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약속’
2019-09-12‘오빠의 약속’, 성 혁명의 시대를 거스르는 청년의 첫걸음(1)
월드뷰 09 SEPT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
글/ 이승찬(전도사, 장신대 파로스포럼 회장)
*본 논고는 [아빠의 약속]이라는 기획 중, 청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기획된 시리즈 물입니다. 이를 통해 건강한 성(性)문화와 생활을 이루어갈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 혁명의 시대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사상적 뿌리를 가졌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들어가며
필자는 여러 계기를 통해 동성애라는 주제에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성애 이슈가 가 지는 함의를 연구하면서 중대한 진실을 깨닫게 되 었다. 이에 ‘동성애’ 이슈가 가지는 의미를 조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성애는 유대-기독교적 가치 를 초토화하는 거대한 고질라 같은 성 혁명의 일부 이다.” 우리가 동성애 이슈에서 동성애만을 본다면 고질라 뒷다리만을 살펴보는 것이다. 성 혁명에 대 처하여 기독교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성 혁 명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는지, 무엇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폐해는 무엇인지, 그 현황과 전략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대를 영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지독한 성적 음란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음란이 음란인 줄도 모르는 시대다. 음란의 시대에 결혼과 순결이라는 단어는 꼰대 언어가 되어 버렸다. 그런 데 이 음란은 시대가 바뀌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성 혁명·성 정치를 추구하는 파워 엘리트 들에 의하여 약 200년간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이 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인공지능에 의 해 만들어진 프로그램 안에 가두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게 하여, 싸워야 할 현실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부터 성 혁명의 실체와 현황,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위대한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Ⅱ. 성 혁명 시대를 조망하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68혁명에 이르기까지
자유·평등·박애를 기치로 내건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일어났다. 혁명 200년 후인 1989년,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200주년을 기념할 것인가를 두고 토의를 하였다. 토의의 결론은 피와 살육의 역사인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기가 껄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1789년의 ‘인권선언’만을 기념하기로 하였다. 정말로 그랬다. 평등이라는 기치에 걸맞게 프랑스에서는 4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단두대에서 평등하게 목이 잘려 죽어 나갔고, 이를 포함한 5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죽었다.
“악질들은 짓밟아 버리자!”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광기는 수천 명의 목회자와 종교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종교인들의 죽음으로 빈 그 공간, 즉 ‘하나님과 그의 명령’을 대체한 것은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었다. 한편 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의미하는 앙시앵레짐 시대에 소설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1740-1814)는 감금된 바스티유 감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통,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도착에 대한 것을 글로 표현하는 데 사용했다. 사디즘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1791년에 출간된 사드의 소설 <저스틴>은 섹스의 정치화와 정치의 섹스화, 즉 성 혁명에 이바지했다.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추방된 후 루이 18세가 권좌로 돌아오고 교황 피우스 7세에 의해 예수회가 복원되자 프랑스의 첫 번째 성 혁명은 잠시 수면 아래 묻혔다. 그러나 성 혁명은1968년, 프랑스의 68혁명이 일어나기까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약 200년 동안 지성인들에 의해 자양분을 축적하고 있었다. 장 자크 루소, 어거스트 콩트, 앙리 드 상 시몽, 샤를 푸리에와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과 함께, 프리드리히 니체, 프로이트, 빌헬름 라이히, 시몬 드 보부아르, 알프레드 킨제이 등은 성 혁명을 조성하기 위한 철학적, 심리학적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위에 언급한 저들의 공통점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았고, 지키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의 거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형상으로 인간을 재창조하기 위해 그들의 삶과 어마어마한 창조적 에너지를 기꺼이 바쳤다.
지금부터 성 혁명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에서 세 명만을 살펴보고 성 혁명의 폭발점 역할을 한 프랑스의 68혁명을 간단히 언급하겠다.
1.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성 혁명(The Sexual Revolution)>이라는 책을 저술한 성 혁명가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그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하여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계급 관계로 결부시킨 최초의 인물로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는 성 정치 운동의 기반이 된 ‘오르가즘 이론’을 주장하였다. 오르가즘 이론이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혁명 시민으로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주 3회의 오르가즘을 필요로 한다는 이론이다. 오르가즘을 어떻게 유도해 내는 방법은 자위가 되었든, 파트너를 바꾸면서 하든, 이성과 하든 동성과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라이히가 볼 때 이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강제적인 결혼’과 자녀 양육의 도구로써 ‘강제적인 가족’을 들면서 이것들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 정치가 성공하는 것은 대중의 성애화(sexualization)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즉, 사람들에게 성행위의 즐거움을 알게 하고, 성행위에 탐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에게 아이들과 청소년은 성애화의 핵심 대상이다. 아이들을 성에 부정적인 권위를 가진 부모와 단절시키고, 그들을 금욕에서 해방해 주어, 마음껏 성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완전한 성애화는 가족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의 이론은 후에 언급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후반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옷으로 갈아입은 라이히의 성 혁명은 미국의 히피들과 유럽의 68혁명 세대에게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메시지는 “너 자신을 억압적인 기독교의 성도덕으로부터 해방시켜라. 너의 충동대로 살아라. 그래서 모든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라는 낙원을 창조하라”였다. 이 메시지는 라이히 자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라이히와 그의 동료였던 실버트 박사는 말년에 사기죄로 기소되어 교도소에 갔다. 라이히는 교도소에서 사망하였고, 1년 후 그의 동료도 석방되자마자 자살하였다.
