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정치

2019-11-03 0 By worldview

한국교회와 정치

–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 –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이상규(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

 

지난 6월 5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는 대표회장 명의로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그들이 추구하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신념의 경지로 만들어 청와대를 점령했다.”라며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루어놓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은 금년 연말까지 하야하라.”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야해야 할 이유로, 한미동맹 파괴,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 파괴, 안보해체, 원전폐기, 4대강 보 해체, 국제외교에서의 완전 고립, 그리고 주사파 고려연방제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향 등 7가지를 제시하면서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라는 본훼퍼의 말을 인용했다. 이 시국선언은 이른바 문재인 진보좌파 정권에 대한 반체제 운동의 시작이었고, 조국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이후 문정권에 대한 거센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전광훈 목사의 시국선언은 정교분리, 교회와 정치, 혹은 목회자는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의 계기가 되었다.

2019년 10월 3일 광화문.

 

1. 전광훈 목사의 시국 선언, 그 이후 

 

그런데 전광훈 목사의 시국 선언이 발표되자 과거 반체제운동에 앞장섰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는 6월 10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망언”이라며 다음과 같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권력정치의 집단적 광기에 몰입된 거짓 선지자의 선전선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 공동증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반 기독교적 행위입니다. … 전광훈 목사의 반복음적 반신학적 반지성적 주장은 참담함을 금할 수 없는 스캔들입니다(기독교사상, 2019. 7월호, 42쪽).” 전광훈 목사가 제기한 7가지 문제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정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냉전적 패권정치”라고 비판했다. 6월 18일에는, 김명혁, 김재열, 민영진, 박경조, 박종화, 손봉호, 신경하, 윤경로, 전병금 등 9인이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 모여 기자회견을 열고, “크게 염려하고, 크게 통회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전광훈 목사를 비판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낡은 극단적 적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기독교회와 교회연합기구를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추락시키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 회견에 동참한 이는 31인에 달했는데 이 성명에서도 전광훈 목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전광훈 목사가 시국선언을 발표하자 이영훈 목사가 대표로 있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전광훈 목사의 부적절한 정치적 발언이라며 11일 한기총에 대한 행정보류를 선언했고,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19일 한기총 탈퇴를 선언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한기총이 대표성을 잃은지 오래됐다.”며, “교회는 물론 사회질서까지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위클리 굿뉴스, 2019. 6. 23). 특히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기윤실)는 6월 7일, 한기총의 시국선언은 “그 내용에서 사실관계도 맞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명분도 없다”며 “한기총은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닙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광훈의 시국선언 이틀 뒤였다. 기윤실은, 전광훈의 한기총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전광훈 목사가 지적한 일곱 가지가 ‘사실 관계가 맞지 않고, 명분도 없다’며 그 내용까지 부정하고 있다.

여권이나 한겨례, 경향신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계언론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기독신문」은 전광훈 목사의 시국선언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전광훈 목사 인지도 올라가자 한국교회 이미지는 추락했다(6.11)”는 기사와 “전광훈 목사,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6.11.)”는 사설을 실었다. 그 다음 주에는 “극단적 정치행보 한기총, 회원교단 외면 사면초과”(6.18)라는 기사에 이어 “전광훈 회장의 한기총은 이단옹호기관”(6.25), “전광훈 목사, 한기총 사적 이용 말라”(6.25)는 기사를 실었다. 그 외에도 여러 매체의 비판이 이어졌으나 전광훈 목사가 제기했던 본질적인 문제, 곧 우리나라가 처한 경제, 안보, 외교 혹은 위협받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우려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광훈 목사의 성명을 막말, 극단적 이데올로기 정도로 치부하는 인신공격(ad hominen)이거나 반감의 대인논쟁(argumentum ad hominem)이었다. 시국선언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는 침묵함으로 결과적으로 기존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언론회의 성명은 약간 달랐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의 우국충정의 목소리를 듣고 진실 앞에 서야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단체를 흔든다거나 애국자 개인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태도는 매우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다수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용감하게 외친 전광훈 목사에 대한 공격은 적절치 않다.”고 응답했다.

