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과 인간 본성의 정치학: 인간은 백조인가? 흑조인가?”

2019-09-15 0 By worldview

“블랙 스완과 인간 본성의 정치학: 인간은 백조인가? 흑조인가?”

 

월드뷰 09 SEPT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VIEW 4

 

글/ 김철홍(장신대 교수, 신약학)

 

1. 인간 본성에 대한 수작(秀作) ‘블랙 스완’(Black Swan)

 

할리우드 영화 중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가장 깊은 성찰을 한 영화를 한 편 꼽는다면 어떤 영화를 뽑아야 할까? 나는 주저 없이 ‘블랙 스완’(감독 Dar\-ren Aronofsky)을 선택할 것 같다. 그 영화를 보면서 신약 성경 로마서 7장의 문자(letter)가 생생한 그림(picture)으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고나 할까? 2010년 12월 미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그다음 해 아카데미 시상에서 주연 배우인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1년 2월에 국내에서도 개봉되어 적지 않은 관객(1,623,518명)이 관람했다. 그러나 한국 관객들의 솔직한 평가는 대체로 ‘영화가 뭘 말하는지 모르 겠다,’ ‘왜 이 영화가 좋다고 하는지 모르 겠다,’ ‘재미는 없다,’ ‘영화를 본 뒤 기분이 찝찝하다’ 등이 주류였다. 영화 포스터의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 혹은 “당신의 심장을 할퀴는 사이코 섹슈얼 스릴러”와 같은 값싼 문구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 당시 영화 평론들을 검색해 보아도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 인간 내면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에 전무(全無)한 충무로의 천(淺)한 코믹 액션 코드에 다들 너무 절여져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블랙스완>.

 

2. 영화의 줄거리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뉴욕 발레단의 발레리나 ‘니나’는 ‘백조의 호수’ 프리마 돈나로 발탁된다. 그녀는 이번 공연에서 백조와 흑조를 동시에 연기해야 한다. 천성(天性)이 착한 니나에게 우아하고 연약한 백조를 연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사악하고 관능적인 흑조의 역할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극단의 감독은 니나에게 “너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악함을 끄집어내어 연기해 달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도무지 그게 잘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발레단의 다른 여자 무용수인 릴리라는 여자가 점점 그녀의 경쟁자로 떠오른다. 니나에 비하면 릴리는 타고난 흑조다. 릴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점점 니나의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으나 니나를 임신하게 되면서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대학 입시를 앞둔 한국의 학부모를 능가하는 심리적 부담을 니나에게 준다. 릴리에 대한 질투, 스트레스와 끊임없는 긴장, 불안감, 어머니와의 심리적 갈등, 그 속에서 릴리는 조금씩 타락하고 악해지면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경험을 한다. 샤워를 하려고 보면 자신의 등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있다. 손톱에서는 피가 난다.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그녀. 그러나 그녀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거울 속에 언뜻언뜻 사악한 표정을 한 니나의 얼굴이 나타난다. 어느 날 그녀 등의 상처 난 피부에서 검은색 깃털이 나고 그녀는 그것을 뽑아낸다. 관객들은 메스꺼움에 경악하고 니나도 마찬가지다. 관객과 니나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공연 날이다. 먼저 백조의 역할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내려온 니나는 흑조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분장실로 내려온다. 그런데 릴리가 분장실에 들어온다. 릴리는 니나에게 “너의 흑조 연기는 형편없다. 내가 하는 게 낫겠다.”라고 말한다. 흥분한 니나는 그녀와 다투다가 거울을 깨뜨리고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릴리를 찔러서 죽인다. 그녀의 시체를 급히 화장실로 옮겨 놓고 흑조의 옷을 입고 무대로 올라간 니나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흑조 연기는 더 이상 연기가 아니다. 그녀는 사악한 흑조 그 자체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에서는 흑조의 검은 털이 나오기 시작한다. 눈까지 붉은 핏빛

으로 바뀐다. 그녀의 완벽한 흑조 연기에 관객들은 물론 감독도 압도되어 박수를 친다.

