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중 부산에서 있었던 회개 집회
2019-06-26
월드뷰 06 JUNE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글/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실체였던 6‧25 동란 중 피난지 부산에서 회개 집회 혹은 회개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때의 모임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누구의 주도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때의 정황에 대해 여러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6‧25 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일어났던 회개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1) 회개와 부흥의 역사라는 점에서 이 글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1. 6‧25 사변
1950년 6월 25일 가랑비가 내리던 새벽 4시 40분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업은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 집단은 북한군 7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 특수 독립 연대 등 총병력 11만 1천여 명과 소련제 T-34 탱크 등을 앞세워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다.2)
남침한 북한군은 침략 당일 11시 포천을, 26일 오후 1시에는 의정부를 점령하고 개전 3일 만인 28일 11시 30분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30일까지 3일 동안 서울에 체류했다. 이들이 계속해서 남하하였다면 7월 5일에서 10일 사이에 부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문 것은 남한에서 폭동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폭동이나 후방 교란이 없자 김일성은 진격을 명했고, 7월 4일에는 안양을, 6일에는 안성과 평택을, 20일에는 대전을, 25일에는 김천과 영동을 점령했다. 8월 31일에는 온양, 예산, 장항, 군산, 광주, 목포, 순천을 점령하고, 일부는 남원, 구례, 하동을 거쳐 진주로 진격했다. 진주에서 부산까지는 국군이 없었으므로 3일이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었으나 인민군 6사단은 진주에서 3일 동안 먹고 자고 놀았다. 만일 인민군들이 마산, 창원, 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쳐들어왔다면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국군과 미군은 인민군이 공격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전차와 중포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서 빼내어 마산에서 인민군 6사단과 한 달 이상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인민군 6사단은 인천 상륙 작전 때 포위되어 포로가 되거나 괴멸되었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민군 4사단은 전북과 경북을 휩쓸고 영산을 점령한 후 밀양을 공격하면서 부산을 위협했다. 9월 4일에는 인민군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했다. 곧 마산, 영산 (대구 위쪽의), 다부동, 안강, 포항까지 점령될 최대의 위기였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국군과 정부 요인 등 10만 명을 괌으로 철수시킬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9월 11일 국군 8사단이 영천을 탈환했다. 국군 8사단 21연대가 전멸하는 혈전을 치르며 사수한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1950년 9월 13일 일본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佐世保) 항과 부산항에서 유엔군 군함 260척과 7만 6천 명의 병력이 인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인천 상륙 작전을 막을 수 있는 수원의 인민군 18사단을 왜관으로 이동시켰다. 결정적인 작전의 실수였다. 후에 김일성은 이 작전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박헌영과 남로당원 5만 명을 숙청했다. 유엔군은 9월 15일에는 월미도를 기습 상륙하여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다음날 인천을 탈환했다. 5천 분의 1이라는 성공 확률을 딛고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월미도와 인천을 장악한 유엔군은 서울로 진격하여 시가전을 전개하며 인민군을 소탕하고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을 탈환했다. 이를 보통 ‘9‧28서울 수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서 피난지 부산에서는 목회자들의 기도와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
2. 회개 및 구국 기도회
전쟁이 발발하자 피란 행렬이 이어졌고 부산은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갔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하게 되자 8월 31일에는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남한 면적의 10%를 제외하고는 거의 북한군이 점령해 국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된 날이 8월 18일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 부산의 인구는 50만 명 정도였으나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한다.3) 수많은 목회자들도 부산으로 몰려와 부산은 ‘의의 피난처’가 되었다. 부산의 교회들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교회 마당은 피난민들의 천막이 세워지고 임시 거주지로 변했다. 예배당, 교육과 사택들도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만이 아니라 부산시 광복동 1가 7번지에 위치하고 있던 고려신학교 교사도 피난민 수용소로 변해 있었다.4)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목사와 친분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해방 후 교회 쇄신 운동을 지지하던 이들이 주로 회집했고, 부산 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회 목회자들, 그리고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서 회개와 자성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기도회 혹은 구국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가 서울이 함락된 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부산과 그 인근 지역만이 적의 수중에 놓이지 않았던 위난한 때였다.