전광훈 목사와 그의 대통령의 하야 요구에 대해서는 비판하거나 지지할 수 있다고 본다. 또 한기총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가 하는 문제나 ‘한기총’이라는 기독교조직의 이름으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참여하거나 입장을 표방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 필자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광훈 목사가 하야를 요구하는 일곱 가지 이유, 곧 한국사회는 물론 교회의 장래,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확보에도 위협을 줄 수 있는 경제적 위기, 안보, 국방, 외교, 특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편파적인 이념지향의 정책 등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런 문제를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또 단순한 개인이 아닌 목회자가 혹은 교회기관의 이름으로 정치적 문제에 대해 관여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 지적하지만, 박정희 혹은 전두환 정부하에서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 교회(敎團)나 교회기관 예컨대 한국기독교회 협의회(NCC)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발언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일이 있다. 그런가하면 목회자들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일이 있다. 그 일례가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2017년 5월 2일 신경하 감독, 임헌택 사관, NCC계의 이해동 목사, 이명남 목사 등 목회자 3,000인은 ‘기독교목회자 3,000인 기호1번 문재인 대통령 후보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지난 9년간 국민들은 참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웠습니다. …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성서의 가르침과 모든 국민의 꿈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로운 나라,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하나 된 나라, 모두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복지의 나라, 남과북이 하나 되는 평화통일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후보는 기호 1번 문재인 후보라고 판단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때 이런 목회자들의 집단적인 정치 행위를 문제시했다는 보도를 본 일이 없다. 그런데 3,000인 성명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문재인 후보가 국민을 배반하거나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자 저항자로서의 역할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2년 5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위의 성명자 중에 누구도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비판자 혹은 저항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이, ‘성서의 가르침과 모든 국민의 꿈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로운 나라,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하나 된 나라, 모두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복지의 나라, 남과북이 하나 되는 평화통일의 나라를 실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흥미로운 일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3천인 목회자 중의 어떤 이는 지난 6월 18일 전광훈의 시국선언을 비판하는 이른바 원로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교회의 정치참여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목사 전광훈의 대통령 하야 요구를 비판하는 이도 있지만,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목사 김동호와 홍정길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 양심에 비취어 그것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하여 하야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에 대한 하야 요구는 정당하고, 문재인에 대한 하야 요구는 부당하다는 논리는 편파적이다.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 집회를 대비시킨 1641년 목판화. 좌측 집회가 참된 정통이라며 선전하고 있다.

흔히 정교분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Church and State Separation)를 의미하고, 국가는 교회(종교)문제에 간섭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에 기초한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에 대한 저항, 곧 잉글랜드 국교회의 청교도 탄압이나 스코틀랜드에서의 왕권의 교회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나 언약도 전통이 미국에서 정교분리를 주창하게 된 배경이 된다.

그런데, 정교분리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될 때는 국가권력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고, 기독교적 가치가 위협받거나 훼손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가치의 구현을 위해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정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가 기독교 정당을 두고 있고, 정치활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고백적인 행동양식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 영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기에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는 목사였지만 반혁명당(ARP)을 창당했고 정치활동을 통해 수상을 지낸바 있다. 물론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에는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목사직을 사임했지만. 호주에서는 프레드 나일(Hon Fred Nile) 목사는 기독민주당(CDP)을 창당하고 정계에 진출하여 뉴 사우스 웰즈 주 상원에서 재선의원으로 활동했다.

