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기독교인들
2019-03-08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그리고 기독교인들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1 |
오일환/ 숭실대 초빙교수, 전 보훈교육연구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에서 3·1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무렵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집결한 민족 지도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1운동을 주도한 국내외 민족 지도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임시정부에 대한 논의는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3·1운동이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그해 3-4월에 걸쳐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인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가, 동아시아의 무역 거점이자 외교 중심지인 상해에서는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에서는 4월 23일 서울에 ‘한성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수립 주체나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전단으로만 공표된 소위 ‘전단정부(傳單政府)’도 더러 있었다. 전단정부의 경우는 ‘조선민국임시정부’(서울, 1919. 4. 10), ‘신한민국정부’(평안, 1919. 4. 17), ‘대한민간정부’(기호, 1919. 4. 1), ‘고려임시정부’(간도, 1919. 4) 등이 전단으로 선포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들이 3·1운동 발발 이후에 국내외 곳곳에 세워지다 보니 임시정부 수립이 마치 3·1운동의 당연한 귀결인 양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3·1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 임을 선언(宣言) 하노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명백히 선포한 것이었으며, 그렇다면 국가를 대표하고 운영할 정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3·1운동을 통해 표출된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한 곳으로 결집시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독립운동을 상시적으로 수행할 기구가 필요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3·1운동을 계기로 촉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총사령부’로서의 역할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민족의 주권을 스스로 회복하여 근대 민족국가(nation state)로서의 ‘민주공화국제’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실제로 상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3·1운동은 그 성격상 대외적으로는 항일운동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대내적으로는 미래의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국체(國體)로서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공화주의 운동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3·1운동 훨씬 이전부터 이미 민주공화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암중모색이 있어 왔다. 그러한 사실은 1907년에 출범한 비밀결사체 신민회의 <대한신민회 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서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임시정부가 3·1운동과 무관하게 이미 그 이전부터 계획되어 온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2개월 사이에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도 3·1운동을 임시정부를 세우는 좋은 기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이 봉기하고 불과 이틀 뒤인 3월 3일 <조선독립신문>(제2호)을 살펴보면, “일간(日間)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가정부(假政府)를 조직하며 가대통령(假大統領)을 선거한다더라”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 내용의 맥락으로 볼 때, 임시정부의 수립 계획이 3·1운동 준비와 동시에 논의되고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임시정부 수립이 3·1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그 이전부터 준비돼 왔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실제로 3·1운동이 준비되는 가운데 일단의 민족 지도자들은 국내외 독립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감당할 임시정부의 수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활동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8년 8월에 국제정세에 밝았던 여운형이,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로 고무된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등과 함께 청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신규식, 김규식, 서병호, 김병조, 김순애, 김구, 손정도, 이광수, 안정근, 한원창, 이유필, 양헌, 조소앙, 김갑수, 신채호, 문일평, 정인보, 조상섭, 도인권, 장붕, 임성업, 김인전, 최일, 이원익, 이규서, 신창희, 송병조, 백남규, 신국권 등 40~5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한청년당은 한국 독립의 정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당원들을 국내 및 노령, 만주, 일본 등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현지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3·1운동의 봉기에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서울의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상해에 전하고자 영어에 능통한 현순 목사를 외교통신원으로 파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3월 하순에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獨立臨時事務所)를 설치하고, 이동녕을 책임자로, 현순을 총무로 삼아 업무를 보았다. 이 사무소는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를 국제사회에 배포하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이 정세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대응책을 논하는 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이동녕은 이시영, 남형우, 신익희, 조소앙 등과 상의하며 임시헌장 10개조 초안을 마련하였고, 개정·증보를 거듭하였다. 