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재한 선교사의 역할
2019-03-083.1운동과 재한 선교사의 역할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의 재한 선교사 인식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보도한 곳은 도쿄에 본사를 둔 미국인 벤자민 플레이셔(Benjamin W. Fleisher) 소유의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였다. 그의 첫 보도는 3월 3일자 ‘Trouble in Seoul over Yi Funeral’에서 광무 황제 장례식 예비 행사 때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하세가와 총독이 소란을 경고하는 공고문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3월 4일자 ‘Korean Students Indulge in Riots’에서는 서울에서 보내온 각종 통신을 인용해 3월 1일부터 일어난 수천 명의 만세시위운동을 ‘폭동,’ ‘소요’라는 명목으로 자세히 보도하였다. 그리고 광무 황제 죽음의 원인을 둘러싸고 근거 없는 루머가 돌아 한인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과 여학생을 포함한 기독교계 학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했으며 일본 경찰이 시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열풍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기독교계 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고 보도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처음부터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3·1운동 발발 원인을 언급하면서 유독 한국인 내부의 강렬한 독립 열망에 대해선 애써 무시하고 외인론(外因論)에 중점을 두었다. 외인론 가운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영향을 가장 많이 언급했지만 이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과 판단 능력을 갖춘 소수의 지식계층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연유로 우둔한 한인 민중들을 현혹해 선동시키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재한 선교사로 보았다. 그중에서 특히 미국 선교사를 지목하고 선교사의 개입 때문에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난 것처럼 주장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선교사의 체포로 이어졌다. 33인의 민족 대표 중 16명이 기독교계 인사라는 점과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주역인 학생층이 대부분 기독교계 학교 출신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선교사의 개입과 선동 없이 이번 거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호도했다. 아래의 내용은 선교사의 개입을 주장하는 조선총독부 전 외무부 책임자 미도루 코마추가 <호치> 신문에 밝힌 내용이다.
종전에 소요가 일어났을 때 이들 선교사들은 본인들이 이러한 분쟁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정부 당국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경고도 어떤 조언도 신도들에게 하지 않았고 모르는 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난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오히려 시위자들의 편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조선의 주인인 일본의 국익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기독교 포교활동에 있어서 미국 선교사들은 학교를 운영하고 아직 미개한 국민들에게 외국의 정치적, 사회적 사상을 보급하고 있다. 자유 원칙이 이들 사이에 무모하리만치 옹호되고 있으며 따라서 과격 사상에 지나치게 젖어있는 미개한 정신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 중에는 현명하게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선교사들이 조선인의 사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들 조선인은 뜻도 모르면서 지금 민주주의를 외치고 다니는 일본 학생들과 유사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조선인들이 과격한 행동에 의지해 비상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300,000명의 조선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일본의 합병을 못마땅해 하고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기치를 펼칠 꿈을 지녀왔다. (중략)
이러한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이나 응어리를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인의 가면을 쓰고 오늘날의 소요를 일으킨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외국의 선진 사상을 받아들일 만큼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그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수정하지도 않고 그러한 사상을 퍼뜨린 것에 대해서 그리고 소요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여학생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선교사들이 책임이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한편 일본 육군성의 고위 관리 중에는 “특정 나라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군중 뒤에 선동하고 있고 많은 기독교 학생들이 소요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선교사들이 ‘폭동’의 주역인 것처럼 호도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당시 일본 신문에 나타난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재팬 애드버타이저>는 일본 측에서 주장하는 선교사들의 3·1운동 개입설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조선 전역으로 확산된 3·1운동은 외국 선교사들과 무관하게 시작되었고 외국 선교사들은 한인들의 계획을 미리 알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시위가 시작된 후에도 지원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상당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참여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지각 있는 일본인들과 조선총독부 관리의 또 다른 발표 사례 등을 인용해 선교사와 3·1운동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수년 동안 연차보고서 업무를 담당했던 세이지 히시다는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혐의를 두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긴 해도 기독교 교사들이 조선인을 봉기하도록 선동하였다고 계속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 하고 선교사에 대한 비난을 진부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장은 선교사들이 최근의 소요를 미리 알지도 못하였고 어떤 공모도 없었다는 공문을 발표하여 재한 선교사들과 3·1운동의 관련성을 공식 부인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외사부장 히사미츠는 조선 내 외국인 거주자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에 유감을 표시하고 확실하지 않은 의심을 갖고 외국인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는 “일부 선교사들이 조선인에게 동정심을 갖고 격려할 수는 있어도 어떤 선교사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직접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라고 단정하였다.