흑조의 연기를 마치고 니나는 다시 분장실로 돌아온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릴리가 서있다. 릴리는 니나에게 ‘너무나 훌륭한 흑조 연기였다’고 칭찬하고 돌아간다. 놀란 니나는 화장실로 간다. 놀랍게도 자신이 죽인 릴리의 시체가 없다. 혼란에 빠진 니나가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자신의 배에서 피가 나고 있다. 니나가 찌른 것은 릴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도 니나는 백조의 연기를 하기 위해 다시 무대로 올라간다. 인생도 그렇지만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영화는 니나가 백조의 연기를 완벽하게 마치고 무대에서 그녀의 마지막 대사 “완벽했어”(Perfect!)를 읊조리며 죽는 것으로 끝난다.

 

3. ‘블랙 스완’의 인간학(anthropology)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 순자(荀子, 주전 298-38?)의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 주전 372?~289년?)의 성선설(性善說) 중 어느 것이 정답일까? ‘블랙 스완’은 세상에 백조형 인간과 흑조형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니나는 백조고, 릴리는 흑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이 영화는 흰색과 흑색을 상징으로 잘 사용한다. 니나는 평소에도 흰색 옷을 입고 릴리는 흑색 옷을 입는다. 하지만 영화가 뒤로 갈수록 니나는 흑색 옷을 입고 나온다.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이 ‘니나’라는 인간 안에 백조와 흑조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내면에 백조와 흑조를 다 갖고 있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이란 것은 세상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다 선하디 선한 백조가 될 수도 있고, 악하디 악한 흑조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선한 주인공과 악한 상대역을 배치하는, 간단하지만 쉽게 잘 먹히는 구성을 애용하는 흔한 할리우드 영화와 ‘블랙 스완’은 다르다. 상당히 현실에 근접한 인간 이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인간을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으로 양분(兩分)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악함과 선함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블랙 스완의 인간관은 유대-기독교의 인간관과 유사하다. 유대교 랍비들은 인간의 내부에 선한 성향과 악한 성향이 공존한다고 보았다. 랍비들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5)”에 그런 인간관의 근거를 둔다. ‘계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이예체르’(yester)인데, 기본 뜻은 ‘성향(inclination)’이다. ‘인간의 마음속의 성향이 항상 악하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성향(evil inclination)’이란 개념이 유래한다.

악한 성향은 인간 내면의 한 부분이지만 랍비들의 글에서 악한 성향은 의인화되어 마치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인격체처럼 묘사된다. 악한 성향은 사람처럼 인간을 향해 말을 한다. 마치 주인이 노예에게 명령하듯 말하고, 인간은 그 말에 순종한다. 바벨로 탈무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은 그가(악한 성향이) 그 사람에게 말한다. ‘저것을 하라’; 내일 그는 그 사람에게 ‘저것을 하라’고 말하며 그가 ‘가서 우상을 섬겨라’고 말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 그러면 그가 가서 그들을(우상들을) 섬긴다(b. Sabb. 105b).”

 

악한 성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력(force)으로서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 악한 성향은 선한 성향보다 강하다. 그래서 니나와 같이 지고지순한 여주인공도 내면에 존재하는 사악함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주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랍비 필로(Philo)는 악한 성향을 ‘파토스’(pathos, 욕정)라는 헬라어로 번역하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건 이 ‘파토스’에 제한을 가하거나, 고집 센 말에게 하듯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고치기 어려운 악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토스의 억제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마치 말이 끄는 전차를 모는 사람이 종종 그렇게 되듯, 파토스에 끌려가고 말 것이다 (Philo, Spec. 4.14)..

 

그가 욕정/욕망을 잘 길들여지지 않은 말에 비유한 것은 욕망이 인간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한 성향만을 만들고, 악한 성향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죄도 짓지 않고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왜 악한 성향을 만드신 걸까? 랍비 유대교 문서인 창세기 라바(Rabbah)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악한 성향이 없다면 아무도 집을 짓지 않고, 아무도 아내를 취하여 아이들을 낳지 않을 것이다(Gen. Rab., Bereshith 9.7). ”

 

악한 성향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다. 그러나 악한 성향이 없으면 아무도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아무도 결혼하여 아기를 낳지도 않는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랍비들이 말하는 ‘악한 성향’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욕망’이란 단어와 동의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겐 욕망이 있다. 경제적 욕망이 있고, 성적인 욕망도 있다.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지만, 놀랍게도 욕망에는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순기능도 있다.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릴 때 인간은 죄를 짓게 되므로 욕망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욕망 자체가 죄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니나가 프리마 돈나가 되고 싶은 욕망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그녀가 자신을 스스로 죽였던 것처럼 욕망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4. 내 안에 존재하는 ‘악’과 인간의 구원

 

