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장로교의 참여
2019-03-063·1운동과 장로교의 참여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
이상규/ 백석대학교 교수
3‧1운동과 기독교
‘기미독립운동’ 혹은 ‘삼일만세운동’으로 불리는 ‘삼일운동’이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서,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개성 등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일제의 폭압정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2월 1일(음력 1919년 1월 1일) 만주 지린(吉林)에서의 무오독립선언, 2월 8일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 3.1독립선언의 배경이 된다.
3.1만세운동 당시 조선 인구는 1,679만 명이었는데,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연 인원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거사에 가담하였고(조선총독부 기록에는 만세운동 참여자가 106만 명이었다), 전국 218개 부, 군 가운데 212개 부, 군에서 1,491(1,542) 건의 시위기 일어났다.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4월 말 이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지만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학살된 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된 자는 46,948명에 달했다. 이 박은식의 통계는 계산상의 착오가 있어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많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서 한국의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인은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2.1 무오독립선언을 주도했던 김규식, 김약연,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이시영 등은 기독교인들이었고, 2.8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백관수, 서춘, 최팔용 등 9명(서명자는 11인이었으나 2명은 일본에 없었음) 전원이 기독교 신자였다. 2.8독립선언의 실제적 배후인 백남훈(白南薰, 1885-1967)은 장로교인으로 동경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였고 독립선언에서 신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해 2월 간도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지린의 기독교 여성들이 발표한 것이었다. “의리의 전신갑주를 입고 신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무퇴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일어나면…”과 같은 문구는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의 모방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외에서의 준비단계에서만이 아니라 국내에서의 거사 준비, 시위의 전개 및 실행 단계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만세 운동을 점화한 민족대표 48인으로 산정할 경우에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6인의 기독교인 외에도 김도태(명신학교 교사), 김세환(삼일여학교 학감), 김원벽(연희전문학교 3학년), 안세환(평양기독교서원 총무), 정노식(재일 유학생), 함태영(법관 목사) 등이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이 경우에도 50%에 해당하는 지도자들이 기독신자들이었다. 3월 1일의 서울과 평양 등 9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만세 운동은 김양선의 지적처럼 기독교회가 주동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만세 시위 또한 대부분 교회 중심이었다.
만세 운동에서 주동 세력이 뚜렷한 지역이 311개 처인데, 기독교 주도가 78개 지역, 천도교가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작 지역이 42개 지역으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만세 운동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만 내지 22만 명으로 조선 인구의 1.2% 혹은 1.5% 미만에 불과했다. 1919년 6월 말까지 피검자는 9,458명이었는데, 이 중 기독교 신자는 2,087명으로 전체 피검자의 22%에 달하고, 1919년 12월 말까지 복역자는 19,525명인데 이중 기독교 신자는 3,373명으로 17%에 달한다. 실제로 투옥된 자의 17-22%가 기독교 신자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기여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법무국이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사건처분표(妄動事件處分表)’에 의하면 만세운동으로 19,054명이 수리(修理, 검찰에 송치됨)되었는데, 이중 종교인 피검자는 5,990명이었고, 무종교라고 답한 이가 9,255명, 종교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 3,809명이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는 3,065명으로 종교가 있다고 밝힌 피검자의 51%에 해당했다. 전체 피검자 중 기독교 인구는 16.1%였다. 1.5% 미만의 기독교인 피검자가 전인구의 10%에 달하는 천도교 피검자 2,268명보다 월등히 많았다는 점은 기독교인들의 적극적 참여를 보여준다.
3‧1운동과 장로교회
그렇다면 이 시기 장로교회의 참여 혹은 관여는 어떠했을까? 3.1운동은 처음부터 민족적인 운동이었고 어떤 특수 집단이나 계층, 혹은 종교 집단의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로교의 경우만을 운동 집단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당시 조선의 개신 교회 중 장로교회가 중심 종파였으므로 장로교회의 역할이 가장 컸다. 당시 기독교 인구 중 장로교 인구는 70-75%로 추산되기 때문에 만세 운동 기간의 시위 가담 기독교인 중 이와 유사한 비율의 장로교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 준비 단계에 해당하는 상하이의 신한청년단의 선우혁(정주교회 집사), 서병호(소래교회 집사), 여운형(평양신학교 수학) 등은 장로교인이었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했던 김규식(1811-1950)은 소래교회 출신의 장로교인 이었다. 장로교인 선우혁은 국내로 잠입하여 장로교인 이승훈, 양전백 등과 접촉하고 만세운동을 도모하게 되고, 장로교인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장로교의 김약연, 정재면 목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3.1운동을 이끌어 간 중심 세력은 장로교와 감리교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천도교 세력과 학생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하였다.