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
2019-08-20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
월드뷰 08 AUGUST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
글/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항공기가 운항할 때 두 번 위기를 맞이한다. 한 번은 이륙할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착륙할 때다. 항공기는 이륙과 착륙만 잘 하면 하늘을 나는 시간은 큰 어려움 없이 운항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도 일생을 사는 동안 두 번의 생존의 위기를 맞는다. 한 번은 수정이 이루어진 때부터 배아(수정 후 8주까지), 태아(수정 후 8주부터 출산까지) 그리고 영아에 이르는 시기이고, 다른 한 번은 질병 또는 노화로 인하여 임종을 앞둔 일정한 시점이다. 이 기간 동안에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너무나 취약하여 자기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마저도 갖추지 못한 채 생명의 존폐 여부를 전적으로 외부인 – 의사, 간호사, 가족 등 – 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이 두 상황을 경계선상의 상황(the borderline situations)이라고 한다. 낙태, 시험관 수정, 줄기세포 추출, 응급 피임약 등과 같은 문제들은 생명의 시작점과 관련된 경계선상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안락사, 장기이식 등과 같은 문제들은 생명의 종결점과 관련된 경계선상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경계선상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생명 윤리 문제들을 판단할 때 가장 핵심적인 준거점이 되는 문제는 이 상황에 처한 생명들도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 생명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좀 더 정확하게 인간 생명의 시작점은 언제부터이며, 인간 생명의 종결점은 언제인가로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이 결정되면 이 구간 안에 있는 생명은 절대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윤리적 당위성이 확립된다.
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이 언제인가를 결정할 때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 시점의 불연속성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으로서 설득력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시작점의 경우에 이 시점 이전에는 살아있는 인간 생명으로서의 특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이 시점 이후에는 그 특징이 현저히 나타나야 하며, 종결점의 경우는 그 역이어야 한다.
둘째로, 인간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은 영혼이 그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 전제는 창세기 2장 7절과 스가랴 12장 1절을 참고하여 얻을 수 있다. 먼저 스가랴 12장 1절을 보자.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이 본문은 인간의 심령(루아흐) 곧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다음으로 창세기 2장 7절을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사람은 생물학적인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이 몸은 작동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코에 생기(니쉬마트)를 불어 넣으시자 그 때부터 ‘생령’(네페쉬 하야) 곧 ‘살아 움직이는 전인 – 몸과 영혼의 합일체 – 으로서의 인간’이 되었다. 생기(니쉬마트)는 곧 스가랴서가 말한 심령(루아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하나님은 심령을 창조하신 뒤에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에 불어 넣어 주셨고, 그 순간부터 사람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작동을 시작했다. 따라서 영혼은 ‘생명의 원리’라고 부른다. 인간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은 인간의 몸 안에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있다는 뜻이다.
셋째로, 한 번 창조된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실재한다. 신체가 작동을 중지하고 해체되어도 영혼은 신체와 함께 해체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계속하여 실재하면서 활동한다. 이 사실은 많은 성경 본문들의 뒷받침을 받는다(부자와 나사로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그 영혼이 계속하여 존재하면서 현세 안에 있을 때 자신들이 누구였고, 어떤 상태에 있었고, 어떤 환경에 있었는가를 안다(눅 16장); 욥은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후에도<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육체 밖에서<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나님을 보리라<살아서 인식 활동을 한다>(욥 19:26); 현세에서 바벨론 왕을 섬기던 신민들이 지옥에서 나중에 들어온 바벨론 왕을 알아보고 조롱한다(사 14:10,11) 등).
이 세 가지 전제 안에서 생명의 시작점과 종결점을 알아보고 이 지식이 생명 윤리의 실제 문제에 대한 판단 방향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알아보자.
생명의 시작점과 윤리적인 적용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살아 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자기복제와 단백질 생성을 해야 하는데, 이 작용이 시작하는 시점으로서 유일하게 적절한 시점은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하나뿐이다. 수정 이전에는 이 두 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이 두 작용이 자동적으로 시작된다. 이 논점 하나로 이미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논쟁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생명의 시작점은 수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수정란설).
유전학적 관점은 수정란설을 강화한다.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 생식세포의 유전자는 모계에서 온 염색체와 부계에서 온 염색체 간의 유전자 교환, 두 번에 걸친 위치 교환(2의 23승≒840만×2) 등으로 천문학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가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유전자 구조가 안정된 후 이 구조는 영구적으로 유지된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임신 순간부터 출산 때까지의 태 안의 생명체를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 간주해 왔다(시편 51:5에 보면 다윗은 임신 순간의 자기 자신을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를 가리키는 ‘나’라는 대명사로 호칭한다 등). 임신 순간은 생물학적으로 정밀하게 말하면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변적 생물학(이성적 추론을 통하여 전개하는 생물학으로서 고대 희랍 사회에서 성행했다. 사변적 생물학이 가능했던 근거는 인간의 이성적 추론은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신념이었다)에 근거하여, 남아는 임신 후 40일째 되는 날 합리적 영혼이 들어오고, 여아는 90일째 되는 날 합리적 영혼이 들어온다는 이른바 ‘40일-90일 설’을 주장했다. 이 주장이 유대교와 탈무드에도 영향을 주어 유대교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임신설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40일-90일 설’을 주장하여 중세 천년 동안 유지되다가 루터와 칼빈이 성경으로 돌아가 임신설을 주장했고, 고배율 현미경의 발달로 정자, 난자, 수정 과정이 관찰되면서 임신설은 수정란설에 다름 아니라는 해석이 서구의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다. 가톨릭교는 19세기에 피우스 9세가 아퀴나스의 ‘40일-90일 설’을 낡은 사변적 생물학이라고 비판하고 임신설을 채택하였다.
