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인기독교 공동체와 3·1운동의 기원

해외 한인기독교 공동체와 3·1운동의 기원

2019-03-09 0 By worldview

해외 한인기독교 공동체와 3·1운동의 기원

 

월드뷰 03 MARCH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독립만세에 앞장선 기독교

 

“우리는 오늘의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기미독립선언서(1919)

3·1운동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적 탄압과 차별에 항거하여 민족 자각을 일깨우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순히 일제의 탄압에 대한 저항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근대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보여준 혁명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또한 3·1운동은 이후 다양한 민족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이자 민족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이 운동에서 폭발된 독립의 열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연결되었고, 일제에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동력(動力)이 되었다.

3·1운동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종교 및 세력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운동 초기 단계부터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으로 적극 관여하였고, 교회는 전국으로 확산되는 거점으로서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오랫동안 전개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만큼 기독교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한국기독교 의미는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해외 한인기독교공동체가 국내와 연락 속에서 독립의 열망이 폭발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전 해외 지역에 세워진 수많은 한인사회에서 기독교공동체는 한국인들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는데, 이런 성격이야말로 3·1운동이 해외지역에서도 활기차게 일어난 토대가 되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3·1운동 이전 세워진 한인기독교공동체를 무대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외 선교와 한인기독교공동체 형성

 

19세기말 한국인들의 해외 이주가 본격 시작되었다. 사회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터전의 마련’이라는 경제적 이유로 국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하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한인공동체를 일컫는 ‘한인촌’(韓人村)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국권피탈을 전후로 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정치적 동기에서 이주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미주·만주·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주하는 한국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았고, 해외 지역에 한인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해외선교는 해외 기독교공동체 형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한국인의 미주 이주는 처음부터 교회가 배경이 되었다. 1902년 12월 하와이 농업이민단 97명이 도착하였는데, 그 가운데 50여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인솔 책임자 및 통역이 기독교인이었고, 이주민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홍승하 전도사가 함께 동행하기도 하였다. 1905년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7,400여명이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이주단은 각 지역 농장에 정착함과 동시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4년에는 한인 교회 및 예배처가 35곳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미국 본토 지역의 경우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 문경호, 양주삼 등의 주도로 한인 감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로스엔젤레스한인연합교회가 조성환, 방화중, 장원근 등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한인사회 및 기독교인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초창기 하와이 이민단

1900년대 초 중국 만주지역에 대한 이주와 함께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간도, 북간도지역으로 불린 동만주지역에는 1900년 초부터 전도활동이 시작되었다가 1907년에 용정교회가 설립되었고, 1909년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명동교회는 1908년 이주 정착한 한인들이 명동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평안남도 출신 정재면을 초빙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 때 집단적 개종이 일어나면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북만주지역은 미국감리회가 1911년 손정도 목사를 중국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본격화되었고, 배형식 목사가 만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하였다.

1906년 8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는 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김정식을 동경에 파견하여 기독교청년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해 11월 동경 YMCA 건물 2층에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었고, 1907년 8월 독립 건물로 회관을 마련하였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성경공부와 종교집회, 학생연합 기도회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9년 5월에는 한석직 목사가 파송되어 청년회관 내에 동경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 509명 중 213명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청년회와 교회는 동경 기독교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이처럼 해외 한인 기독교공동체는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가 전개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와 학교, 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외 한인 기독교공동체는 종교적 기능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처음부터 신앙 공동체인 동시에 사교적인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였는데, 이것은 이주하면 한인 교회부터 찾는 이유가 되었고, 한인사회를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특이한 현상을 낳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1900년대 해외 이주민들에게 교회는 고향이요, 안식처와 같은 한인공동체이며 신앙의 산실이었다. 교회에 나가야만 한인들을 만날 수 있고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위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기독교공동체와 민족운동 기반

 

해외 기독교공동체 형성이후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정치적 동기로 해외로 이주하는 한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적지 않았다. 강제 합병 뒤에는 무장독립전쟁론에 따라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한인촌을 건설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인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간도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교육운동과 군사훈련을 통하여 민족의 힘을 기르고 있었다. 독립군은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본국에 들어와 일본 군경과 교전하여 커다란 타격을 주기도 했다. 특히 1907년 신민회가 추진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운동으로 이 지역에는 많은 교육기관·군사기관·산업시설이 설치되었다.

용정촌 한인촌을 건설한 이상설, 이동녕, 정순만 등은 국내 기독교청년단체 상동청년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용정교회를 기반으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을 중심으로 경학사란 자치기관을 두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했다. 이를 모체로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해 독립군의 지도자를 양성했다.

간도 지방에서는 수많은 한국인 학교가 설치되었으며, 여기서는 군사훈련과 함께 국사나 일제의 침략사 등을 가르쳤다. 1911년 2월 기독교인 이동휘가 함경북도 성진에서 동만주지역으로 파송되어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3국 전도회’를 결성하고 3년간 활동하였다. 그 결과 36개 교회가 신설되었고 학교도 함께 설립되었는데, 명동학교 출신들이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4년 이동휘가 간도로 망명하여 정착하였고, 이후 그를 중심으로 하는 단체에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이 대거 합류함에 따라 간도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한 김약연, 이동휘, 정재면 등은 연변교민회, 간민회, 간민교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10년대 기독교인들은 한인단체들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한인 단체들은 한인사회를 대표하여 관청과 교섭하며 중재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들은 명동학교 등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민족 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민족운동을 주도할 젊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국민회’가 결성되었을 때, 구춘선 회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물들이 모두 교회를 개척하고 발전시킨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점에서 간도지역 교회들이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 창립 회원

또한 중국 본토 상해와 남경에 설립된 교회는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해외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상해의 경우, 1914년 11월 정치적 목적을 지닌 망명객이나 민족운동가들이 교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어 미국 해군YMCA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립되었는데, 그 이듬해 교인 수가 40여 명이 되었다. 1917년에는 전도인으로 여운형이 선출되어 교회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남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지역에는 금릉대학, 금릉신학교 등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들이 많았다. 1915년 한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추방당한 YMCA 총무 질레트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며 남경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상해와 남경의 기독교인들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후 개회될 파리강화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결성된 신한청년당에 적극 참여하였다.

미국에서는 안창호·이승만 등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하와이에서 1903년 신민회가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한국인 단체가 생겼다. 이들은 1907년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었다. 본토에서는 1903년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친목회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1905년 공립협회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때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국민회(國民會)가 발족되었다. 국민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1913년에 안창호가 신민회의 후신으로 흥사단을 로스엔젤스에서 조직하였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 재일 유학생이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와 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신축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기독교인의 여부를 떠나 모든 한인 유학생들에게 개방된 친목과 교육의 열린 공간이었다. 유학생들은 친목회, 운동회, 웅변대회 등을 개최하여 배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유학생들은 국제정세의 동향 및 국제사회 재편에 민감히 살펴보면서 향후 한국독립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토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을 알고 이 기간 중에 독립을 호소할 시위를 준비하였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유학생 400여명이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모여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2·8독립선언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해외 한인 기독교공동체는 1900년대 이후 해외 민족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고, 3.1운동이 계획되고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는 3.1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런 점에서 해외 한인 기독교공동체는 종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민족사적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kjkim86@naver.com>

 

 

 

 

김권정 | 숭실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졸업하였다. 경희대와 숭실대 등에서 강의하였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및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