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젠더 담론, 기독인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019-08-15 0 By worldview

동성애·젠더 담론, 기독인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월드뷰 08 AUGUST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한효관(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대표)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은 한국 사회에서도 서양과 같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터부시했던 것을 시작으로 윤리,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다가, 2013년 초기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및 그 해 말 김조광수의 동성 결혼 합법화 퍼포먼스, 군대 내 동성 간 성관계 허용 주장, 학생 인권 및 지자체의 각종 인권조례 제정 및 지속적인 추진 등 법과 제도까지 바꾸려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사로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편, 학교 현장에서 동성애를 넘어 ‘남녀의 성별’이 생물학적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기에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는 소위 ‘젠더(gender) 이론’을 교육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 실체를 하나하나 파악할수록 큰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젠더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하나 소개하자면, 최근 학교 성 교육 위탁기관의 강사가 성별은 ‘남과 여’라고 말한 학생에게 “그렇지 않다. 수많은 성별로 이뤄졌다.”라고 위탁 기관의 강사가 강요한 사례가 발생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은 담론 수준이고 소수의 일탈로 보이지만 서양에서는 이미 법제화되어 ‘성별은 남과 여, 2가지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생을 징계할 정도로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동성애는 찬성, 반대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일련의 주장들은 언어도단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동성애 반대 = 동성애자 저주 = 혐오, 차별’이라는 프레임을 짜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해 그에 반하는 표현이나 발언, 행동 등 일체의 것들을 규제, 처벌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평등, 다양성, 공감 등 온갖 그럴싸한 수식어들을 붙여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정작 자신들에 반하는 자들에게는 철퇴를 가하겠다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동성애 활동의 목적은 부당한 정책과 제도와 법 등에 관한 것이며 결코 ‘사람’을 공격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그들이 동성애를 비롯한 성의 해체가 진정한 해방(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의 배경은 무엇일까? 과연 그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자신들의 신념을 펼치려는 것일까?

동성애와 연관된 담론은 법과 교육 등의 현상적 문제 뒤에 윤리, 종교, 사상, 철학적 문제로 이어지고 과학적, 의료 보건적 문제까지 연결되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번 글의 목적은 동성애와 관련된 어떤 하나를 선택해서 파고들기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소위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형국인데 자신의 담론이 어느 위치인지 알면 불필요한 논쟁이 없어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성애 = 죄’라는 담론이다. 죄(sin)를 윤리적 종교적 입장, 법과 제도에서는 처벌하고 규제해야 할 (범)죄(crime)라는 입장으로 구분한다면 대화가 발전적일 것이다. 또 반동성애 진영은 ‘성 과학’이라는 용어를, 친 동성애 진영에서는 ‘성 문화, 성 심리’란 용어를 즐겨 쓴다는 것도 주목해 주었으면 한다. 성별의 구별을 DNA와 염색체, 호르몬 등 ‘과학’으로 생각하는 입장과 ‘자신이 성별에 대해 인식하고 표현’ 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심리, 문화’적 입장으로 보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이다.

필자는 동성애와 젠더 이데올로기 담론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과학‧의학·보건 등 객관적 담론. 둘째, 윤리·종교·철학(사상) 등 주관적 담론. 그리고 셋째 문화‧정치·법률·교육 등 삶의 담론이 그것이다. 세부 담론적 주제를 표로 정리해 보았다.

 

 

1. 객관적인 담론, 가능한가?

 