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은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시도되는데, 서울의 함태영, 이갑성은 장로교 인물이었고, 평양의 김선두, 강규찬, 변인서, 도인권, 이덕환 등은 장로교의 목사 혹은 장로였다. 또 정주의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또한 장로교 인물이었다. 사실 교파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장로교회의 기여가 컸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6인의 기독교인 중 장로교인은 7명, 감리교인은 9인이었다(<표1> 참고). 이는 기독교계 대표 16인 선정 과정에서 장로교회가 감리교회를 배려한 것이다. 감리교인 9명 중 북감리회는 김창준, 박동완, 박희도, 신흥식, 이필주, 최성모 등 6인이었고, 남감리회는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등 3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와 감리교 인사는 거의 비슷하게 배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1> 독립선언서 서명자 16인의 교파별 신급별 구분
구분 | 장로교 | 감리교 |
목사 | 길선주(吉善宙, 1869-1935) 평양장대현교회
김병조(金秉祚, 1877-1948) 정주교회 양전백(梁甸伯, 1869-1933) 선천북교회 유여대(劉如大, 1878-1937) 의주 동교회
|
신석구(申錫九,1875-1950) 서울수표감리교회
신홍식(申洪植, 1872-1939) 평양남산현교회 오화영(吳華英, 1880-1960)서울종교감리교회 이필주(李弼柱, 1969-1942) 정동감리교회 정춘수(鄭春洙,1973-1953) 원산상리감리교회 최성모(崔聖模,1874-1937) 해주남본정교회 |
장로 |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선천오산교회
이명룡(李明龍, 1872-1956) 정주덕홍교회 |
|
전도사 | 김창준(金昌俊, 1889-1959)서울중앙감리교회
박동완(朴東完, 1885-1941) 정동감리교회 박희도(朴熙道,1889-1952)서울창의문감리 교회, YMCA간사 |
|
집사 |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세브란스구내교회 |
피해 상황을 통해서도 장로교회의 주도적인 참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망동사건 처분 표’를 보면 피검된 19,054명 중, 기독교인 3,065명, 천도교 2,268명, 유교 346명, 불교 222명, 천주교 54명, 기타 35명인데, 피검된 기독교 신자 3,065명 중 장로교인은 2254명, 감리교 518명, 조합교회 7명, 교파 불명 및 기타가 286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인 73.5%, 감리교인 16.9%에 해당한다. 당시 장로교 교세와 비슷한 수치인데, 삼일운동 전 과정에서 전체 기독교인 중 장로교인의 참여가 70-75% 내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3>에서 보는 바처럼 1919년 당시 장로교회는 2005개 처(미등록된 기도처 제외)에 달했는데, 당신 한국의 전체 교회 수 2,897개의 70%에 달한다. 당시 장로교 신자는 15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전체 기독교 인구 20만-22만으로 볼 때 68-75%에 해당한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장로교회가 만세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고, 장로교가 강했던 이북, 특히 서북 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표2> 1919년 3월 당시 조선장로교회 교세현황
교회 | 조직교회 | 418 |
미조직교회 | 1587 | |
계 | 2005 | |
교직자 | 선교사 | 85 |
한국인 목사 | 169 | |
강도사 | 5 | |
권서, 전도인 | 191 | |
조사, 여전도인 | 461 | |
계 | 911 | |
직원 | 장로 | 722 |
장립집사 | 68 | |
영수 | 2037 | |
계 | 2827 |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8회 회록>, 120.
피해 상황으로 본 장로교회의 만세 운동 참여
3.1만세운동에서 장로교회 혹은 장로교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므로 피해 또한 심각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선천 오산교회 장로 이승훈은 33인 중 가장 형기가 긴 징역 3년 형을, 이갑성은 징역 2년 6개월 형을,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길선주 목사는 비록 무죄 방면되었으나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구속되어 고통을 당했다. 정주교회 목사였던 김병조는 체포되지 않았지만 이들 7인 모두가 관서 지방 장로교 인물들이다. 이들 외에도 만세 운동에 가담한 장로교인들이 투옥되었는데, 교세가 강했던 서북 지역 장로교회가 더욱 심했다. 평양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는 경성 서대문 감옥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정일선, 그리고 남산현교회 집회를 주도한 김찬웅, 주기원, 박석훈 목사 및 홍기황, 박치록 장로 등은 평양감옥에 수감되었고, 장대현교회 집회를 주도한 윤원삼, 황찬영, 박인관 등은 서대문감옥에 감금되었다. 김창근, 변인서 목사 역시 구속되었다.
1919년 10월 4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야소교장로회 제8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총회장 김선두 목사는 구속 중이어서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총회에 보고된 총회 산하 12개 노회의 상황 보고에는 장로교회가 입은 피해 사항이 비교적 소상하게 보고되어 있다. 이전 해와는 달리 이때에는 ‘특별 사건’이란 이름으로 만세 운동 관련 상항을 보고했는데, 장로교회의 만세 시위 참여와 이로 인한 피해 상항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이 보고를 보면 남한 지역보다 북한 지역의 피해가 더욱 심각했고, 평안도와 황해도에 속한 노회들, 곧 평남노회, 평북노회, 항해노회, 의산노회, 산서노회의 피해가 더욱 컸다. 그 중에서도 평양 지역이 속한 평남노회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총회에 보고된 1919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피해 사항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피해상황 | 피해인원 |
체포된 신자 | 3,804명 |
체포된 목사, 장로 | 134명 |
체포된 기독교학교 교사 및 기관지도자 | 202명 |
감금된 남자 신도 | 2,125명 |
감금된 여자 신도 | 531명 |
태형 후 방면된 자 | 2,162명 |
태형으로 사망한 자 | 6명 |
사살된 자 | 41명 |
피해 중상자 | 116명 |
현재 수감중인 자 | 1,642명 |
파괴된 교회 | 12명 |
파괴된 학교 | 8명 |
<표3> 평남노회 피해상황
* 이찬영, <황해도 교회사> (1995), 273-4를 기초로 하되 일부 수정하였음.
이상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장로교회는 3.1 운동의 준비 단계에서 거사 실행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관서 지방 장로교회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paxsg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