이때의 기도회를 ‘회개 기도회’, ‘회개 운동’ 혹은 ‘구국 기도회’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피난 온 성도들, 그리고 피난 교역자들이 포함된 회개 집회 및 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름 그대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 달라는 ‘구국 기도회’였다. 전자의 경우 중심 지역이 초량교회였고, 후자의 중심 교회가 부산 중앙교회였다. 물론 이 두 기도 운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전시 하에서의 기도회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한 기도가 제외될 수 없었고, 구국 기도회에서 회개와 자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중심지였다. 당시 경남지사는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였는데, 그는 250여 명의 교역자들에게 초량교회에서 거처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초량교회에서 기도 집회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초량교회 담임이었던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 등은 초량교회에서 전국 피난민 교역자들을 위한 집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주 강사는 피난해 온 박형룡, 김치선과 박윤선, 한상동 목사 등이었지만 오종덕, 이학인 목사 등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그러나 중심 인물은 박윤선이었다. 이곳에서의 집회가 개최된 때는 1950년 8월 말이었다. 집회 시간은 일주일로 하되 새벽 기도, 낮 성경 공부, 저녁 집회로 진행되었다. 고려신학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던 이들은 자기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의도로 생각하고 참석을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으나 점차 많은 이들이 집회에 참석했다.5) 이 집회의 모든 경비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부담했다.6)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켜야 복을 받아 강성하여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면할 수 있다”라고 설교했다. 한상동 목사는 이 설교를 통해 신사 참배의 죄, 해방 후의 교권 다툼, 한국 교회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또 한 사람의 설교자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보수주의 신학자 박형룡 박사였다. 이때 그가 설교했던 11편의 설교문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7) 그는 이미 7월에 초량교회 낮 예배 설교자로 초청받은 바 있는데, 회개 집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또한 회개를 요청하고 회개만이 살길이라고 설교했다. 6‧25동란은 우리 민족의 교회가 범한 죄에 대한 진노의 칼이라고 믿고 있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어 우상을 철폐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성전에서 예배하던 우리 성도들이 일본의 강제적인 명령이었기는 하지만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악이었습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된 때에도 이 대 범죄에 대한 반성과 통회의 태도가 희미했기 때문에 사분오열 분파되어 교회의 혼란이 심하여지니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8)
이 당시 설교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이 신사참배의 죄와 해방 후 한국 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인식이었다. 비록 손양원은 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9월 28일 순교자의 길을 가게 되지만, 그가 체포되었던 9월 13일 수요일, 설교하려고 작성해 두었으나 설교하지 못했던 원고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에도 동일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상되어 있었다.9)
이 집회에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고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때의 집회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였고,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는 참석한 교역자들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가장 큰 회개는 신사참배의 죄였다.10) 박윤선 목사의 설교가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도전을 준 것이다. 이때의 집회에 대해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날 새벽 기도회 담당이었던 나는 설교 도중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대해, 즉 그가 총회 석상에서, 만주에서, 옥중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였다.”
그리고는 한부선에게서 들은 그의 신사참배 거부, 장로교 제27차 총회 시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항의, 만주에서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 이렇게 했을 때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사실을 듣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역자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져서 그 집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11)
실제로 이날 박윤선은 공적으로 회중 앞에서 자신이 신사참배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약신 목사도 비록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본 경찰에 의하여 억지로 신사에 참배했던 일을 회개했다. 기도회를 인도했던 부민교회 담임인 이학인(李學仁) 목사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면서 회개하면 산다며 기도회를 인도했다. 여기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고 회중은 소리를 높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이때의 회개 집회는 1907년의 대부흥의 때와 유사했다. 온갖 죄악이 고백되었고 회개의 눈물이 회중을 압도하였다. 양 떼를 버리고 도망친 죄, 금전상의 범죄, 우상을 숭배한 죄, 7계명을 범한 죄 등을 고백했다.
원래 기도회는 1주일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집회의 연장을 원했다. 그래서 집회는 일주일 연장되었고 이때는 부산만이 아니라 울산과 온산 지방 교역자들도 합류한 가운데 계속되었다.12) 부산 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박형룡은 이곳에서도 강사로 활동했다.13) 초량교회에서의 약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나는 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초량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던 박성기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14) 기도회가 끝나는 날 신문 호외가 배포되었는데,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호외였다고 한다.
3. 인천 상륙 작전
초량교회에서의 기도회와 부산 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는, 전 국토가 침략자의 수중에 들어가고 부산과 인근 지역만이 남이 있는 절박한 상태인 8월 말 시작되었고 10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도회는 초량교회와 부산 중앙교회 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해운대에서도 소규모로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부산 송도에서 한경직 목사는 밥 피얼스(Bob Pierce) 목사와 협력하여 4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특별 부흥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기도회가 진행되었는데, 초량교회에서의 경우 2주간의 회개의 역사 후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이 작전의 성공은 전세를 급격하게 반전시켰고, 승기를 잡아 9‧28 서울 수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1950년 8월 23일 일본 동경에 위치한 미군 극동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긴급 비밀 회동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설명하자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과 셔먼 해군 참모총장이 이를 극구 말렸다. 백전노장의 두 지휘관이 볼 때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은 무모한 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의지는 단호했다. 사실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려면 상륙정 LSD가 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접근하려면 수심이 9미터가 넘는 만조 때만 가능했다. 인천 앞바다의 만조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뿐이었다. 그래서 성공률은 5천 분의 1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확신을 가지고 작전을 추진했다. 미군은 9월 15일 상륙 작전을 숨기기 위해 “10월 중 반격, 유엔군 준비 진행 중”이라는 허위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미 공군은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군산 인근을 맹폭격하고, 9월 12일에는 특수 부대 5백여 명을 군산 해변에 침투시키기도 했다. 적의 관심을 인천에서 멀게 했다. 이를 감지하지 못했던 북한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방어할 수 있는 수원의 인민군 18사단을 왜관으로 이동시켰다. 결정적인 작전의 실수였다. 이런 덕분에 미군은 9월 15일 새벽 6시 미군 함정 261척과 영국, 호주 등 18척, 한국 15척,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 육군 해병대와 17연대 등 7만 5천명의 전투병이 인천으로 진입하게 된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B-29를 비롯한 각종 폭격기의 지원 아래 261척의 함정, 7만 5천 명의 유엔군이 총공세로 인천항을 향해 돌진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때의 여세를 몰아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했고, 계속 북진하여 10월 19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상륙 작전은 2주간의 회개의 집회 후 얻은 성공이었다.