최근에는 초기 낙태를 허용하려는 의도로 임신 후 2-3개월 무렵에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하거나(뇌파설), 초기 배아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적 욕심 때문에 수정 후 14일째 되는 날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하는(원시선설: 원시선이 x레이 선상에 거무스름하게 포착되는 시점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삼는 입장) 주장이 등장했으나 이 시점들은 그 이전과 이후를 다르게 보아야 할 이유 곧 이 시점들이 불연속점임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수정란설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채택하면 어떤 판단이 나오게 되는가? a. 배아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치료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전자치료는 95%를 상회하는 높은 실패율 때문에 배아 살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b. 배아로부터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배아 줄기세포 추출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배아 살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다만 성체 줄기세포 추출은 배아 파괴가 뒤따르지 않으므로 허용 될 수 있다. c. 시험관 아기 시술은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관에서 수정하여 자궁에 착상시키는 과정의 높은 실패율 때문에 생성된 배아를 살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d. 임신 후 전 기간에 걸쳐서 낙태는 모두 금지되어야 한다. 다만 태아의 생명권과 임산부의 생명권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임산부에게 치명적인 질병이 있어서 태아에게 위험을 끼치는 수술이나 약제 복용이 불가피한 경우, 자궁 외 임신 등)에는 임산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태아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 e. 성교를 가진 후 복용하여 수정을 차단하는 사후 피임약 혹은 응급 피임약은 이미 수정된 배아를 죽일 수 있으므로 금지되어야 한다.
생명의 종결점과 윤리적인 적용
생명의 종결점은 육체적 죽음의 시점을 말한다. 육체적 죽음의 시점은 영혼이 육체를 떠남으로써 육체의 생물학적 작용이 전면적으로 정지되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론이 등장했다.
첫째는, 대뇌의 기능이 정지된 시점을 죽음의 시점으로 정하고자 하는 입장(대뇌사)이 있다. 인간의 지성 활동과 운동 기능을 관장하는 대뇌의 기능이 정지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율신경계를 관장하는 소뇌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혼수상태의 환자의 경우는 대뇌의 기능에는 문제가 있으나 소뇌는 살아 있는 경우다. 죽음의 시점을 대뇌의 기능 정지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혼수상태의 환자를 죽은 사람으로 정의하여 연명 장치를 제거하여 가족과 의료진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a. 인간의 영혼은 뇌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대뇌가 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영혼이 존재와 활동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대뇌의 상태 여부와 상관없이 영혼은 존재하며 활동한다. 다만 대뇌의 기능 이상으로 영혼이 대외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다. b. 대뇌가 기능이 정지되어도 소뇌가 살아 있으면(혼수상태의 환자) 신체는 신진대사와 피의 순환 등 생물학적인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영혼이 신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c. 혼수상태의 환자가 의식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임상적으로 검증이 되었고, 혼수상태의 환자는 회복될 수 있다. 따라서 대뇌사는 생명의 종결점이 될 수 없다.
둘째로, 소뇌의 기능이 정지된 시점을 죽음의 시점으로 정하고자 하는 입장이 있다(뇌사). 그러나 대뇌에 이어 소뇌의 기능이 정지되어도 10일 가량 신체의 자율신경 활동이 유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은 영혼이 신체 안에 머물러 있는 기간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뇌사는 생명의 종결점이 될 수 없다. 뇌사를 죽음의 시점으로 정하려는 시도는 사체 장기 적출을 보다 안전하게 시행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죽음의 시점을 심폐사로 정하면 사체로부터 장기를 적출할 수 있는 시간이 통상 몇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반면에, 뇌사로 정하면 적출 가능 기간이 많이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체 장기 적출도 안전 요건을 갖추면 윤리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에 장기 적출의 필요 때문에 죽음의 시점을 앞당길 필요는 없다.
셋째로,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되어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피의 순환이 정지되는 시점을 죽음의 시점으로 정하는 입장(심폐사)이 있다. 심폐 기능이 정지된 후에도 세포의 잔여수명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단백질 생성과 자기복제가 정지되기 때문에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은 정지된 것이다.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이 정지되면 영혼이 몸을 떠났다는 뜻이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 17:11)라고 단언함으로써 피의 활동 여부와 육체적 생명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심폐사는 가장 적절한 생명의 종결점이다.
심폐사 이전의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안락사 금지). 혼수상태나 뇌사 상태의 환자도 영혼이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자의적으로 연명 장치를 제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