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2019-11-0421세기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월드뷰 11 NOV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백승현(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원적 참여정치와 숙의적 참여정치
21세기에 들어선 후 한국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시민참여의 획기적 증대로 인해 일견 참여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는 현상이다. 199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토대 위에서 2000년 16대 총선, 2002년 16대 대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여러 차례의 대선과 총선을 거치는 가운데 가히 폭발적일 정도로 시민참여 현상이 증폭되어 나타나고 있다. 젊은 유권자들이 새로운 정치참여의 영역인 인터넷 공간과 SNS에서 특정후보나 정당 지지운동을 펼치며 젊은 세대의 표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파장이 오프라인으로까지 확장되어 마침내 현실 정치공간의 질서를 바꾸는데 영향을 끼치기까지 하였다.
2002년 대선 직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학생들 추모명목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16대 대선 향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데 이어, 2004년 17대 총선에선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통한 대규모 시민참여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08년 미국 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2016년 10월 최순실 씨의 국정개입 의혹으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등으로 대중적 시위와 SNS 등을 통한 정치적 의사소통이 선거나 대통령 탄핵 등 중대한 정치적 사안과 관련하여 폭발적 시민참여 현상을 불러일으킨 점에서, 대중동원 형태의 새로운 시민참여 양태가 한국적 참여 민주주의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를 참여 민주주의의 발전을 향한 진일보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참여정치 양태가 포퓰리즘(populism)의 양상을 띄어가는 점에서 향후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과 성숙에 부정적 음영을 드리우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더욱이 민주주의의 기본요체인 헌법기관과 정치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국민의사를 제대로 존중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의회정치의 한계, 시민사회와 정치권 간의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등 앞으로 한국정치가 풀어가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다수 인민들에 대해 신뢰와 기대를 표시하며 대중동원 행태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포퓰리즘의 전형적 양상은 권력의 원천이 보통사람들의 수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움으로써 참여정치의 폭을 넓히는 효과가 있는 반면,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일반시민들의 수중에 맡겨둠으로써 결국 헌법기관들에 대한 불신 내지 냉소적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포퓰리즘 정치양태는 고대 그리스 직접 민주정치의 병폐였던 여론몰이에 의한 선동정치와 우중정(mobocracy)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오기 쉬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중정 사회에서는 사려 깊은 이성적 논의 대신, 대체로 수적 다수를 점한 다중들의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인, 때로는 변덕스런 의견들이 판세를 좌우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다분히 이념적 경향으로 인도되는 언론매체들에 의해 여론조사가 장악되고, 뉴스보도가 왜곡되어 가짜뉴스가 판을 치며, 결국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 여부를 분간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여론을 왜곡된 방향으로 바꿔놓는다. 일부 네티즌들이 포털 사이트들을 장악해 특정 이슈나 주제어를 인기검색 순위 상위에 오르게 하여 마치 대다수 의견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 왜곡하는 ‘과다 대표’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인터넷 공간에서 유포되는 여론의 수준은 심사 숙고적 이기보다는 감정적 즉흥적 편향적이어서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회정치와 국민대표의 원리가 존중되는 정치문화가 우리 사회에 과연 확고하게 뿌리내렸다고 할 수 있는지 근본적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국정치에서 시민들의 직접 정치참여와 의회정치 간의 상관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발전돼 나가고, 또 참여정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불안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인터넷과 SNS 공간에서의 참여정치 현황을 살펴보면, 일부 극렬 네티즌들은 욕설에 가까운 언어와 감정적 언사의 남용, 특정대상 인물에 대한 맹목적 지지,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 표출, ‘드루킹’ 같은 방법에 의한 여론호도 등을 통해 여과되지 않은 정치적 견해의 편향적 왜곡현상을 보임으로써 참여정치의 질적 수준이 높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정치 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정당정치의 한계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민참여형태가 확대될지라도 현대 민주정치가 대의제도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참여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민들에 의한 정책결정과정에의 직접참여 효과를 어떻게 하면 대의정치 하에서도 충분히 보장 발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시민들 개개인간의 공적 토론과 공적인 문제에 관한 심사숙고 등을 통해 정치적 평등성과 상호존중의 상황이 창출되도록 하여, 일반시민과 정치인 간의 물리적 정서적 위상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성숙을 계기로 의회정치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돼야할 것은, 시민들 스스로에 의한 자기함양과 자질향상 등을 통한 자발적 참여에 의해 참여정치의 활성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대체로 명망가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민단체들의 주도에 의해, 그리고 소수 주도세력에 의해 기획 추진되는 시위성 대중 집회에 의해,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당론과 정부정책이 좌우되는 일탈형 참여정치 양태가 계속될 경우 시민들은 여전히 피동적 존재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민주정치의 양태도 대중동원 또는 대중조작 차원의 포퓰리즘적 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로 퇴락할 가능성이 크다.
