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국가관과 양심적 병역 거부

2019-06-26 0 By worldview

기독교인의 국가관과 양심적 병역 거부

 

월드뷰 06 JUNE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글/  이상원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공정성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 24:20).”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이 두 절은 이른바 “동해보복법(동일한 상해(傷害)나 배상(賠償)의 원칙을 적용한 일종의 처벌법)”으로 알려진 내용으로서, 신약과 비교하여 구약의 열등성을 주장하거나 기독교의 잔인성을 비판할 때 인용하는 본문들이다. 루터교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그리고 평화주의자(pacifists)들은 구약과 신약의 시대의 차이를 말하면서 구약은 동해보복법이 적용되던 시대이고 신약은 동해보복법의 차원이 극복된 사랑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같은 해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성경 그 자체에 의하여 쉽게 논박된다. 동해보복법을 명기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 안에 이미 사랑의 두 강령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첫 번째 강령은 신명기 6장 5절에 있고,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연결된 두 번째 강령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모세의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이 두 강령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이다. 따라서 “구약은 동해보복법의 시대요, 신약은 사랑의 시대”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의 대강령과 동해보복법이 모세의 율법 안에 나란히 함께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이 두 가지 원리가 동시에 필요했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의 강령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적인 원리였다면, 동해보복법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특히 국가가 재판을 시행할 때 필요한 원리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생활의 인간관계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태도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국가가 재판을 할 때는 동해보복법의 원리에 따라서 판결을 내려야 했다. 말하자면 동해보복법은 공정한 재판의 원칙을 구상적(具象的)인 언어에 담아 천명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눈’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면 ‘눈’에 상응하는 형벌을 공정하게 부과하고, ‘이’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공정하게 부과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해보복법이 국가가 시행하는 공정한 재판의 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동해보복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서로 다투다가 상대방이 나의 눈을 상하게 했는데, 이 원리에 따라서 상대방의 눈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구도는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로마서 12장 14절부터 21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왜 기독교인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을까? 원수를 갚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아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직접 갚아 주실 것이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께 넘기고, 기독교인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만일 원수 갚는 일 그 자체가 악한 일이라면 하나님이 이 일을 떠맡으시지 않았을 것이다.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원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두 당사자 사이에서 한 편이 다른 편에게 부당한 해악을 끼쳤다는 뜻인 바, 이 해악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원수를 갚아 주시는가? 이어 나오는 로마서 13장 1-7절이 그 답을 준다. 하나님이 억울한 일을 당한 자의 원수를 대신 갚아 주시는 중요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가 기관이 지닌 사법권(롬 13:4 이 말하는 ‘칼’)의 행사다.

결국 신‧구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보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공동체는 사랑을 규범적 원리로 하여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국가는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사법권의 행사를 비롯한 국정 운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원수를 사랑하여 원수가 범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본받아서 국가도 국민이 범한 죄를 처벌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엄정하고도 추상과 같이 재판을 해 주어야만 교회와 개인이 마음 놓고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국가의 공정한 재판은 개인과 교회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이처럼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에게 그가 속한 교회에 주어진 소명과 국가에 주어진 소명이 각각 다르다. 여기서 필자는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과 교회를 한 묶음으로 묶었는데,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과 교회의 삶의 영역은 그 소명이 또 다르며 이 다름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과 교회를 한 묶음으로 묶은 것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공적 사회(the public society)와 사적 사회(the private society)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현대 사회 철학 혹은 현대 사회 윤리의 사회관을 타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가정이나 교회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사적 사회에 소속되어 있을 때 따라야 할 행동 원리와 국가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을 때 따라야 할 규범적 원리가 달라져야 하는가? 그렇다!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가정이나 교회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때는 통상적으로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지만, 국가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때는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공과 사는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장로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장로가 집안에서 가족들을 대할 때나 교회에서 성도들을 대할 때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일단 판사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서면 공정성의 원리 곧, 동해보복법의 원리에 따라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문제는 어떤 원리로?

 

그러면 이제 전쟁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전쟁은 어떤 원리에 의거하여 다루어야 할까? 전쟁은 한 개인이 수행하는 일이 아니며 교회라는 사적인 기관이 수행하는 일도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은 통상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마땅하며, 교회도 사랑과 평화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전쟁은 개인이나 교회가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국가가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이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수행해야 한다. 전쟁이 국가가 수행하는 일이라는 말은 전쟁의 문제는 사랑이라는 지도 원리에 따라서 그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기보다는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그 정당성 여부를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쟁의 문제를 평화와 사랑의 원리에 의거하여 정당성 여부를 평가하는 평화주의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국민들에게는 국가의 징병 요구가 있을 때 이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회원인 동시에 국가의 일원이기도 한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이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군대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적과의 전투에 참여해야 하고 이 전투에서 적군 살상이 불가피하다는 데 있다. 기독교인은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쟁이 정당한 전쟁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정당한 전쟁이라면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부당한 전쟁이라면 국가의 요구라 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다.

