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일제의 기독교 박해

3·1운동과 일제의 기독교 박해

2019-03-08 0 By worldview

3·1운동과 일제의 기독교 박해

 

월드뷰 03 MARCH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0

 

박종현/ 한국교회사연구원 원장

 

31 민족운동과 기독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3‧1운동의 역사적 개념을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 독립과 자존을 지향하는 역사적 대전환으로서 3‧1 혁명이란 개념으로 전환을 요구하는 시도도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기록된 것처럼 3‧1운동은 한국 근대사에 결정적이며 거대한 전환점이며 정신사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선각자들은 근대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근대화의 의지에 일찍 눈을 떴던 일본은 후쿠자와 유기치와 같은 이들에 의하여 근대 국민국가의 개념을 수립하였고 서구 국가들이 축적한 근대성의 체계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일본 특유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고 서구화를 지향함으로써 일본적 근대성을 수립하게 된다. 이 이념의 골격은 아시아를 벗어난다는 개념을 통해 서구화를 지향하였다.(수정필요) 그러나 여기에는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이웃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고 정당화하는 근본적 기제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소위 아시아 진출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일본의 표리부동의 이중적 태도를 실현하였다. 한 발짝 앞선 일본의 근대화는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의 절대적 우위의 내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일본은 늘 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며 외적으로는 아시아 국가를 서구 제국주의에서 보호한다고 강변하는 이율배반적 원리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와 함께 ‘흑풍회’와 같은 일본 극우세력의 발호는 동아시아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이미 메이지 유신이 심화되는 1870년대부터 기획되고 실시되었다. 1873년경부터 일본은 한국의 해안선 탐사를 비롯하여 지속적인 영해 침범을 일삼았다. 근대식 해군이 없었던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책동을 지켜보았고 그 결과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었다. 한결같이 일본은 외견상으로는 서구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하는 아시아 공영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속내를 드러내 1895년 대만의 식민지화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일제의 한국 침략이 단계적으로 가시화되는 시기에 전래됨으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제국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경험과는 달리 기독교가 민족운동 또는 민족 정서와 깊이 연대하며 기독교 민족주의와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의 근대성과 접목하는 기독교적 근대성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모델이 구현되었다.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을 통해 개국한 후 명치유신을 거치며 급속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하였고, 그 귀결이 대만과 한국의 침탈로 이어졌다.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치욕적인 개국을 강요당하며 반서구적 정신과 태도가 굳어졌다. 이와 달리 한국은 동일한 아시아 국가인 일본의 침략에 반일 민족주의적 골격을 가지고 개신교회가 뿌리를 내림으로 인해서 향후 한 세기 이상 기독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고락을 같이하며 때로는 민족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기독교와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결합이 이루어졌다.

 

일제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기원

 

1895년 청일전쟁의 종결과 민비시해 사건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하였다. 안중근은 일본의 이중적 태도 특히 아시아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실질적 침략자가 된 일본의 가식적 평화론을 주창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양평화론을 제시하지만 그의 쾌거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제적으로 고립된 한국은 1910년 한일합병을 당하게 된다.

합병과 동시에 일제는 영구적 한국 지배의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를 시도하게 된다. 그때 일제의 눈에 띈 것이 기독교였다. 일제는 먼저 1907년에 조직된 기독교인 애국단체인 신민회를 해체시키는 작업에 돌입한다.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의 활동을 추적하여 황해도 지역의 애국지사들을 대거 검거한 안악사건에 이어 더 전국적 조직인 신민회의 실체가 나타나자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하려 시도한다. 일제는 신민회의 중요 인사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초대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며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대거 검거하였는데 그중 105인이 실형을 받았고 이는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다.

연행되는 105인 사건 관계자

뒤이어 일제는 포교 규칙을 제정하여 종교 활동에 엄격한 규제를 가하였다. 모든 종교 집회를 사전에 관공서에 신고하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차단하고 교세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활발한 것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일제의 포교 규칙은 한국의 여러 종교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를 겨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1915년에는 1907년 통감부에서 이미 개정했던 사립학교규칙을 다시 개정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사립학교 설립과 인가를 까다롭게 규제하고 학교 내에서 종교 교육을 공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금지함으로써 기독교계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제한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의 억압이 집중된 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식민지 초기부터 3‧1운동 때에 있었던 교회에 대한 박해, 그리고 3‧1운동 이후 발흥한 기독교 민족운동에 대한 1930년대 후반의 탄압 그리고 일제 식민지가 종결되던 시기에 등장한 기독교인 신사참배 거부자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며 식민지 시대 내내 계속되었던 것이다.

 

 

31운동과 기독교 박해

 

1919년 3‧1운동 당시 1백만을 상회하는 신자를 가졌던 민족 종교인 천도교에 비하여 겨우 20만 명을 바라보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이 더 가혹한 시련과 박해를 당하였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민족사적 기여와 헌신을 기억하게 된다.