좋은 정부는 작은 정부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이다. 오늘날 국가권력은 지난 어느 때 보다 확대되고 막강해졌다. 오늘의 한국 현실이다. 국가가 단지 국가 행정 자치, 국방, 외교영역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교육, 국가체제, 심지어는 종교나 개인의 가정사까지도 간섭하고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낙태, 동성애를 합법화하거나 소수자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윤리에 대한 강제권을 행사하고,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등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심지어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까지 제한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신앙행위나 양심의 자유는 제한되거나 구속될 수 있다. 교회나 성직자가 정치문제에 무한정 관여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반대로 신앙의 자유 확보를 위해서 세속 정치에 무관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본래적 영역에서 사명에 충실하되, 국가권력이 일반적 상식이나 인간사회의 보편적 윤리나 도덕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독일의 나찌 곧 제3제국의 반인간적 폭력, 극단적인 종족 이데올로기를 체험하면서도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침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가 국가의 비윤리적 혹은 비도덕적 권력행사에 침묵한다면 양심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 개개인은 물론이지만 성직자나 교회도 국가권력이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도덕적인 정부가 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유린당할 경우에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고, 정치적 조직을 통해서라도 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한경직 목사의 경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해방 후 한경직 목사의 정치결사체의 창당이었다.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한국사회와 교계 전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진광소학교, 오산학교, 숭실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33년부터 신의주제2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1941년 목회 현장에서 인퇴(引退)를 강요당한 그는 해방을 맞게 되자 신의주 자치회를 조직하여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한 사회 운동에 관여하였고, 1945년 9월 초에는 신의주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더불어 ‘기독교민주당’을 창당했다. ‘북한 인민을 받아들이기 위해’ 곧 ‘기독교사회민주당’으로 개칭되는데, 이 정당은 남북한을 망라하여 한국 최초의 정당으로써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제시했다(김양선, <기독교해방10년사>, 62). 따라서 대부분 목사와 장로 집사 그리고 신앙을 가진 청년들로 조직되었다.

그가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당을 조직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소련군의 진주로 시작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어떠하냐 하는 점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그 행정을 통해 처음부터 알게 되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함의하는 바에 대한 체험적 확신은 그를 일생 반공주의자로 살게 했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고 했고, 이에 가장 방해되는 세력이 서북의 기독교 세력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미하지만, 정당조직을 통해 대항하고자 했다. 예견된 사실이지만 공산당은 기독교민주당 인사를 탄압했고, 공산정권하에서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정당은 사실상 존립하기 어려웠다. 결국 한경직은 그해 10월 말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의 길을 선택했다. 한경직은,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한경직 목사.

 

한경직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정당을 조직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해방된 조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한경직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많은 목회자나 기독교 신자들이 한경직과 같은 생각을 했고, 서북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적어도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양문화를 접한 엘리트 그룹이었기 때문에 건국의 주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로인 조만식은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이유필은 평북의 건국준비위원회를, 김응순 목사는 황해도에서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던 점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나라, 건국에의 의지, 곧 ‘기독교 건국론’은 정계진출 혹은 정당조직 등의 정치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정치활동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북한 공산체제 하에서 기독교 신앙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북한을 탈출한 한경직은 11월 1일 서울에 도착하여, 남한에서의 민주 정부 수립에 일정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경직이 정당을 조직했던 같은 시기에 북한에서 김화식, 이유택 목사 등은 1945년 11월 초 ‘기독교 자유당’ 조직을 시도했으나 공산주의 세력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고, 이윤영 목사는 조만식 장로를 도와 1945년 11월 일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4. 해방정국과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

 

해방과 함께 남한에서는, 북한에서의 소련군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 미군이 진주했고,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고 모든 행정을 담당했다.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정치적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했다. 해방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외상들은 한국문제 해결책으로 미, 영, 중, 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반탁과 찬탁운동으로 격한 분열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논란 끝에 한국독립 문제는 1947년 9월 국제연합(UN)에 제출되었고, 11월 14일자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2월 26일 모인 유엔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유엔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하게 되었다.

이런 해방 후 상황에서 많은 기독교 목사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북한에서와는 달리 정치적인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지만, 허명섭은 해방과 함께 좌익세력의 광범위한 활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이 영향을 끼쳤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미군정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해방 당시 교육받은 목회자들이 있었기에 정치현실에 가담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정치적 야망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북한에서 한경직의 정당조직과는 다른 일면이 있었다.