한마디로 독립임시사무소는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산실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지에 파견했던 당원들이 3월 하순에 모두 상해로 되돌아오자 4월 1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마침내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에 위치한 회의장에 29명의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한편,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하였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들 가운데는 손정도, 이광수, 조소앙, 신채호,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여운형 등 9명의 신한청년당 당원이 포함되었다. 초대 국무원의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외무총장 김규식과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도 신한청년당 소속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1운동이 발발하고 두 달 사이에 나라 안팎에 조직된 임시정부들과 선언에 그친 ‘전단정부(傳單政府)’들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노령, 상해, 서울에서 수립된 각각의 임시정부는 지역적으로 분산된 상태였고, 이념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1국가 3정부 체제하에서는 민족의 역량을 결집시키는데 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세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시키지 않고서는 민족을 대표하는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나 일사불란한 독립운동 전개가 애당초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1국가 1정부라는 대원칙에 입각한 통합 임시정부의 모색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1개의 임시정부로 통합할 경우에는 어디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의 문제가 있게 마련이었다.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는 한국과 인접해 있어 독립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유리한 위치였지만, 일본의 대규모 공격에 노출돼 있었고, 한성정부의 경우는 정통성 확보 면에서는 큰 이점을 가졌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 가운데 사실상 국내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반면에 상해 임시정부의 경우는 거리는 멀었지만, 상해가 동아시아 외교의 중심지였고 프랑스 조계에 자리 잡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결국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상해 임시정부가 나머지 두 임시정부의 통합을 모색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세 임시정부의 통합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세 임시정부 간의 통합 논의는 5월 25일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하여 한성정부의 이승만,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의 이동휘,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의 안창호 자신을 포함하는 삼두정치(三頭政治)를 구상했다. 즉, 그는 ‘삼두(三頭)’의 통합과 함께 각지 대표들로 구성된 새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민족의 대표성을 갖는 단일의 임시정부로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창호는 각지에 있는 영수들을 상해에 모으는 일을 추진하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신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 직을 내려놓고 다른 분을 최고 지도자에 추대하겠다며, 6월 28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와 한성정부 사이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성정부로 통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 이유로는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임하였지만 그가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며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대신에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군무총장, 한성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선임돼 있어 대한국민의회 측을 설득하는 것이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할 경우, 미주,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분산된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임시정부 개조·승인 문제의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안창호가 기획한 통합과정은 성공적이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만 5개월 만인 9월 11일에 단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통합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이었다는 점이다. 먼저, 상해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있어서 크게 기여한 신한청년당의 당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당원으로 확인된 35명의 명단 가운데 여운형(전도사),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등 발기인을 비롯하여 김규식, 서병호, 김병조(목사), 김순애, 김구, 손정도(목사), 이광수, 조상섭(목사), 도인권, 장붕(전도사), 김인전, 이원익, 신창희, 송병조(목사) 등 모두 20명의 당원들이 기독교인이었다. 무려 57%가 기독교인었던 셈이다. 나머지 15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안정근 외에는 어떤 종교인지 확인이 어렵다.
한편, 임시정부 통합과 관련한 ‘삼두정치’의 세 인물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사실이다. 특히 안창호는 임시정부 통합과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는 직위보다 임시정부 통합의 사명을 더 중시하였다. 그는 통합 임시정부 출범과 함께 기존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서 물러나 국장급에 해당하는 노동국 총판의 자리로 옮겼다. 또한, 이동휘는 임시정부 통합에 합류하기로 결단을 내린 후 11월 27일 ‘간도한족독립운동 간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일 나는 차마 노령 주장을 고집하며 상해 당국 여러분과 정전(政戰)을 벌일 수 없습니다. (…) 동지 여러분, 나의 고충을 헤아리시고 나의 성충(誠忠)을 아신다면 나를 도와 나의 책임으로 전담하고 있는 민국 정부를 옹대해 주십시오. 나는 2천만의 부활을 위하여 동지에게 그것을 바라며 나는 우리의 대업 성공을 위해 동지에게 이 말을 올립니다.”라며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리는 담대한 선택을 했다. 결국 임시정부 통합은 자기희생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기독교인들은 3·1운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과정에 있어서 실로 큰 역할을 했다. 기꺼이 남보다 더 큰 의무를 지겠다는 ‘초과의무(supererogation)’ 정신의 발로였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면 그 공동체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 곧 공동체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iwoh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