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필름

인생 필름

2019-09-13 0 By worldview

인생 필름

 

월드뷰 09 SEPT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VIEW 2

 

글/ 최충희(작가)

 

“사모님. 인생이 영화 필름이라면 딱 한 부분만 잘라 없애고 싶어요. 그 부분만 없었다면 정말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거든요. 후회도 덜할 거구요,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아요….”

과거의 상처들을 반추하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사건만 없었다면, 그 사람을 그때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인생이 좀 더 행복해지고 나아졌을 거라는 말이지요. 사실 저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으셨다면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자랐을 텐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결핵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가고 싶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내 형편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은 과거의 어느 사건, 누군가와의 잘못된 만남, 혹은 잘못된 선택 때문이 라는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상황이나 대상을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려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도피 심리와 함께 실제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우월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찌꺼기들이 제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음을 발견할 때면 하나님께 죄송하고 ‘나 믿는 사람 맞아?’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가장 먼저 변화되는 것이 삶의 가치관, 사건과 환경에 대한 해석 그리고 관점 등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과거의 상처가 나를 파괴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빼내고 싶은 가시처럼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나를 절망하게 만든 그 가시가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든 축복의 도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제가 좋아하는 성경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요셉의 생애를 묵상하다가 젊은 나이의 요셉이 그 오랜 세월 어두운 감옥 속에서 매일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숱한 밤을 보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내가 그였다면 어땠을까?’ 저는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둡고 냄새나는 감옥을 상상해 보았지요. 상상으로나마 요셉 곁에 앉아 보았습니다. 좁고 음습한 공간 속에 갇혀 아무런 변화도, 앞날에 대한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어두운 나날을 보내는 요셉. 노동으로 지친 육신을 누인 깊은 밤,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고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 그는 분명 지난 과거 일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어디 그날뿐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억울한 지난 날을 수없이 떠올렸을 것입니다.

특별했던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 동생 베냐민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 고향의 정다운 집과 양들이 풀을 뜯던 들판…. 요셉의 입가에는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검은 구름처럼 몰려오는 어두운 과거의 기억들로 인해 그의 표정은 한없이 침울해졌을 것입니다. 그날의 아픈 기억들…. 사나운 늑대처럼 험악한 형들의 얼굴, 구덩이에 빠져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자신의 애절한 절규, 애굽 상인에게 팔려갈 때 등 돌린 형제들의 냉담한 뒷모습…. 그렇게 그날 일을 반추하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며 떠오른 한 장면! 그 장면이 떠오른 순간, 요셉의 심장은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은 “아!” 하고 뼈아픈 탄성을 질렀지요.

번쩍하고 그에게 떠오른 장면은, 기억해 내기도 쉽지 않은 정말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바퀴를 굴리던 요셉은 그 작은 사건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어쩌면 오늘날 자기가 감옥에 갇히는데 지 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15절에 등장한 한 사람, 성경은 그 사람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냥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 나선 요셉이 형들을 찾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요셉 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찾느냐고 먼저 물었고, 도단으로 가보라고 형들이 있는 장소를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은 그렇게 요셉의 인생 무대에서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스친 그 만남 때문에 그날 요셉은 형들에게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다면 요셉은 형들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작은, 우연과도 같은 순간의 만남이 요셉의 인생 전체를 허물어뜨렸습니다. 그의 삶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혼돈의 광풍이 휘몰아쳤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억울한 감옥 생활을 원망과 한탄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등을 돌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였습니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이 형통했다고 기록합니다. 모함당하고 잊혀진 사람이 되었어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에 성경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요셉의 인생이 형통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0-21) 요셉의 관점은 세상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현실은 고통이요, 고난이요, 막힌 담 같은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더 좋은 것 을 얻기 위한 내려감이요, 돌아감인 것입니다. 나의 약함과 실수와 실패까지 사용하셔서 결국은 선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 요셉은 그분의 놀라운 손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번 요셉의 인생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볼까요? 바로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술 관원이 감옥 속의 요셉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감옥에서 술 관원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보디발 장군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보디발 집안의 종이 되지 않았더라면, 때마침 애굽으로 향하는 상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형들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더라면, 형들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그리고 그날… 그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요셉의 인생에 애굽 왕 바로의 총리대신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극심한 가뭄과 기아에서 구원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애굽의 기름진 고센 땅에 거주하며 열두 지파의 자손들이 대를 이으며 번창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으니’ 저는 요셉의 이 고백을 들으며 전율합니다. 인간의 악한 뜻과 행위를 사용하셔서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하신 섭리!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경륜의 깊이는 실로 오묘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저는 이 진리를 확신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결단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없애버리고 버리고 싶은 순간, 아픔이고 불행이라 생각했던 그 사건들을 감사함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고난과 고통이 닥칠 때,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 창세기 50장 20절의 요셉의 고백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 니라 (로마서 8:28)”

<choi.choonghee@gmail.com>

 

글 | 최충희

미국 세인트루이스 한인장로교회에서 사모로 섬기다가 2000년 미주 교양지 <광야>에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지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와 <일분 묵상>을 연재했으며 해외기독문학 회원으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하트앤 서울 미주 복음방송에서 <최충희 칼럼>과 <성경 속 인물 산책>을 진행했다. 저서로 <희망 온 에어>가 있다.

* 홍성사 <희망 온 에어>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