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2019-06-26기독교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월드뷰 06 JUNE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글/ 백승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나라론
기독교적 관점에서 국가 또는 정치 질서에 대한 이해를 체계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시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세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의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작 중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나라’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의 나라’의 두 나라 시민권(dual citizenship)을 갖고 있다는 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 중 어느 것에 대한 사랑으로 지배되고 있는가에 따라 각자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여부가 구별된다. 즉, 다양한 체제들의 특징을 그 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 그 대상의 특질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한 두 나라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 땅 위의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물론 기독교회가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누구든, 또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인간은 교회에 출석해 그 구성원이 될 수 있으나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닌,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이 땅에 현세적,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세속적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존중되고 행사되고 작동되는 그런 나라이다. 기독교인들이 ‘천국’으로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어떤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는,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 아래서 그 뜻에 순종하며 살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그런 상태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 나라는 총체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또 앞으로 사랑하게 될 모든 사람들을 다 포괄하는 영원한 사랑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나라나 제도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들이 동시에 이 땅의 나라의 구성원이 되기도 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들 두 나라는 서로 뒤섞여 있으며, 최후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이들 두 나라와 그 구성원들은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누가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의 진정한 시민권이 두 나라 중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것은 오직 그의 영혼의 경향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오직 하나님만 아는 일인 만큼, 현세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 역사적 또는 제도적 연관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단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세속 국가의 관원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도 진정으로 소속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한 ‘두 나라론’의 교의는 결과적으로 현세적 국가에 대해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충성도를 느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국가들 간에 위계질서를 세울 수 있긴 하지만,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될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런 교의에 함축되어 있는 근본적 가르침은, 어떤 시민도 그가 속한 정치 공동체, 즉 현세적 국가에 대해 받을 자격이 입증되지 않은 충성심을 절대적으로 바쳐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을 단순히 거쳐 지나가는 순례자들인 만큼, 실제로 역사상 존재하는 국가들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 고대 로마제국을 비롯해서 현대 어떤 특정 국가의 시민이 되거나, 그곳에서 어떤 지위를 달성하거나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두 나라론의 교의에 담긴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 공동체뿐이다. 그 나라는 비영토적 특질을 갖고 있는 공동체인데, 그 초월적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지상 국가의 필요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국가는 오직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필요하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통제돼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통제 목적에 가장 좋은 수단이 국가이다. 국가, 사유 재산 제도 등은 인간이 갖고 있는 죄성의 결과이면서, 또한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결코 선이 아닌 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악이다. 국가는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국가의 기원과 특성에 대한 그의 이러한 분석이 국가가 전적으로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땅의 나라와 역사 속의 현존 국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이 땅의 나라는 의(義)를 결여하고 있는데 반해, 역사 속의 현존 국가는 실제로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들이 이 땅 위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갈 동안 그들에게 질서 유지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질서와 권위의 근원으로서 국가는 인간의 필요에 명백히 부응하는 것이다. 그 필요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평화인데, 국가가 제공해 주는 평화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여하튼 순수한 평화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은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데 대해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독교도들의 자유에 대해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한, 그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들에 대해 복종하고 또 지지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정당한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한, 크리스천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은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 권위의 절대성 문제