3‧1운동은 2천만 겨레의 민족 독립과 자존을 향한 하나의 거대한 용솟음이며 일치된 결단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3‧1 민족독립운동의 논거는 일본이 국민 국가를 설립하고 한국을 병합하여 하나의 국민이라는 미명하에 식민지를 삼았으나 하나의 국민이라는 일제의 주장은 십 년 동안의 약탈과 차별 그리고 폭력적 지배로 거짓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문화적, 정치적으로 일본에 속박 당할 수 없는 독립된 주체이고 인격체라서 반드시 독립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것이 당시 30여 개에 이르는 대한독립선언서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들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이어받아 한국의 독립이야말로 동양 평화의 진정한 기초가 되며 세계 평화도 결국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탁견을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1919년 3월 17일 러시아령 우스리스키에서 집결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조선국민회의 독립선언서는 국내의 여타 선언서와 다른 점을 보여주었다. 이 선언서는 일제의 약탈과 차별을 고발하는 한편 1910년의 105인 사건을 언급하면서 일제가 억압한 종교의 자유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독립된 조국이 반드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시대 인식이 매우 구체적이며 진전된 인식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훈춘에서 선언된 대한국민회의 독립선언서도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재중 국민회의 선언서로서 이 선언서 역시 105인 사건을 언급하며 일제의 종교탄압을 들어 식민통치의 폭력성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를 토대로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과 국제적 인정을 통해 동양의 평화와 세계 평화의 토대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1운동이 국내에서 활발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회와 기독교 학교의 역할에 가장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이었다. 3‧1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고르게 조직을 갖춘 것은 기독교회이거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이었다. 교세가 가장 컸던 천도교당도 교회의 전국적 분포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 결과 3‧1운동이 확산되는 동안 교회의 피해 상황은 널리 알려진 대로 교회의 파괴, 교인 검속 및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전파된 예배당이 17개 동, 부분 파손 24동, 약간의 파손이 41동, 교회 재산 손실 3만 불이었다. 종교별 기소자의 숫자는 총독부의 보고에 따르면 불교 72명, 유교 11명, 천도교 1,156명, 시천교 2명, 기독교는 장로교 1,154명, 감리교 290명, 조합교회 3명, 천주교회 18명 그리고 불명이 4명이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총회에 보고만으로도 장로교인 중 체포된 이가 모두 3,804명이었고 그중 목사와 장로로서 구금된 자가 134명, 기독교 관계자 202명, 사살 41명 등이었다.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체포된 이들의 숫자가 총독부의 6,417명을 훨씬 웃도는 19,525명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공식 보고서는 실제 피해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교회의 박해이다. 3월 31일 경기도 발안 지역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진행되었고 4월 초에는 천교도인들을 중심으로 주재소 두 곳이 파괴되었다. 일제는 일본군 보병 79연대의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병력을 이끌고 마을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전날의 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감리교회에 교인들과 마을 주민을 감금하고 집중으로 총탄 사격을 가한 후 모든 출입구를 차단하고 교회 건물에 방화하여 안에 있었던 사람 29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마을의 가옥 32채에 방화하여 전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암리교회 사건은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 진압 사건 중 가장 대규모로 저질러진 폭력적 만행이었다.

불타버린 제암리 교회

국내의 폭력 진압은 선교사들의 보고와 보도를 통해 외국에 알려졌고 이로 인하여 감시와 견제를 받았지만, 서북과 국외에서 이루어진 일제의 만행은 언론의 감시와 선교사의 시선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이고 장기적인 폭력으로 얼룩졌다. 서북 지역은 러일전쟁 후 일본군이 경의선 부설을 하면서 토지를 강제 수용하여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곳이라 3‧1만세운동의 시위도 강렬하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일제의 진압도 가혹하고 폭력적이었으며 서북의 강서사천교회, 정주교회, 강계교회, 위원교회 등지에서 일본 군경에 의한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간도 지역에서도 서간도의 각지 교회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사건이 있었고 북간도의 노루바위교회도 큰 피해를 입었다. 만세운동이 만주로 확산되어 펴져나가던 1920년 일본 관동군이 간장암(노루바위)이라는 이름의 한인 마을에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노루바위교회에 출석하는 32가구의 남자들을 체포하여 가족들 앞에서 죽이고 예배당을 전소시켰다. 그리고 마을을 방화하여 초토화함으로써 보복을 단행하였다. 노루바위교회 이야기는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일제의 잔혹한 박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노루바위교회 이야기는 이 지역을 순회하던 캐나다 선교사들이 목격함으로써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 뿐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3‧1운동 기간에 순교적 희생을 곳곳에서 감당하였다.

 

맺음말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자주와 독립,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의 원칙을 천명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가지고 이 만세운동에 기여하였고 한국의 여러 사회단체 중 가장 많은 사상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교회가 보여준 기독교 순교 정신의 가감 없는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선교 35년 만에 3‧1운동으로 민족사에 깊이 참여하고 기독교 본연의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늘의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형성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cuchi@hanmail.net>

 

박종훈 |

연세대학교에서 교회사로 Ph.D.를 받고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교목과 관동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 문화신학회 부회장이며 사단법인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한국기독교 역사와 기독교와 한국 문화 및 기독교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