<재팬 애드버타이저>가 선교사의 개입설을 적극 부인한 배경에는 3·1운동이 한국인들에 의한 자생·자발적인 독립운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재한 선교사들이 3·1운동의 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어도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Schofield)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미국성서공회 감리교선교사 벡(S. A. Beck) 등은 일본의 만행을 찍은 사진과 각종 자료들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 내 한국독립운동을 돕는 바람을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하여금 야만적인 식민통치 방식을 개선하도록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3·1운동에 대한 재한 선교사의 입장과 활동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사미는 3월 9일 재한 선교사(게일, 애비슨, 하디, 노블, 새록스 베른하이젤 등)들을 초청해 재한 일본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던 스미스 선교사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회합 목적은 한국 사정에 대한 선교사의 견해를 듣기 위함이었다. 우사미는 개인적으로 선교사들이 이번 3·1운동과 관련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3‧1운동에 선교사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여론을 전하며 사실상 선교사의 책임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참석한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양측의 견해가 팽팽하게 엇갈렸다. 이후 조선총독부와 재한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3월 30일까지 다섯 차례가 더 열렸으나 양측의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다.
재한 선교사들은 3·1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무자비한 식민통치 방식 때문이라고 지적하였고 3·1운동에 어떠한 개입이나 관여를 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조선총독부가 재한 선교사들을 통해 3·1운동의 여론을 통제하려 했던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통치 방식에 대해서는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엔 조선총독부 당국자에게 건의했으나 잘 통하지 않자 선교 본부를 둔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압력을 넣어 시정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캐나다 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mstrong)의 역할이 컸다. 동양관계위원회는 처음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으나 한국에서 보내온 재한 선교사들의 수많은 보고와 편지에서 나타난 3·1운동의 참상을 지나칠 수 없었다. 동양관계위원회는 일본 외무성(외무대신 야다)과 교섭에 나서 식민 통치를 개선하겠다는 확답을 받자 한국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그것이 1919년 8월에 발간된 <The Korean Situation>이다. 3·1운동에 대한 수많은 재한 선교사들의 보고와 편지 중 비교적 완화된 10%의 글만 추려서 만든 소책자로 총 34개 항목으로 된 일종의 3·1운동 보고서이다. 1920년 5월에는 두 번째 소책자로 <The Korean Situation> 을 발간해 3·1운동의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고 일본 정부의 식민통치 개혁을 다시 한 번 촉구하였다.
한편 국내에선 재한 선교부의 연합단체인 재한선교사연합공의회가 1919년 9월 연례회의에서 진정서를 작성해 조선총독부에게 보냈다. 진정서의 내용은 종교의 자유가 실행되어야 할 것과 전도 사역, 교육 사역, 의료 사역, 문서 사역 등 6개 분야 총 20 항목의 개혁을 촉구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결론에서 일본의 3·1운동 탄압 만행을 규탄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로 보면 재한 선교사는 국내외에서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확인하고 이를 강압적이고 무법적으로 진압하는 일본 당국의 식민통치 방식의 시정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재한 선교사들의 역할과 가치
재한 선교사들의 시정 촉구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배후에 있는 세계 여론을 의식해 경계하고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재한 선교사들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가지고 있는 역할과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다. 때문에 새로 부임한 사이토 조선 총독은 1919년 9월 중순경 우치다 외무대신을 비롯해 일본 정부 요로에 보낸 「최근에 있어서 조선의 정세」라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선 통치에 대하여 위험한 것은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이다. — 더욱이 금년 3월 소요 사건 때 우리 관원의 행동에 비인도적인 행위가 있자 빈번히 비난 공격하고 이를 각국에 선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 그러므로 금후 우리 관원은 누누이 그들과 접촉하고 그 오해를 풀어 감정을 융화시킴으로써 우리 시정의 공명정대함을 알리고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품도록 방책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이는 향후 재한 선교사를 비롯한 재한 외국인들을 향해 조선총독부의 회유 공작이 집요하게 이루어질 것을 시사하는 보고이며 그만큼 재한 선교사들의 활동과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3·1운동 과정에서 재한 선교사들은 독립운동 일선이나 배후에 어떤 개입이나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한 선교사들이 그동안 한국에서 보낸 선교 활동만 가지고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당국은 이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3·1운동 시기 재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비교적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최근에 확인되고 있는 미국 언론의 무수한 3·1운동 관련 보도들을 보면 재한 선교사들의 배후 역할을 결코 무시하거나 폄하할 수 없다. 이들이 있었기에 3·1운동이 국내 독립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 발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hongsp6054@naver.com>
한양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연구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1987년부터 2018년 12월 말까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책임연구위원으로 근무하였고 지금은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공군역사자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