논쟁에 있어 각자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과학적인 자료와 객관적 통계 자료를 내세우는 것이다. 동성애와 젠더 담론에 있어서도 먼저 언급했듯이 ‘성 과학’으로 접근하냐, ‘성 심리’로 접근하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선 동성애에 대한 정의부터가 그렇다. 필자는 동성애의 기준을 ‘성적 행위’까지 포함해야 담론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호모마니아들은 ‘행위’가 아닌 ‘정서적 관계’에서 멈추려 하지만 이것 또한 위장술이다. ‘이성애’에 빗대어 꼭 성적 행위를 포함해야 하느냐고 반론하는데 필자의 주장을 말하기 전에 흥미로운 점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성애’에 대한 정의는 ‘성적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동성애’를 ‘심리적, 정서적’으로만 정의를 내린다면 친구 관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군대 내 전우 관계 등도 ‘동성애’라고 주장하게 되더라도 할 말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나아가 동성애자 비율을 조사하는 설문 문항으로 ‘동성에 대해 이성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라며 ‘성적 행위’를 감추어 통계를 낸다면 수용할 수 있겠는가? 동성애자 비율이 인구의 1.1%에서  10%까지 천차만별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호모마니아들은 흔히 ‘동성애는 선천적이며 변할 수 없기에 확산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성애의 선천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근거는 없다. 흔히 DNA 유전자 염색체, 호르몬, 쌍둥이 일치성, 두뇌의 크기 등으로 선천성을 확인하려는 수많은 연구와 노력들의 시도는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거나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왔고 유의미한 결과라고 내세운 것도 번복되었다. 한편 최근 들어 호모마니아들이 ‘선천성’의 주장을 뒤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젠더 이론’ 영향 때문이다. 젠더 이론 자체가 ‘성별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사회 문화적으로 습득된 것이기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어찌 선천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호모마니아들은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타고난 선천성’을 택할 건지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것인지… 그래야 담론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동성애 성향은 변할 수 없다.’는 명제도 ‘동성애의 선천성’을 전제로 했을 때만 담론이 가능하며 그들이 추앙하는 ‘젠더 이론’으로 바라본다면 그 명제는 틀린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젠더 이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필자는 주변에서 ‘동성애자’ 못지않게 ‘탈(脫)동성애자’들을 종종 만나왔다. 호모마니아들은 ‘원래 그들은 동성애 성향이 없었다.’거나 ‘그들은 뒤로는 동성애를 계속하면서 겉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항변하는 것은 그만큼 탈 동성애 담론을 두려워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탈 동성애 = 전환 치료 = 혐오, 차별 행위’란 프레임을 짜놓고 탈 동성애를 갈망하는 동성애자들을 상담하는 것조차 법적 제제를 통해서 규제하고 처벌까지 하려고 하는 등 ‘변할 수 없음’을 사수하려 몸부림친다.

동성애와 보건적/에이즈 담론에 있어 호모마니아들은 ‘동성애와 에이즈의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수많은 공식적인 자료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 동성 간 성관계 시 일정 기간 동안 헌혈에 제한을 왜 두는지도 주목해 보면 에이즈와의 연관성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각국의 보건 당국은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뿐 아니라 다른 질병의 발병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알리며 경고하고 있다.

 

2. 심리적·주관적 담론, 어디까지 가능한가?

 

‘남과 여 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수 십 가지의 성별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라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객관적 근거는 오로지 ‘그런 생각을 하는 개인이 존재한다’라는 것뿐이다. 그 개인이 ‘생각대로’, ‘마음대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기를 희망하면’ 그렇게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다수의 배우자를 갖는 것, 동물과 성관계를 갖거나 결혼하는 것, 심지어 어린아이와 에로스적인 관계(소아성애)를 갖는 것 등 소위 성 소수자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을  타당하다고 말하는 객관적인 근거는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행복감(해방)을 느낀다’라는 것뿐이다. 여기에 덧붙이는 근거가 고작 ‘우린 그렇게 태어났고 어쩔 수 없다.’라는 또다시 ‘선천성’의 주장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런 주장들은 그럴싸한 전문가의 입과 각종 논문으로 포장되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다. 소아성애 담론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미국 심리학회(APA)를 비롯하여, 하버드 정신건강회보, 독일의 25년 된 성 의학 전문가 들은 ‘소아성애도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선택이 아닌 본능이기에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아가 영향력 있는 대중 강연 프로인 테드(TED)에 나온 일반인들까지 같은 내용으로 강연을 할 정도이니 소아성애 담론에 있어 그것은 ‘죄’라고 할 경우 ‘혐오적인 반인권 표현’이라고 규정짓고 동성애 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규제하고 처벌하자는 주장을 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이런 개인의 ‘생각대로’, ‘마음대로’의 인간 중심적 사고와 삶의 추구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세력은 종교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호모마니아들에 있어 ‘동성애 하는 인간의 실존’이 우선이라면 동성애와 젠더 이론에 거부감을 느끼는 일반인이나 종교인들은 ‘그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 또는 신의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보편적 질서’를 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인류의 존속과 발전은 남과 여의 결합과 그 후손으로부터 출발한다’라는 것과 ‘자석의 성질에 있어 N 극은 S 극과 끌어당기고 N 과 N, S 와 S는 밀어내는 것이 당연하며, 동양의 음양설에 빗대어 남(+)과 여(-)의 결합이 순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 아닐까? 간혹 N 과 N, S 와 S도 자석의 성질을 없애고 접착제 등을 사용하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인위적인 것이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한편, 그런 자연의 질서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했고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 종교적 담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담론은 ‘문자적 해석, 광신적 근본주의자’로 낙인찍고, 나아가 ‘교회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반 동성애 운동을 활용하고 우파, 보수 세력과 연합하여 그들의 정권 쟁취 및 유지에 조력한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그리고  호모마니아들 중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신이 ‘동성애’를 만들었으며 ‘동성애자도 사랑’하고 또 성경도 동성애에 대해 ‘죄’라 규정하지 않고 허락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재해석하는데 이것이 소위 ‘퀴어 신학’ 담론이다.