4. 전세의 변화는 회개 기도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그리고 이를 통해 전세의 격변은 기도회의 결과인가? 이것은 역사 해석의 문제인데, 작전의 성공이 기도와 회개의 결과로 얻은 승리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방법도 없다. 단지 믿음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작전의 성공과 전세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기도와 회개의 결과라고 믿었다.
박윤선은 양자 관계를 연계하여, “우리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되었다”라고 보고 있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 승전(勝戰)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라고 보았다.15) 박형룡의 입장도 동일했다. 그는 작전의 성공과 서울 수복은 회개와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위험 이 고난에서 우리가 구출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고 돌아보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물론 유엔군의 도움과 국군의 공로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을 오게 하고 국군을 일으켜 세운이가 하나님이시며 그들에게 용기와 기회를 주어 승전하게 한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보답하여야 합니다.”16)
이런 인식은 거의 당시 집회에 참석했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부산에서의 집회와 기도회 이후, 인근 울산과 온양에서도 집회를 개최했고, 거기서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후에는 제주도 서부 교회당에서도 피난민 교역자들을 위한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paxsglee@hanmail.net>
1) 이상규, “고려신학교에서 일어난 회개와 부흥,” 「부경교회사연구」18 (2009.1), 57-73.
2) 6.25 동란 발발 시 국군은 10만 5천752명이었고, 북한군은 남한의 두 배에 가까운 19만 8천380명에 달했다.
3) 1951년 1월 24일 현재 부산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64만 3천 명 정도였으나 피난민 수는 217만 3천 명에 달했고, 1951년 3월 5일 현재 부산에 온 피난민은 581만 7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부산 중구청 자료에 의함.
4)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영음사, 1992), 101,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5년사>(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1996), 98.
5) 박윤선, 102, 허순길, 99.
6) 미래한국신문 편집국, <한국역사를 움직인 기도>(서울: 언약, 2007), 119.
7) 이때의 11편의 설교문은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제18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을 생각하라”(167-174쪽), “파선인이 취할 길”(175-182), “사랑의 모순성”(183-189), “그리스도의 애덕과 겸덕을 사모하자”(190-194), “은사의 마음과 선지자의 마음”(195-200), “수난자의 경건”(201-209), “포도원의 노래”(210-214), “소성의 비결”(215-220), “예수는 왜 죽으셨나?”(221-225), “성도의 새 환경”(226-229), “복 있는 자의 생활”(230-234) 등이다.
8)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제18권, 171,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356.
9) 손양원은 애가 4,5장을 본문으로 “한국에 미친 화벌(禍罰)의 원인”이라는 설교문을 남겼는데, 그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잡히던 9월 13일 수요일 저녁 설교할 원고였다. 설교하기 전에 체포되어 설교되지 못한 설교문이 되었다. 안용준 편, 31-39.
10) 박윤선, 102.
11) 박윤선, 106, 박윤선은 하나님은 회개, 회개운동을 기뻐하신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이때의 회개를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박윤선,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 「파수군」55(1956. 9), 9-15], 그 내용은 자신의 자전 기록인 <성경과 나의 생애>, 102-106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12) 이때의 집회에 대해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인서는 “부산초량교회60년사”라는 글에서 “6,25 동란 중 3년간 피난동포를 부조(扶助)하는 중 2차에 걸쳐 수백명 교역자를 일당(一堂)에 소집하고 20여일 간 숙식을 지공(支供)하여 가면서 극난수양회를 열었습니다.” 「신앙생활」12/6 (1953), 29.
13) 박형룡은 초량교회 부산 중앙교회에서 설교했고, 10월 8일에는 부산진교회에서 설교했다.
14) 2014년 5월 6일 면담.
15) 박윤선, 107, 박윤선,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 <파수군>55(1956. 9), 15.
16)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제18권, 242.
글 | 이상규
고신대학교와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신학대학(PTC)에서 수학하고 호주신학대학(ACT)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미국 칼빈대학, 메노나이트연합신학대학(AMBS), 호주 매쿼리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올해의 신학자상,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고신대학교 교수,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석좌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