정당한 전쟁의 조건은 첫째로, 적국이 부당한 이유로 침공을 해 와서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방어 전쟁이라야 하고, 둘째로, 공격전이라 하더라도 악을 제거하고 선을 증진시킨다는 대의명분이 분명한 대의 전쟁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한 방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며, 히틀러의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연합군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것은 정당한 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나 통치자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타국을 침략하는 침략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다. 독일 나치 정권이 일으킨 2차 세계 대전이라든가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등은 부당한 침략 전쟁이다.

정당한 전쟁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것인가?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이 제6계명을 범하는 행위라는 이유를 들어서 모든 형태의 전쟁을 반대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제6계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한 것이다. 제6계명은 모든 형태의 살인을 금하는 명령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락’이고, 다른 하나는 ‘라싸’다. 하락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합법적인 살인을 뜻하며, 라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불법적인 살인을 뜻한다. 제6계명에서 사용된 동사는 라싸다. 따라서 제6계명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불법적인 살인을 금하는 계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당한 전쟁에 참여하여 불가피하게 살인을 행하는 것은 제6계명이 금지하는 행위가 아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

 

그렇다면 종교적 소신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살인 행위에 참여할 수가 없고, 따라서 징집 자체에 불응하는 국민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 국민들에 대한 처리 방법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대체 복무규정을 마련하는 방안이 논의되어 왔다. 앞에서 이미 충분하게 밝힌 것처럼 정통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병역의 의무에 응하는 것이 바른 판단이다. 이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은 병역 의무 수행을 천칭의 한쪽 접시에 올려놓고, 양심적 병역 거부/대체 복무를 천칭의 다른 쪽 접시에 올려놓았을 때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역 의무를 병역 거부/대체 복무로 대신하는 것이 공정한가 하는 것이다.

병역 의무의 특징은 매우 큰 희생과 위험 부담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대상은 젊은이들이다. 군 생활은 젊은이들이 가장 건강하고 미래를 위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를 비생산적이고 고된 훈련과 집단생활 속에서 보내는 것인데, 이런 시간은 값으로 계산하기 힘든 엄청난 희생을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군 생활은 항상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 것을 예상해야 하며,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신의 목숨을 잃을 위험이 상존하고, 전투 중에 부상이라도 입게 되면 일생이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적인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처럼 희생과 위험 부담이 크다 하더라도 모병제의 경우에는 본인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선택한 것이고 또한 일정한 보수가 지급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징병제 하의 군 생활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가장 소중한 황금과 같은 젊은 시절을 허비해야 하고, 천하의 어떤 가치와도 맞바꿀 수 없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희생과 위험 부담에 상응할 만한 대체 복무가 과연 존재할까? 필자는 그런 대체 복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대체 복무도 군 생활이 젊은이에게 주는 희생과 위험 부담을 상쇄시킬 수 없다.

군 복무가 지닌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군 복무의 부과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철저하게 공정한 방법으로 부과되어야 한다. 이 공정성이 깨지면 심각한 위화감과 심리적인 불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다양한 편법을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자녀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와 같은 희생과 위험 부담 때문이 아닌가? 모든 부모의 마음은 동일하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자식들을 군에 보내며, 군 생활을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애타는 시간들을 보내는가? 그러다가 전쟁이나 사고로 전사하거나 죽어서 유해로 돌아오면 평생 마음에 한을 안고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신자들 모두 희생과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종교가 주장하는) 대체로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종교적 논리에 근거하여 병역 거부를 법으로 정당화시켜 주고, 병역 의무 수행과는 희생과 위험 부담의 정도에 있어서 필적하기 어려운 대체 복무로 전환시켜 주는 것은 정의론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되기 어렵다. 또한 종교적 신념은 얼마든지 가공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있다. 종교적 신념이 가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진실한 것인지를 평가할 기준도 능력도 없는 국가가 병역 거부/대체 복무를 국법으로 제도화해 놓으면 많은 젊은이들은 당연히 그 법에 의지하여 병역 의무를 회피해 가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차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국가의 안위는 그만큼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병역의 의무를 공정하게 대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 전 국민적 합의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를 국법으로 허용하는 문제는 더 깊은 연구와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톤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