대중 집회를 기획 추진하는 소수 주도세력이 있건 없건 간에 시위성 대중 집회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주도세력과 동원세력이 있다면, 대중 집회의 순수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고 참여 시민들의 의사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의 자치능력이 침해당할 수 있다. 반면, 주도세력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집회가 열린다면 그 집회양상은 자칫 제어장치 없이 달리는 기관차처럼 예측 불가능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시민운동을 활성적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특히 정책의제 설정이나 정책대안 제시 및 대중적 시위집회의 준비 및 진행 등에서 일부 지도적 정치 활동가들의 선도나 소수 극렬 네티즌들에 의해 다수 시민들이 인도되는 양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대표’로서 공식적 선출과정을 거치지 않은 또 다른 비공식 대표들을 공식적 대표들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키워놓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민들 자신의 주도와 일반적 참여에 의한 시민운동으로 시민단체 활동들이 변화되어 나감으로써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이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더 궁극적으로는 동원적 양태의 길거리 집회형 시민운동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이 일상적 생활차원에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사적 영역간의 조화를 스스로의 삶 속에서 이뤄나가는 ‘숙고하는 시민적 삶’의 모습이 정착되어야 한다.
참여정치의 활성화가 시민들 스스로의 자기함양과 자질향상을 통한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만큼, 시민 개개인 차원에서 시위성 집회위주의 운동적 또는 동원적 참여정치(mobilized participatory democracy)가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제도내적인 절차와 방법을 통해 정치적 의사가 표출 집약 전달되는 숙의적 참여정치(deliberative participatory democracy)가 정착될 때 비로소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 있을 것이다. 동원적 참여정치 내지 포퓰리즘적 민주주의의 양태를 불식시키고, 이 땅에 숙의적 참여정치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독교 민주시민의 역할과 기대가 매우 중요하고도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사실 현실 정치세계에는 깊이 있는 정치적 사유세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속한 집단 내에서 공유되는 공통감각에 의존해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현대 민주정치사회에서의 인간의 정치적 삶의 조건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것이 됐건 정치에 관한 사유와 분별의 역량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시민들에게 그런 역량이 부족하거나 또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때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바 있는 파시즘, 나치즘, 소련체제 같은, 인간의 정치적 삶 자체가 상실돼 버리는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보다 나은 정치적 삶을 지향하고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정치·사회적 실존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정치적 사유의 토대를 튼튼히 다지며, 그 지평과 차원을 넓히고 높임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정치의식을 단련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국가로부터 벗어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인간실존의 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정치적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이며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평가하고 측정하고 판단한다. 때로 이런 일반적 평가활동은 투표행위와 같은 공식적인 정치행위나 정부정책에 대한 여론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회참여, 시위, 저항, 무장투쟁, 혁명 등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점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특정 후보나 정당의 정치적 입장과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고, 선거 때엔 투표를 한다. 어느 후보에게 표를 주고 어느 정당의 어떤 정책을 지지할지 각종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기독교인의 신앙의 관점에서 그런 생각과 판단과 선택의 문제들을 살피고 가늠하려 한다.
