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의 역할
2019-03-063·1운동에서의 민족 대표 33인의 역할 재조명 – 기독교 대표를 중심으로
월드뷰 03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누구인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대한독립만세!’ 3창이 울려 퍼진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민족대표 33인이 있었다. 그들은 거족적 민족 운동의 첫 불꽃을 지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다.” 최남선이 기초하고 이광수가 다듬은 ‘독립선언서’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일제로부터 민족적 해방과 독립을 싸워 얻는 것과 함께 신분과 성별을 넘어 사람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이들이 올린 봉화는 방방곡곡 남녀노소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안 팔각정에 올라선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큰 목소리로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4월 말까지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1,214회의 만세 운동을 추동했다. 그때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황제 고종에 대한 연민과 충성심에 이끌려 거리로 나섰던 민중들은 3·1운동을 통해 몰락한 왕조에 충성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국민 국가를 세우기 열망하는 민족으로 우뚝 섰다. 민중들의 가슴 깊이 민족적 일체감과 시민의식을 불어 넣은 3·1운동은 일제하 독립운동을 지탱한 버팀목이자 이끈 추동력이었다.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이 땅의 민중들이 자신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는 주체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역사는 다수의 민중이 만들어 가는가? 아니면 영웅과 같은 뛰어난 한 개인이나 토인비가 말하는 몇몇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도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냉전 시대에는 역사는 과학이기에 법칙성과 필연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며, 이를 입증하는 도구로 민족과 민중(계급) 같은 거대 담론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종래 학계에서는 대체로 역사의 동력을 민족이나 민중에게서 찾는 민족사나 민중사의 시각으로 3·1운동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80년대 이전에는 민족 대표의 상징적 위치나, 운동의 기폭제로서의 선도적 역할은 긍정하는 견해가 통설이었다. 이는 다음 글에 잘 나타난다. “실상 3·1운동은 33인이 예상한 이상으로 전(全)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되고 말았다. 33인은 운동을 계획하고 대외적인 교섭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운동을 전개한 중심적 존재는 되지 못하였다(이기백, 1971, <민족과 역사>, 일조각, p. 240).”
민족 대표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는 민중 사관
1980년대 이후 신군부의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사관이 대두되면서 이에 입각해 민족대표의 역사적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견해가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이 되었다. 이는 다음 두 글에 잘 나타난다. “민족대표가 3·1운동을 지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이들은 근대 변혁 운동 이래 변혁의 방향이나 외세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인하여 민중 세력과 합류할 수 없었고, 심지어 불신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국내에서 반일 민족 운동의 역량을 조직해 낼 수 없었으며, 자연히 외세 의존적이고 타협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3․1운동의 전개 양상과 참가 계층”,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편, <3·1민족해방운동 연구>, pp. 230-231).” “오늘날 미국의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노암 촘스키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 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 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신복룡,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의 거사’ 아니다”, <동아일보>, 2001년 8월 4일 자).”
민족 대표의 역할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냉전의 해체와 더불어 거대 담론 보다 개인의 역할과 같은 미세 담론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역사는 과학이기 보다 세계와 인간에 관해 의미 지우는 여러 담론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과 개인이나 ‘창조적 소수자’의 선택이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종래 민족 대표를 부정 일변도로만 보는 민족사나 민중사적 시각의 민족 대표 인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3·1운동을 통해 민중이 7,500명의 피살자와 약 16,000명의 부상자라는 막대한 희생을 치렀기에, 3·1운동이 민중의 운동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거족적 운동에서 민중이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만큼이나 이 운동을 촉발한 민족 대표 33인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민족의 영웅으로서 33인의 역할만을 기억하려 할 때 거족적인 민족 운동인 3·1운동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배제되고 말 것이다. 역으로 초역사적 실체로서 민중의 존재만을 기억하고자 할 때, 민중이라는 거대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33인이 3·1운동에서 점하는 위치와 역할은 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기독 교단과 3·1운동
일제하 최대 규모의 비폭력 민족 운동인 3·1운동이 언제 누구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 일치된 통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논자에 따라 기독교단 설, 천도교단 설, 불교계의 한용운 설, 그리고 중앙학교를 비롯한 학생대표 설 등 의견이 분분하나, 이 글에서는 기독교단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파리 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기독교계는 서북 지방과 서울에서 각각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는 세브란스 의전의 이갑성(李甲成)이 1918년 말부터, 그리고 서울 중앙 YMCA 학생부 간사 박희도(朴熙道)가 1919년 1월 20일경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했으며, 서북지역에서는 2월초에 선우혁(鮮于爀)이 상해로부터 국내에 들어와 연고지인 선천·정주·평양을 순방하면서 1905년 신민회 운동을 이끈 정주 오산학교의 이승훈(李昇薰) 장로와 선천의 양전백(梁甸伯) 목사를 비롯한 서북 지방 장로교회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초에 이승훈이 최남선(崔南善)의 주선으로 천도교 측과 함께 거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장로교단의 유여대(劉如大)·길선주(吉善宙)·이명룡(李明龍) 목사가 뜻을 같이 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오화영(吳華英) 등 감리교회 지도자들과 회합하여 함께 거사하기로 합의하였다. 한때 천도교 측과 협의가 부진하자 기독교단은 단독 거사를 꾀하였으나 최린의 중재로 3·1운동을 함께 일으키기로 합의하였으며, 이후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학생단을 가세시킴으로써 3·1운동을 민족 전체가 함께하는 독립운동으로 이끌어 내었다.
