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 작전과 하나님의 역사하심
2019-06-26인천상륙 작전과 하나님의 역사하심
월드뷰 06 JUNE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
최영섭(예비역 대령,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
6‧25전쟁 발발의 배경
나는 그때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한강 바로 앞에서 불타는 서울을 본 것이다. 그 당시 영등포 길에 있는 육군들은 총을 들고 있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며 희희낙락했던 기억이 난다.
스탈린은 아시아를 공산화시키기 위해 장제스가 지배하고 있는 중국을 먼저 공산화 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만 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스탈린은 공산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한국에 지원 사령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자, 일본은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판단을 한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 및 소련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으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위태롭게 채결되었던 불가침 조약은 일본의 전세가 기울어지자 너무나도 쉽게 깨져버렸다. 마침내 소련이 8월 8일 연합국에 가입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한국의 독립군은 미국과 연합하여 만주에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전투를 하는 사이 38도 경계선을 그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에 지원 사령부를 만들고 공산 국가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지시를 하기 시작했고, 지시 하달을 위한 지원책으로 김일성을 앞세우게 된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서 활동한 첩보 부대인 88여단에 속해 있었는데, 여단장은 주진모라고 하는 중국인이었다.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을 포함하여 300명 정도가 한국인이었고, 그중 100여 명이 여성이었는데 가장 미모가 뛰어났던 김정숙이라는 인물이 이후 김일성의 부인이 된다. 결국 김일성을 대위로 진급시키며 소련의 앞잡이 역할을 시키게 되는데, 그 후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 장군’은 평양 사람들에게 독립군 장군으로서 추앙받게 된다. 그렇게 인민 공화국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것이 남과 북의 분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1949년에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서 남침을 감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남쪽에는 미군이 버티고 있었고, 위쪽으로는 중국에 아직도 장제스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침 계획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대신 총과 대포, 비행기와 함께 20만 대군을 지원받은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가게 된다. 그 후 1950년 3월 말경 김일성이 다시 한 번 스탈린을 방문하여 지원받은 병력을 가지고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으니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한다. 당시 미군의 많은 병력이 본국으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중국은 1949년 10월 무렵에 이미 통합되어 공산화가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 방어선을 한반도 바깥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세 가지 상황을 기반으로 스탈린은 북한의 침략 전쟁을 허락하게 된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후 모택동에게 가서 전쟁 허락을 받아냈고, 추가로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중공군 4만 명을 더 지원받았는데 장제스와 전투를 했던 중공군 4만 명이 인민군 옷으로 갈아입고 대기 중이던 북한군과 합세하여 남한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유엔 참전과 하나님의 도우심
당시 자료를 보면 한국군의 병력은 10만 가량이고, 북한군은 20만 가량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한 군인은 제대로 훈련을 받은 군사도 아니었다. 전투기도 북한은 132대인데 반해, 남한은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탱크도 북한은 242대인데 반해 남한은 한 대도 없었다. 그 결과 전투 시작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이후에도 남한은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가 휴가 중이던 트루먼에게 전화를 걸어 “중국과 북한군이 남한에 쳐들어왔다는데, 남한은 인구 대비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트루먼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연락을 한다.
이미 서울이 함락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맥아더는 남한이 전부 함락 당하게 되면 전 세계가 공산화되는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20일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온다. 이미 지난 번(월드뷰, 2018년 10월 호)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맥아더 장군은 200년 전 프랑스군과 영국군 사이의 퀘백 전투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해 준 것이다.
6‧25전쟁 당시 유엔 가입국은 66개국이고, 독립된 국가는 91개국이었다. 그중 남한의 편에 서서 군대를 보낸 나라가 16개국, 의료 지원을 보낸 국가가 5개국이며, 물자 지원 등을 보낸 국가를 합하면 총 67개국이다. 어떻게 이 작고 작은 나라인 남한의 편에 67개국이 서게 되었는가?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는 이 기막힌 상황은) 지구상에서 공산 국가들만 빼고는 거의 다 우리를 지원 한 셈이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보좌하심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건국의 단계에 도달하기도 전에 6‧25전쟁에서 이미 망했을 수도 있다.
