 기독교인은 한국 정치변화의 주역

 

한국 근대사에서의 정치변화는 주로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한국의 근대적인 독립운동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와 같은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독립협회로부터 시작되었고,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상해 임시정부의 주역은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김구와 같은 기독교인들이었다.

한국 근대사를 움직였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은 독립, 자유, 민주, 평등 등이었는데, 이런 모든 것은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 대륙의 문명을 한반도에 전해 준 것이 유교와 불교였다면, 근현대사에서 서구 문명을 한반도에 전해준 것은 다름이 아닌 기독교였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한국 근대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것은 자연스럽다. 이 글에서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정교분리와 미국 기독교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를 말할 때, 먼저 기억할 것은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온 대부분 선교사는 미국에서 왔고, 미국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정교분리를 헌법에 명시한 나라이다.

미국이 18세기 후반에 영국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할 때,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다 같이 참여하여 미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 교파는 다 같이 자신들의 교파를 국교로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어느 교파를 국교로 만든다는 것은 다른 교파를 배제하게 되어 미국 사회를 분열시킬 위험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헌법은 어떤 교파도 국교가 되어 국가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의 정교분리를 명문화하였다. 그러므로 미국에서의 정교분리는 정치제도와 종교의 분리이지, 하나님과 종교의 분리는 아니다. 미국 대통령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며, 미국의 화폐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미국은 정교분리를 최초로 확립한 나라이지만 기독교인들과 각종 종교단체는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초기 선교의 역사에서 본 정교분리

 

서구세력이 개항을 요구하며 선교를 하려고 할 때, 조선 정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부들이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였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주일 청나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은 그의 조선책략에서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들은 내정에 간섭하지만,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갖고 있으므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종은 개신교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안심하고 미국과 조약을 맺었으며, 미국 선교사의 한국선교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서 이런 선교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

 

고종은 선교사들의 한국 정치 개입은 반대하면서도 선교사들이 자신의 정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했다. 고종은 일본인에 의한 민비시해사건 이후에,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미국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두려워 떨고 있던 고종을 보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심지어 언더우드에게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넌지시 물어보기도 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미국과 손잡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고종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 정부도 선교사들에게 절대로 한국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진흙탕에 미국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일제 강점기 정교분리 원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미국 정부와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강조했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정치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통치자로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정치 영역이다. 통치자는 어떤 분야가 정치에서 제외되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정치가는 항상 종교까지 자신의 정치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한다.

선교사들은 여기에 반대해서 종교의 영역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행하는 전도뿐만이 아니라 교육, 의료, 복지도 선교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존재하지만 그런데도 정치와 종교의 갈등은 계속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런 경우를 둘만 들기로 한다. 첫째는 인권의 영역이다. 일제는 3·1운동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고문과 비행을 저질렀다. 선교사들은 이런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피해를 본 신자들을 보살피는 것은 목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3·1운동 당시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이런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일제는 이것을 국내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선교사들은 이런 행동은 정교분리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둘째, 신사참배의 문제이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신도를 국교로 만들어서 일본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은 신사참배를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보았다. 하지만 선교사는 이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보았고, 신사참배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신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본다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기준

 

비록 선교사들은 한국 신자들에게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주장하였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한국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은 먼저 한국을 중화주의적인 사대주의에서 해방했고, 주 언어를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만들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서양의 정치제도를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제도에 의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천부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항상 수동적으로 살던 일반 한국인들은 이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기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한국의 근대사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시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이런 입장에서 1901년 9월 제1회 장로교 공의회에서 교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며, 따라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신자 개개인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밝힐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이 결정의 첫 부분만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 개개인이 가지는 정치 활동의 권리에 대해서, 선교사도 한국교회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한국교회는 교단 자체가 정치에 관여하여, 특정 정치집단과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신자(성직자를 포함하여) 자신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또는 여러 단체를 만들어서 다양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패턴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정치참여 패턴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단 밖에서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고, 그 기구를 통하여 정치 활동을 하였다. 독립협회도, 신민회도 다 이런 경우였다. 또 교단 밖으로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까지도 그들의 목적에 동의하면,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독립협회나 신민회에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하여 함께 정치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 클라이맥스는 3·1 독립운동이었다. 먼저 미국에 기반한 대한인국민회나 일본의 유학생 모임, 그리고 상해의 신한청년당이 다 같이 기독교인들이 주도했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단체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또한, 3·1 운동이 국내에서 진행될 때에도 교단본부가 공식적으로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목사와 장로, 전도사, 집사 등 신자들이 개개인의 자격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대표들은 자신들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자신들 개인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라는 태도를 밝히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만들 때,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가장 많았지만, 이것은 어디 까지나 개인의 입장이었지 교단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는 위대한 평신도 정치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했다. 만일 교단 단위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교단을 대표하는 성직자가 정치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정치참여는 교단과는 별도로 개인적인 자격이었기 때문에 평신도가 지도적인 인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안창호, 김구, 조만식과 같은 한국 근대사에서의 위대한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평신도였다. 정교분리가 오히려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개신교의 특징을 천도교와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천도교는 소위 교정일치, 즉 정교일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도교는 교단 자체가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손병희가 그 대표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일제와 직접 마찰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의 탄압을 받거나, 혹은 일본과 타협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천주교나 대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종교에서 성직자는 종교지도자이자 정치지도자였고, 평신도들은 이들의 지도를 따라야 했다. 결국, 이들 종교에서는 개신교만큼 위대한 평신도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맺음말

 

한국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정교분리를 강조하여 기독교가 특정 정치세력과 결합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신자 개개인의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여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교단 자체가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기득권 세력이 되거나 동시에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을 방지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정치참여를 권장하여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