블랙 스완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적 문제인 ‘내 안에 있는 악’,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유대교 랍비들은 율법이 그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랍비들은 율법이 악한 성향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독제(解毒劑)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그 해결책이라고 보지 않는다. 로마서 7:22절에서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하고 말한다. 인간은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을 좋아하고 행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율법(자연법/도덕)을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행하기 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것인 악을 행한다. 왜 그런가? 바로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20)”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죄는 잘못된 행동(wrong behavior)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세력(force, power)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인간관에서 율법은 해결책이 아니다. 인간이 율법을 알고 심지어 행하려는 도덕적 의지도 갖고 있지만, 율법은 여전히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의 일부분일 뿐, 해결책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비관적인(pessimistic) 인간관을 발견한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복음으로 이동할 때 그는 유대교의 낙관적인(optimistic) 인간 이해를 버리고 인간의 본성을 매우 비관적으로 이해했다. 마치 백조였던 니나가 흑조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관객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재고(再考)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인간의 내부에는 자신의 내면에 거주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원이 없다. 구원은 인간의 외부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 와야 한다. 그러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는 구절은 바울 한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 지배당해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탄식이다. 이것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성령이며(롬 8:2-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5.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정치학

 

‘블랙 스완’이 예시하고, 복음이 지지하는 인간관은 비관적 인간관이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인데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라는 인식이다. 성경적 인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지고지순한 핑크빛 이상을 실현할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인간에 대한 어두운 인식이긴 하지만, 비관적 인간관은 현실과, 사실과, 경험에 기초하여 인간을 이해한다. 이런 인간관에 기초하여 정치 이론을 세운다면 어떤 정치학이 나올까?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정치학이 나온다. 인간의 능력을 무한대로 보고, 지상 낙원 건설을 약속하는 이상주의(idealism)를 경계하고 현실주의(realism)에 기초한 정치학이 나온다.

이상(ideal)은 고상하지만, 사실(fact) 혹은 진실(truth)은 반드시 고상하지만은 않다. 정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구호를 외치며 자신은 정의의 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상대방은 제거되어야 할 불의의 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불완전하고, 복음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정의롭지도 않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도 없다. 그런 사람들의 정의와 평등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는 결국 공산당원들의 욕망의 만족을 위한 집단 독재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은 계속 반복되어 온 차가운 경험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덜 불의하고,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하고, 상대적으로 덜 불행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들을 정의의 세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자신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고, 언제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자신들이 만드는 체제와 사회가 정의롭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파라다이스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런 정치적 세력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 자유가 소중하지만, 그 자유조차도 인간의 개인적 욕망의 만족을 위해 사용될 때 파괴적인 결과가 온다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자유보다 더 상위의 가치(예를 들면 ‘생명’)를 동원하여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그래서 자유주의자들과도 구분이 되는 정치 세력이라야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정책을 세울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이런 정치를 우리는 보수주의라고 부른다.

보수주의는 공산주의처럼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려고 하거나, 억누르려고 하지 않는다. 보수주의는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를 통해 공동 소유와 무소유를 강요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본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와 더불어 오히려 자신의 소유의 재산을 증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적극 장려한다. 단, 법률이 정한 범위 안에서 합법적인 경제 활동을 통해 각자 재산을 증식할 것을 요구하며, 법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욕망에 맞서 싸우거나, 욕망을 규제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허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보다 더 현실적인 정책이 된다.

보수주의 정치 철학은 인간 안에 있는 악과 인간 밖에 있는 악을 동시에 인식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 인간 외부의 사회의 제도의 모순 때문이라고 보지도 않고, 제도의 개혁을 구원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사회의 구조적 악의 근원이 바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비도덕적 사회에서 도덕적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비현실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이 세상에 도덕적 인간이란 없다). 제도를 개혁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의 내면의 욕망과 죄의 세력의 지배 때문에 계속 문제가 일어난다고 예상한다.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이상에 사로잡혀 성급한 개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기존의 제도가 갖고 있는 장점을 지켜나가면서 신중하게 변화를 진행한다.

최근 한국 기독교인과 교회의 탈(脫) 정치화가 우려스러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앞으로 기독교가 어떤 방향으로 정치관을 세워나가야 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이 토론에서 우리는 인간론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론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나는 백조고, 재는 흑조야’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조심하라. 큰 사고를 칠 분들이다.

<paulstudy@naver.com>

 

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과 유니온 신학교(Union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