여기서 살펴볼 첫 번째 질문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가 근대에 들어서서 기독교 문명권인 서방사회에서 확립된 종교와 정치의 분리 개념 또는 그 원칙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현대 자유민주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을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6세기 종교개혁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에서 확립된 전통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기보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정확한 개념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두 개념이 혼용되고 있는데,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종교의 자유 및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선언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 또는 신앙생활을 사적인 문제로 보고, 정치를 공적인 문제로 여기는 것에서 출발한다. 국가는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고 종교와 교파별로 각기 다를 수 있는 예배절차와 형식 등에 대해 국가가 간섭하거나 또는 국교를 지정해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회조직이 국가의 운영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명시된 원칙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현실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교회조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 차원에서 기독교인 민주시민답게 그 신앙에 비춰 현실정치 문제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판단하여 투표나 여론형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모든 개인은 각기 국가의 궁극적 주권자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 민주시민은 하나님이 그 국가에 붙여놓은 청지기이다. 그런 만큼 기독교인은 정치적 식견, 판단력, 분별력을 가지고 정치적 행위주체로서 유권자로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뜻을 투표로 표현하거나 또는, 정부 정책과 이슈 등에 대해 지지나 반대의견을 표출해야 할 권리와 함께 엄중한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땅의 나라’ 즉 우리의 경우 대한민국이라는 세속국가의 시민권과 아울러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시민권 등 두 나라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Christians are in this world, but not of it.). 이 세상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국가를 만들고 존재케 한 분도 하나님이시다. 비록 국가는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질서 속에서 세워진 게 아니라 인간들의 “죄로 인해 제정된” 제도와 산물이긴 하지만,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반은총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기독교인이 그의 삶에서 현실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신앙생활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이 현실 정치문제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데 직접적으로 발휘되고 활용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나
이제 여기서 “기독교인은 반드시 기독교인 후보자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가?” 하는 두 번째 질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직에 출마한 후보 중에 복음적인 후보가 있다면 기독교인은 대체로 그 사람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직후보로 출마한 기독교인에게 투표를 해야 할 필요나 의무는 없다. 건국 후 한동안 ‘기독교 국가’라고 자임해 왔던 미국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1970년대 말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자신의 출신지인 조지아주의 남침례교 교회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는데 많은 언론들로부터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독실한 신앙인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 미국 대선에서 정치적 보수성향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카터를 찍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국방안보문제나 경제정책 때문에 공화당 후보였던 로날드 레이건에게 표를 던졌다. 레이건도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카터만큼의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자신이 복음적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 후보에게 표를 줘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쓰임 받기 위한 정부 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족속을 기근에서 건져내고자 이집트 전역을 다스리는 권력의 자리에 요셉을 세우도록 이집트왕 바로를 사용하셨다(창 41:37-57). 그 분은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을 이용하여, 다니엘과 그의 유대인 친구들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하여 바빌론 전역을 다스리는 높은 관직에 오르게 하셨다(단 2:46-49). 또 페르샤왕 고레스로 하여금 포로로 끌려와 있던 유대백성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하셨고(사 45:16, 스 1:1-4), 페르샤왕 다리오로 하여금 유대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때 그들을 보호하게 하셨다(스 6:1-12). 또 페르샤왕 아하수에로를 움직이셔서 에스더를 왕비로 삼게 하셨고,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하도록 하셨다(에 6:10-11, 8:1-2, 7-15).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속국가인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평화상태(Pax Romana)를 이루게 하셔서 초기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지중해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셨다.
기독교인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할 때 우리가 현실에서 따르고 유념해야할 원칙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후보자 개개인의 종교적 확신이나 배경이 무엇이건 간에 관계없이 먼저 어느 후보가 성경적 가르침에 합치되는 도덕적 정치적 가치를 가장 진지하게 표상하고 성의 있게 준행하려 노력하는지를 가려내어 지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정부공직을 맡고 있는 기독교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부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감사를 하되”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딤전 2:2).” 바울은 또한 비단 기독교인의 권세뿐만이 아니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로마서 13:1).”고 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4).“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바”의 권세는 정부관직에 있는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권세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인 유권자가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정책, 이슈, 자질, 능력 등 다른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후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지기로 결정한다면, 과연 그의 결정은 신앙적이고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독교인들이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 전원, 행정부의 장관과 공직자 전원, 대법관 전원, 모든 공무원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그 나라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한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이 땅의 나라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마지막으로 살펴볼 질문은 “기독교인에게 투표참여 이상의 정치적 의무가 있는가?” 이다. 이 질문을 바꿔 표현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국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부여받으면서 나라를 위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과 관련해 미국독립전쟁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사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서명자들은 자신들이 영국에 대해 반역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것이었으므로 영국군에게 붙잡히거나 패배하면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재산을 몰수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당시 세계최강 영국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지도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영국을 상대로 목숨 바쳐 전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은 결코 값싸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shbaek@khu.ac.kr>
글 | 백승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미국 Louisiana State University 에서 Ph.D.를 받았으며, <서양정치사상: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정치사상: 중세>, <서양정치사상: 근대 초기>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