나 같은 늙은이는 그것을 처음부터 모두 보고 겪었다. 구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할 일이 무엇이냐? 네가 겪었던 것들, 네 조상들이 겪었던 것들, 이런 것들을 자손에게 잘 나눠 지켜야 하는 것이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나는 흥남 철수 작전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흥남 철수 작전의 주역은 10군단의 아몬드 사령관이고, 북한의 기독교 신자들을 살리려고 애쓴 분이 의사인 현봉학 선생이다. 그분은 의학 공부를 하던 시절 김일성의 동생과 공부를 같이 해서 김일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현봉학 선생은 6‧25전쟁 당시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처음에는 미군 통역으로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남한군 해병대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인생의 약 70~80%가량은 자신이 세운 목표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 같다. 현봉학 선생도 그런 경우인데, 처음에는 통역을 해달라는 미군 제독의 부탁을 받고 통영에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생겨 고향땅인 함흥에 있는 교회를 미군 장교와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모두 울고 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미군이 떠나고 중공군이 들어오니 자신들은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미군 장교는 “이러다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부 죽는다. 저들을 구해야겠다.”라고 하며 상부에 이들의 철수에 관해 보고하였다. 하지만 철수에 쓰일 배가 없었고, 육군의 김배길 장군이 “민간인이 철수를 못하게 되면 남은 우리 병사들도 걸어서 내려가겠다.”라고 하자, 어렵사리 배를 지원받아 민간인 10만, 병사 10만, 총 20만 명의 철수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흥남 철수를 방어하기 위해서 미군 해병대가 중공군과 전투를 펼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한다. 이러한 시련들 가운데에서 흥남 철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지금도 거제도에 가면 김배길 장군의 기념 공원이 있으며 공원의 중앙에는 김배길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그곳에 “친일 김배길 장군 척결”이라는 문구와 함께 장군의 동상 곁에 ‘김배길 장군 친일 행위 단죄비’가 세워졌다. 믿을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만 사천여 명을 싣고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그 피난민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있었다. 그 덕분에 그가 태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
중공군의 개입과 하나님의 역사
중공군이 개입하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서울을 내어주고 37°선까지 내려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4후퇴이다. 평택, 안성, 울진이 37°선 근처에 위치하는데, 그렇게까지 후퇴를 하게 된 이유는 중공군이 막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남한의 지원에 대해 고민하던 12월 말 경, 영국의 애틀리 수상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다. 그리고는 “김일성이 남한을 쳐들어올 때는 영국에서도 군대도 보내고 합심했는데, 지금은 중공군이 합세해서 쳐들어왔다. 이것은 다른 전쟁이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남한을 지원하고 있는데,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스탈린이 프랑스와 영국으로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방어할 여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겠다. 프랑스와도 이미 합의했다.”라고 밝힌 것이다. 트루먼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여러 차례 회의 끝에 안보국에서는 ‘한국을 버리자’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을 포기한다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과 군인의 가족들, 공무원과 공무원의 가족들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자국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미국은 총 100만 명 정도의 인원을 제주도로 보내기 위한 후퇴 작전을 극비리에 진행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유엔에서는 중공군에게 대여섯 번씩이나 휴전 제의를 했으나, 매번 거절당한다. 만일 중공이 그때 유엔의 휴전 제의에 합의했다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37°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고,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인천 상륙 작전
미국 정부는 맥아더에게 상황을 지켜보면서 방어를 하다가 뚫리면 철수하라는 지시를 하기 위해 CIA 국장, 미 육군 참모총장, 정보 국장을 한국에 보내는데 맥아더는 이미 그들이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과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는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서는 당연히 그 의견을 반대했다. 북진하던 중인 12월 23일, 맥아더의 오른팔이던 워커 중장이 전선 시찰을 하러 가던 도중 의정부에서 우리 육군 차량과 부딪혀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맥아더는 급히 후임을 세웠는데, 그가 바로 육군 참모 차장이던 리지웨이 장군이다. 크리스마스에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에게 참모 총장은 지켜보고 안 될 것 같으면 철수하라고 지시하지만 리지웨이는 “나는 후퇴하고 도망만 다니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내가 도착하면 중공군과 싸우겠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수색대를 결성해 중공군과 전투를 펼쳐 중공군 수천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리지웨이가 반격 작전을 실행한 것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리지웨이가 한국에 왔을 때는 이미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본국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전선 시찰 도중 “모두 준비되었는가?”라고 병사들에게 묻자, “네! 후퇴 준비 전부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병사들에게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러 온 것이 아니라, 정부 명령이라 이곳에 온 것이다. 지키는 것은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지휘관, 사령관들을 모두 전방으로 옮겨 놓았다.
중국의 손자병법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적을 알지 못하면 필패다.’ 우리는 중공군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도망갈 생각만 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공군이 군 사령부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10~12월 다수의 전투로 인해 7만 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2만 명이 동상에 걸려 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으며, 병사들은 체력이 전부 떨어져 있다. 사기는 떨어질 데로 떨어져 있으며,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유엔군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다 보니 후퇴할 생각만 하게 된 것이다. 정보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도 전투를 실행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리지웨이가 특별 수색대를 결성하여 큰 승리를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수원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 맥아더 장군은 리지웨이를 만나서 “리지웨이, 내가 받은 생일 선물 중에 이렇게 큰 것은 없다. 고맙다.”라고 했다. 그 후 리지웨이는 맥아더에게 편지를 한통 보냈다. “수리산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점령한 후 한강을 점령하겠다. 다만 한강은 넘지 않겠다. 왜냐하면 한강을 넘으면 뒤쪽은 전부 강이 되고, 만일 적의 계략에 걸려 포위를 당하게 될 경우 후퇴를 하지 못하고 전멸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편지를 보고 맥아더가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았다. 당신의 판단이 옳다. 당신의 전략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그렇지만 서울 점령은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외교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김포 비행장을 점령하면 군수 지원과 물자 지원이 바로 된다.” 이 편지를 받은 리지웨이는 한강을 점령하려는 맥아더의 의중을 알게 된다. 그 후 맥아더는 2월 10일 170명을 모아서 꿈에 그리던 인천을 우리 해군과 점령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상륙 작전이다.
맺음말
그동안 살아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떠한 결심을 하거나 결정을 하여도 하나님을 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6.25 전쟁이 벌어진 바로 그날, 동해에서 대한해협 전투를 했을 때에도 기본적인 작전은 정동진, 강릉, 삼척 등지에 쳐들어온 인민 공화국 군대 3~4천 명을 격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쪽으로 가던 도중 수평선에 연기가 보인다고 해서 대한해협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만 해도 석탄을 연료로 하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가 다니는 곳에는 항상 연기가 나게 되므로, 굳이 연기를 내뿜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쫓아갈 이유가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쫓아갈 수밖에 없는 마음과 환경을 조성해 주시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25 전쟁 중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대한민국을 보호하셨다는 증거가 곳곳에 있다.
이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오늘날 존재하는 것이다.
글 | 최영섭
1928년생으로 일본 동경 시립 제2 중학교(우에노)를 졸업하였다. 1947년 월남 후 해군사관학교 졸업하였으며, 백두산함 갑판사관(소위)으로서 대한해협 해전 및 인천 상륙 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백두산함 함장과 충무함 함장, 그리고 51전대 사령관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예비역 대령 및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