33인의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16명의 소속 교단과 지역은 다음과 같았다. 장로교단의 경우 평양의 길선주, 정주의 이승훈․김병조(金秉祚)․이명용, 선천의 양전백, 원산의 이갑성, 그리고 의주의 유여대 7명이었으며, 감리교단은 평양의 신홍식(申洪植), 해주의 최성모(崔聖模), 서울의 김창준(金昌俊)․박동완(朴東完)․박희도․신석구(申錫九)․오화영․이필주(李弼柱), 그리고 원산의 정춘수(鄭春洙) 9명이었다. 이처럼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구성을 보면 관서 지방은 장로교 측이, 그리고 기호 지방은 감리교 측이 세력을 잡고 있던 교계의 판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1919년 말 일제 헌병대 측 조사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체포된 사람 19,525명 가운데 기독교도가 3,426명으로 17.6%, 천도교도가 2,297명으로 11.8%, 유생이 346명으로 3.6%, 불교도가 220명으로 1.1%를 차지한다. 민족 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계 대표라는 점, 그리고 당시 전체 인구에 2%에도 못 미치던 기독교도가 피체자 중 17.6%라는 사실은 기독교가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사상사적인 면에서 볼 때, 1884년부터 전파되기 시작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널리 퍼지게 된 천도교보다도 신앙의 역사가 일천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만민평등을 믿음으로써 조선왕조의 멸망 시까지 지배 계층으로부터 사교(邪敎)로 백안시되었던 기독교가 국민 국가 만들기를 꿈꾼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3·1운동을 거족적 민족 운동으로 승화시킨 오화영과 유여대
특히 민족 대표 33인 중 감리교단의 오화영과 장로교단의 유여대는 3·1운동이 중앙의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민족 운동으로 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화영은 천도교와 공동 거사를 주저하던 감리교단 민족 대표들을 설득함으로써 3·1운동이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으로 성공할 수 있게 하는 한편, 감리교회의 교세가 강한 개성과 원산에서의 3·1운동 준비를 담당함으로써 3·1운동이 지방으로, 그리고 민중에게로 확산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유여대는 중앙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의주에서의 거사 준비와 운동의 전개만 전담해, 자신이 관여하던 양실학교의 교사와 학생 및 부형 등 800여 명이 3월 1일 오후 2시 반에 일으킨 시위를 주동했다. 그가 중앙의 독립선언서 발표 현장에 가지 않은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3·1운동이 서울과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의주에서 시간차 없이 동시에 운동이 전개되도록 하는데 있었다.
33인은 ‘창조적 소수자’로 보아야 한다
개성과 원산 및 의주에서 서울과 동시에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것은 민족 대표들의 지도와 준비가 3·1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들의 지도하에 이 땅의 백성들은 독립된 공화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길 꿈꾸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믿고 따랐던 민족 종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하에, 이들 민족 종교의 단체로부터 나온 민족 대표 33인이, 또 이 종교에 귀의한 민족의 성원들이 3·1운동의 첫 봉화를 울리고 이를 이끌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송건호의 견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33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엄격한 투쟁 논리로 따진다면 그러한 비판도 일단 있을 수 있는 비판이다. …당시 조선에 대한 일제 통치는 헌병에 의한 총검 정치였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조선인은 가혹한 고문으로 죽여 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더욱이 법관 출신인 함태영(咸台永)이 이번 거사로 33인은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여 33인은 이미 사형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족 대표로 33인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한 인사가 있었다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역사적 진실은 속일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어 자료와 기록대로 소개했으나 그렇다고 33인의 역사적 공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송건호, “3·1운동과 기독교”, 1981, 김용복 외, <한국 기독교와 제3세계>, 풀빛, p. 85).”
당시 조선 사회의 지배 계층들이 일제와 타협하고 민족 문제를 외면·방관할 때 앞장서서 민족의 당면 과제―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는―를 자기들의 문제로 민족이 자각할 수 있게끔 물꼬를 터준 이들이 바로 민족 대표 33인이었다. 3·1운동을 이끈 천도교·기독교·불교는 조선 왕조 시절에는 박해를 받던 종교였기에 이 종교 단체를 대표한 민족 대표 33인은 복벽 운동 차원을 넘어선 공화제 민주 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역사 변혁을 이끄는 ‘창조적 소수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3·1운동의 주체를 민중으로만 보는 학계의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huhdh@khu.ac.kr>
허동현(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기록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한국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