인간 소외를 벗어나 참다운 해방(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사상가들의 진단과 해법은 다양하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성애/가부장적 중심 가족의 해체, ‘오르가슴을 충만케 하기 위한 성 해방, 비정상의 정상화,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남녀의 성별의 해체 등등… 그런데 이런 해법들은 결코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없다. ‘퀴어 신학’과 같이 ‘인간의 뜻대로’와 ‘신의 뜻대로’의 타협점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자신의 성별을 ‘인식과 표현’만으로 결정, 그것도 남녀를 넘어 수 십 가지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라는 주장을 마주친 필자는 마치 “네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는 속삭임이 느껴졌다.

한편, 현대 사상의 흐름을 한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해체’와 ‘(재)구성’이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해체하면 대안은 무엇일까? ‘생각대로, 마음대로 상상하라. 그대로 될지어다.’라는 믿음이 과연 다음 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까?

위와 같은 담론을 마주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솔직히 필자는 호모마니아들의 마구 쏟아내는 수 십 가지 젠더 이데올로기의 용어를 익히는 것은 둘째 치고 읽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데 그들만의 리그로 놔두거나 지나치지 않는 것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3.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동성애와 젠더 이론이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언어 사용의 변화를 지적하고 싶다. 엄마, 아빠란 단어도 사용하지 못하며, 그(he)와 그녀(she)란 단어도 사용하지 못할 수 있고, 사랑의 의미에서 ‘남녀’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다.   또 학교 교사는 성별 호칭 사용의 작은 실수로 인해 해고될 수도 있으며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인데 자신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성 탈의실을 활보하며 여성 스포츠 경기에서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얻어터질 수 있음을 목도할 수도 있다.

이 밖에 또 다른 삶의 요소가 많지만 지면상 다 제쳐두고 ‘교육’과 ‘법 제정’의 영역을 언급하고 싶다. ‘교육’은 없던 생각을 갖게 하고, 기존의 생각들도 새로운 생각으로 바꿔준다. 현재 학교 내 성교육에 있어 국가 차원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있지만 호모마니아들의 집요한 요구로 언제 급진화될지 모르는 형국이다.

소돔과 고모라.

한편 ‘법’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들도 강제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인권기본법), ‘혐오표현금지법’등을 통해 호모마니아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어긋나는 표현과 행위들을 강력한 규제로 처벌하려는 정체성 정치의 일환임을 주목해야 한다.

기독인으로서 우리는 ‘생각대로, 마음대로’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 ‘신의 뜻’에 거역하는 일들에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런 세대라면 본받지 말아야 하며 그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몸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 10명조차 없어 멸망했다는 것이다.

<ecozzang@hanmail.net>

 

글 | 한효관

주식회사 한마음에듀와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건사연) 대표이다. 또한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 실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