2.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 1894~ 1956)
곤충학 분야의 과학자였던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는 오늘날 성 과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서구 문화의 근본적 가치를 해체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아이들과 재소자들을 이용한 사도마조히스트(Sadomasochist)1)였고, 그가 통계자료를 위조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초 주디스 라이스만 박사에 의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그의 작업은 매우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사회 연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1948년에 출간한 <남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은 두 달도 안 되어 20만 부가 팔려나갔다. 이 책을 통해서 킨제이는 미국의 대중들에게 혼전 성관계나 이혼, 그리고 동성애적 성향에 몰입하는 것과 포르노를 보는 것 등이 정상이라고 믿게 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성적으로 왕성하고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으므로, 성인들에게 아이들이 자신의 성적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장려하게 했다. 킨제이는 이 책을 통하여 당사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 없는 이혼(1970), 낙태의 합법화(1973), 혼외 성관계, 동거, 음란물과 동성애, 이혼, 매춘에 대한 관용이 사회에 퍼지기를 바랬다.
킨제이에게는 강력한 동맹군이 있었다. 자금줄로는 록펠러 재단이 있었고, 포르노 배급을 통한 미디어 지원군으로는 <플레이보이> 편집자인 휴 헤프너가 있었다. 성범죄에 관한 법을 바꾸는 데 협력한 ‘미국 법률 연구소’와 공립학교에서의 의무적인 성교육을 통해 성애화를 확산시킨 ‘미국 성 정보와 교육위원회’도 있으며,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 시술을 지원하는 곳으로는 ‘국제가족계획연맹’이 있었다. 킨제이는 동성애적 사도마조히스트였다. 그는 스스로 몸에 가학적인 상처를 내기도 하였고 약물 중독자로 살다가 1956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사상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였고 자유연애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 유명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의 책, <제2의 성>이 울린 팡파르였다. 이 책에 의하면, 여성들이 가부장적 압제의 사슬을 깨어 부수고, 모성의 노예 상태로부터 도망하여 직장생활에서 성공하고 ‘해방된 성’에 탐닉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위해 피임과 낙태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임신이란 불구가 되는 것이며, 태아는 ‘기생 생물’로 그저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는 자기가 했던 두 번의 낙태를 옹호했으며, 태아를 죽이는 것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던 당시, 파리에 있던 자신의 살롱에 낙태소를 설치하였다. 그녀와 그녀의 제자였던 앨리스 슈바르처의 대중 캠페인을 통해 낙태는 합법화와 대중화의 문을 열었다. 독일에서는 그 이후로 8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낙태되었고, 미국에서는 1973년 이후로 총 5,600만 명의 태아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부터 성도덕에 대한 거부, 결혼·모성·가족에 대한 거부, 낙태가 여성의 ‘인권’이 되는 것, 직장여성이 여성의 유일한 롤 모델이 되는 것, 그리고 남성과의 권력 투쟁 등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아젠다가 사회에 공고하게 구축되었다. 그녀가 댐을 무너뜨리자, 1970-80년대가 되어 슐라미스 파이서 스톤, 베트 프리단, 케이트 밀렛이 등장하여 바야흐로 현대 페미니즘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페미니즘의 주제는 평등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 사회학자 가브리엘 쿠비에 의하면, 페미니즘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을 부정하고 가족과 교회, 즉 결혼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결합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바로 그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미국의 철학자이자 ‘성 주류화’로 알려진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생물학적 중요성을 부정하고, 사회 내에서 이러한 차이를 없애기 위해 힘썼다. 그녀의 전복이론(subversive theory)은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 학계에 수용되어 ‘젠더와 퀴어 연구’라는 새로운 분야를 형성했다. 또한 UN이나 EU 같은 국제기구들과 수십억 달러를 동원할 수 있는 재단들 역시 스스로 이 전복이론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전 세계에 이 젠더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있다.
4. 프랑스 68혁명
이러한 사상적 모판 가운데에서 유럽 사회에 강력한 파장을 끼친 프랑스 68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프로이트, 라이히, 보부아르, 체 게바라, 모택동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성계에 이러한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교수들이었다. 이 학파 연구자들의 다수가 독일 공산당의 당원이거나 동조자들이었다. 이 학파의 특징은 종교와 가족의 파괴와 같은 공산주의 원칙을 근거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융합시킨 것이다. 이 학파의 연구자들은 2차 대전 시기에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안착하여 가족해체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만들었다.
학생들로 주축을 이룬 68혁명 세대들은 혁명 이후 제도권으로 진입하였다. 학술적으로 교육받은 그들은 정치, 미디어, 대학,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유엔과 유럽연합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68혁명의 주동자였던 다니엘 콘벤디트는 후에 유럽의회 의원이 되었다. 1992년부터 키엘대학에서 성교육 교수로 재직 중인 우베 시에러트는 소아성애자인 헬무트 켄틀러와 함께 교회의 자문이라는 직함으로 성애화를 퍼뜨리고 있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과 오바마가 친 동성애 정책을 쓰나미처럼 밀어붙였던 이유도 68혁명에 있다. 68혁명 세대들에게 영향을 준 급진주의자 사울 알린스키(Saul D. Alinsky)의 영향을 그의 저서를 통해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할 때부터 유럽과 미국의 신좌파 세력의 영향을 받은 참여연대 출신들이 이 조직에 들어가 자리를 굳혔고, 그 이후 신좌파적 인권정책을 집행해왔다. 그래서 오늘날 인권위의 정책을 근거로 청소년유해매체물에서 동성애 삭제, 공교육에서의 성평등(양성평등이 아님) 교육, 군대 내의 동성간 성관계를 금지하는 군형법 폐지, 동성애에 불리한 언론 보도를 제약하는 인권보도준칙 제정 등과 같은 황당한 정책들이 연이어 추진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theace1127@naver.com>
1)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의 합성어로, 가학적인 성향과 피학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글 | 이승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에 신학대학원을 재학 중이다. 주은혜교회 청소년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장신대 학생 동아리 파로스 포럼(PHAROS FORUM)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