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동성애, 돌아가야 할 곳
2019-08-19탈동성애, 돌아가야 할 곳
월드뷰 08 AUGUST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글/ 박진권(선교사, 아이미니스트리 대표)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 대학생이 된 나는 과에서 주최하는 신입생 수련회에 참석했다. 버스에서 만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거듭났니?”
순간 당황스러웠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었지만 동성애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저 감추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 어 그렇지..”
그날이었던 것 같다. 감추면 괜찮다고 스스로 말하며 지내왔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날, 알 수 없는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그 작은 찔림은 폭풍처럼 일어나서 온 마음을 흔들었다. 내 뒤로 감추어진 그림자 같은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을 감추어야 할 필요가 없는, 자유롭고 홀가분한 내가 되고 싶었다.
그날 이후 신앙이 깊어 보이는 몇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들이라면 이 그림자에 빛을 비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힘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비결을 알려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고작 스무 살이었고, 내가 고백한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외로운 시간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나는 우연히 가족들에게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들켰다. 온 가족이 너무도 놀랐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동성애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벗어나야 한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활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다. 말기 암이셨다. 나 때문일 수 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 멈춰 설 때에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즉시 사귀던 남성과 헤어졌다. 다시 결단해야만 했다.
내가 동성애자로서의 생활을 끝내면 아버지가 다시 강건해지실까.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인생이 끝나는 것만 같았다. 밤새 술을 마시고 밤새 게임을 하고 남자들을 찾아 관계를 맺고 방탕한 삶에 자신을 내던졌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했다. 교회 음악을 전공했고, 음악을 하며 살고 싶었지만, 꿈을 쌓아올리며 이루어가기엔 내 삶은 너무도 무너져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맡길 때에야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10년, 나는 남자친구가 운영하는 DVD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뉴스에서 지진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티와 칠레에 큰 지진이 있었다. 그 뉴스를 보다가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을 텐데,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이 문제를 끌어안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때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각오를 하였다. 그때에야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을 하였다.
‘나는 벗어날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며칠 후 아는 목사님께 전화가 왔다. 그분은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씀하셨다.
“진권아,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다.”
그날로 DVD방을 박차고 나왔다. 남자친구였던 남자는 떠나는 나에게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들이 마치 끌어당기는 손처럼 나를 쫓아올 것만 같았다. 더 열심히 도망을 쳤다.
집에 도착한 후 짐을 싸서 나를 불러주신 목사님이 계신 교회를 찾아갔다. 그날 그 교회에서는 저녁 집회가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동성애자로서 살았던 지난 15년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동성애자로서 살았던 삶의 무게와 죄책감,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들이 모두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나를 격려해 주셨고, 내가 교회에서 계속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교회에서 씻고 자며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불러주기만 하면 어디든 가서 연주를 했다. 안내지를 접거나 우편물을 보내는 일 등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기회가 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를 용납해 주시는 목사님의 돌봄 아래서 그렇게 지내는 생활들이 즐거웠다. 간간이 동성애 생각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욕구를 점점 이겨나가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붙잡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는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여자 친구가 사귀고 싶어졌고 결혼도 하고 싶었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축복이라고 믿었던 나를 가상하게 여기신 것일까. 어느 날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같은 교회에서 만난 동갑내기였다.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끔 같이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밥을 먹으러 나가기도 하던 교회 친구였다. 자연스럽게 내가 탈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리게 되었지만,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점점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비가 오던 여름 날, 교회에서 지내던 내게 샴푸를 가져다주러 온 그녀를 다시 집에 바래다주며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너, 나랑 결혼할 확률이 1%도 없다고 생각해?”
얼마나 남자답지 않은 말인가. 나는 왜 이렇게 보냈을까. 머리가 복잡해지던 중 답장이 왔다.
“아니”
그렇게 멋없게 고백을 하고, 서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갖게 된 이성과의 관계에 나는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성과의 스킨십이 낯설었던 나는 손 한번 잡아주질 못했다. 그녀는 답답했는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어쩌면 그렇게 당차고 단순했던 그녀라서 나와 결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혼을 결심했고, 그녀의 부모님에게도 나의 과거를 부분적으로 알렸다. 그래야만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셨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크게 반대를 하셨다. 우리는 어려운 시간들을 지냈다. 설득도 해보고, 기다리기도 해보고, 두 분의 마음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너무도 완고하셨던 두 분은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하셨고 신앙 안에서 우리를 향한 소망을 발견하시고 마침내 결혼을 허락해 주셨다.
결혼식을 마친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동성애자로서만 살며 동성 상대와만 성관계를 맺어왔기에 이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결혼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드디어 첫날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역시나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 몸은 이성과의 관계를 낯설어 했다. 나는 남자로서 속이 상했고, 아내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마음과 생각이 돌아왔다면 육체도 반드시 따라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라고 나를 위로하며 끝까지 믿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믿고 기다리며 얼마 지나지 않아 충만한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다. 나의 몸은 정말로 아내를 향해 반응하도록 돌아왔고, 나는 그것이 동성과의 관계보다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동성과는 관계를 맺는 동안에도 후회스러울 때가 너무도 많았고, 관계 이후에는 오히려 더 허탈하고 스스로가 싫었는데, 아내와의 관계는 너무도 달랐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여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남자로서의 나, 그것을 즐거워하는 남자다운 나로 회복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동성애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동성애의 욕구도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양성애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절대 양성애자가 아니다. 탈 동성애자이다. 이전의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나의 목소리부터 얼굴, 몸집, 풍기는 분위기까지도 남성스러워진 것에 놀란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로서의 삶과 흔들리는 성 정체성, 또는 성적 지향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나는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탈 동성애를 위해 싸웠던 나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iministry@naver.com>
글 | 박진권
과거 15년 동안 동성애자로 살다가 주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현재 탈 동성애를 돕는 단체 <아이미니스트리>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현대교회음악 작곡을 전공하여 한국기도의집과 더크로스처치에서 예배 사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