예컨대, 감리교의 이윤영 목사,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배은희 목사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에 가담했고, 후에 이윤영은 제헌의원이 된다. 이들이 우파에 해당한다면 김구나 김규식을 따르는 중도우파에 관계한 목사로는 김광호(경기도 가평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박금산(강원도 홍천교회), 이재복(경북인민위원회 간부), 이화영(수원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최문식(경북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황희수(평창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이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감리교의 김창준 목사는 좌익계 정치집단에 가담하여 1947년 2월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찬탁운동을 전개했고, 후에는 월북했다.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판한 이가 바로 그였다. 해방 직후 박용희 목사는 기독교적 색체가 강한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안재홍이 주도하는 조선국민당으로 흡수되었다(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214). 1945년 12월 14일에는 이갑성, 김여식 등에 의해 신한민족당이 결성되는데, 목사인 김창준, 오화영, 이규갑, 정인과 등이 가담했다. 그 외에도 구연직 목사는 충북지역에서, 김창근 목사는 충남대전 지역에서, 이남규 목사는 전남지역에서, 김우종 목사는 강원도 지역 정계에서 활동했다. 또 오택관, 이대위 등은 한독당에, 배은희는 대한 국민당에, 오화영은 조선 민족당에 당수로 가담하는 등 목사들이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장로교 목사인 함태영은 정계로 진출하여 이승만 휘하의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미군정기에 활동한 157명의 기독교 정치인 중에서 목사가 45명에 달했는데(장로는 12명) 29%에 달했다(허명섭,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 151). 제헌국회의 경우, 북한에 배정된 100석을 제외하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5%에 해당하는 50명 정도가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 중 이윤영, 오택관, 이남규, 오석주 등 4인은 목사였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 21개 부(部)나 처(處)의 장 가운데 기독교 신자가 9명이었고, 이 중 2명은 목사였다(강인철, 176). 이처럼 해방 정국에서 다수의 목회자들이 정계에 몸을 담고 건국, 혁신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마감하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1950년대에도 정계에 투신하거나 일정 역할을 감당했는데, 1950년대의 경우 김광우, 유호준, 이호빈, 전필순 등이다. 1960년에는 NCC회장인 이남규 목사가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바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지도자들 특히 목회자들의 정치 현실에 대한 관여가 두드러진 시기는 1970년대 이후 이른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였다. 이 시기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등은 국사독재정권에 저항했고, 교회나 교단적으로 혹은 NCC등 교회 기구를 통해 반정부투쟁에 앞장섰다. 지난 6월 18일 자의 이른바 원로들의 성명에서, “교회를 정치집단화 하거나 정치 정당화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 정치집단화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회의 퇴락이고 존재근거인 복음에 대한 배반입니다”라고 했지만 이런 일은 이미 1970년대부터 있었다. 단지 저항의 대상이 군사 독재정권인가 아니면 편향적 진보좌파정권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6월 10일자 한국기독교회협의회의 성명에서 전광훈 목사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정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냉전적 패권정치”라고 비판하지만 선거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3천명의 목회자 이름으로 문재인 후보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 정파적 이해관계, 패권정치와 무관한지 공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전광훈 목사의 일반적 언사(言辭)나 기롱(譏弄)의 레토릭에는 과욕이 없지 않고, 언어의 현란한 부박(浮薄)보다는 성속을 오가는 직설적 언어는 지지와 반대가 엇갈리게 하지만 그에게는 순연한 애국심이 있다는 점은 비판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분살(焚殺) 하려는 강력한 의지는 대중적 동원을 가능하게 하지만, 한기총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시위는 후일 논란의 주재가 될 것이다.

<paxsglee@hanmail.net>

 

글 | 이상규

고신대학교와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신학대학(PTC)에서 수학하고 호주신학대학(ACT)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미국 칼빈대학, 메노나이트연합신학대학(AMBS), 호주 매쿼리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올해의 신학자상,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고신대학교 교수,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석좌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