정치와 종교, 두 영역 사이를 구별하고자 하는 근대적 관점에서는 인간에게 공적 인간의 영역과 사적 인간으로서의 영역이 있다고 본다. 법률 준수와 세금 납부 등 이 땅의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공적 영역의 일이고, 교회 출석, 신앙생활 등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사적 영역의 일이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는 일찍이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태 22:21)에서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가르침은 국가의 권위에 절대성 내지 궁극성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현세적 범주에 속하는 정치적 차원의 일과 함께 초월적 범주에 속하는 종교적 차원의 일이 한 인간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동시에 중첩되어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땅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법률 준수와 세금 납부 등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한편, 신실한 신앙의 자세로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이 땅 위에 그 스스로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하라거나, 또는 행할 필요가 없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를 모두 해야 하되 그러나 그 둘은 구별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 18:36)”고 한 것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를 의미하는지, 즉 이 세상 나라들과 다른 영적 차원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인간 삶을 단차원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관점과 달리, 인간 삶에 다차원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정치를 공적 영역의 일로, 종교와 신앙을 사적 영역의 일로 간주하는 것은 17세기 정치사상가인 존 로크(John Locke)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로크에 이르러 종교는 순전히 사적 차원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중세 초기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서 볼 때, 다차원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국가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별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한 부분―즉 영혼―은 세속적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를 지배하려고 하는 세속 권력의 지배권에 대해 인간 영혼은 절대적 복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의 존재성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특별한 관련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현실 정치 참여
초기 기독교도들뿐만 아니라 그 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도들은 대체로 각기 그들 시대의 긴박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무관심한 채, 기존 체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묵종(말없이 남의 명령이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것)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두 나라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사회 문제들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고, 어떤 특정 입장을 택하거나 하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자주 목격된 현상일 뿐, 그 이전엔 별로 발견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개신교 목사들이나 가톨릭 신부들이 시민운동에 뛰어들거나, 시위‧집회에서 거리 행진을 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급진적 정치 운동에 앞장서거나 적극 지지하거나 하는 것 등은 모두 오늘날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기독교회의 새로운 변화된 입장과 형태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운동들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마침내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마음에 두기 시작하여, 압제 세력들과의 투쟁에서 그들에 의해 억압받고 짓밟힌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런 급진적 행동은 “근대 기독교회가 점점 더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거나, “기독교회가 사회 문제들보다 영혼 구원에 오로지 혹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무시하는 증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익숙한 하나의 경구인, 크리스천은 “이 세상 안에 거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in this world but not of it)라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 육체적으로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정신, 마음, 그리고 영혼은 어느 곳인가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엽의 시대에 한 국가의 틀과 범주 안에서 기독교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인간에게 정치와 정부를 거부하고 그것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으나, 정치를 공동체적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는 광의의 차원에서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정치는 인간이 사회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정치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려는 공동적 노력과 시도를 펼쳐 나감으로써, 역사의 장(場) 속에서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서 그 존재를 형성, 유지하고 실존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정의(正義), 즉 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삶을 가져다주는 공동선의 실현 문제와 관련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결사체를 구성하기로 의견이 일치함으로써 사람들이 모여 결속한 하나의 유기적 결합체를 의미한다. 그 결속 범주가 한 민족 단위에서 이뤄진 것일 수도 있고, 여러 종족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룬 것일 수도 있다. 국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여기서 의미 있는 정의는 한 정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결집되어 살아가면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실존을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합적 차원에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세적 국가는 아무리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기독교 국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만큼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포함된 하나의 정치적 실존체로서 국가가 역사 속에서 존재하며 행위 하는 만큼, 그 국가에 대해서도 충성과 헌신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정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견해를 참고할만하다. 그에 의하면, 모든 국가는 그 시민들이 덕을 갖출 것을 필요로 한다. 그 덕이란 정치적, 군사적 탁월성을 의미한다. 국가가 바르고 건강하게 융성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시민들이 그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심지어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것을 포함하여 기꺼이 헌신할 것이 요구된다.
맺음말
만약 대한민국이 역사 속에 태어나거나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 구성원인 한국인들은 역사 속에 일체화된 정치적 실존의 족적을 더 이상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외세에 억압당하거나 또는 질서 없이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 구성원들이 비록 그 반만년 터전의 반쪽에서일지언정 한데 결집하여 정치질서의 한 형태를 창출해 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역사 속 실존을 드러내고 존속 유지하도록 가능케 한 하나의 매개체이자 결집체인 것이다. 이러한 존속과 유지를 가능하게 한 것에 더하여, 자유와 번영과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마치 기적처럼 이루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숱한 역경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역사적 실존을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의 모습이다.
<shbaek@khu.ac.kr>
글 | 백승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학(Louisiana State University) 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는 <서양정치사상: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정치사상: 중세>, <서양정치사상: 근대 초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