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후에 돌아본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1세기 후에 돌아본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2019-03-09 0 By worldview

1세기 후에 돌아본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월드뷰 03 MARCH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족자결주의

 

3‧1운동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큰 영향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33인 대표들의 증언에서 이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잘 알고 있었고,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이승훈, 신홍식, 함태영, 이갑성 등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3‧1운동의 동기로 인정하였다. 물론 그것만이 원인이라기보다는, 1905년 이후 일본의 보호국화와 제국주의 지배 체제의 폭정과 차별 정책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다가 윌슨의 선언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제 사회의 구성 원리로 약소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적 이념이면서도 국제적 질서를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개편하는 보편적 이념으로 선포되었다. 이런 이상주의적 정신은 기미독립선언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자유, 평등, 인도, 정의라는 자유 문명의 전통이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중심적 원리로 수용되었다.

 

조선 민족주의의 성장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의 민족주의의 발전에 적극적인 원리로 채택한 민족 지도자들의 선견과 결단에 의해 조선 민족주의의 대대적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첫째, 2개월 동안 전국에서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독립 시위와 봉기의 대약진을 달성하였다. 3‧1운동 초기에는 선언문에서 강조한 평화적 시위가 지켜지는 추세가 전국의 독립 시위운동의 다수를 점하였지만 3-4주 후인 중기부터 대중 시위 유형은 폭력을 동반하였다. 이 시기에는 일제의 폭력적 진압으로 인한 대중들의 민족적 의식과 애국적 반발심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 각계각층의 대중들이 참여한 독립 시위와 투쟁을 통해 불과 수개월 만에 대중의 민족의식은 크게 고취되었고, 이후 다양한 한인들의 민족 운동이 이어졌다.

윌슨 대통령

둘째,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인 3월 말, 4월 초 민족주의자들은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일으켰다. 3월말부터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민주 공화제 국가 수립 목표를 천명하였다. 1919년 상반기에만 거의 7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고 그중에서 대표적인 3개 정부인 상해 임시정부, 노령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가 3-4월에 경쟁적으로 선포되었다.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천명하였고 본격적인 공화 민족주의 혁명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임시정부들은 왕정이 아니라 하나같이 공화정의 수립 목표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특히 국내에서 이규갑, 홍진, 한남수, 조만식 등의 민족 지도자와 13개도 대표들의 국민대회를 기반으로 등장한 한성정부는 공화주의적 정부로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간주되었다. 이에 미주에서 국민회의 지원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의정원 세력을 이끈 도산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3개 정부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1919년 9월에 한성정부 체제로 3개 정부의 대통합을 달성하였다.

셋째, 일제의 탄압과 공작으로 인해 단기적 독립 성취는 실패하였지만 장기적으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적 대 각성을 가져왔다. 애초에 터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구 독일제국과 같은 유럽 제국주의 붕괴 지역의 소수 민족 독립의 사례와는 달리,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팽창주의 아래 놓인 조선의 독립 문제는 단기적으로 달성되기 힘들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은 일본의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반대하였지만 일제에게 한반도의 독립까지 요구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따라서 독립은 장기적 투쟁과 고난의 과정을 가야 하는 길이었다.

 

민족자결주의의 실현과 어려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종전기와 1919년 파리강화회의 개최 초기에 세계적인 이상주의와 낙관주의의 흐름을 타고 동아시아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파리강화회담에서 식민지를 보유한 유럽 국가 및 일본의 반대와 요구에 직면해야 했고 이들과의 복잡한 외교 관계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윌슨이 자결주의를 1차 세계대전 종전기에 국제 사회의 새로운 이상주의적 원리로 제시한 것과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 사이의 현실적, 외교적 및 정치적 관계가 진전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과정이었다. 전자가 윌슨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적 리더십이 창의적이며 선도적으로 제기한 것이라면 후자는 냉엄한 국제 정치의 현실인 강대국 국제 관계의 전개가 그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결코 피상적인 생각이나 이념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심대한 것이고 미국 건국 정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민주국 미국이 분명히 제기해야 하는 문명적 사명의 핵심 사안이었다. 그런데 윌슨의 14개 조항 선언은 다소 추상적인 표현들로 현실적 외교 정책을 위해서는 더 구체화할 필요가 제기되었고, 윌슨의 참모인 하우스 대령은 이를 구체화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유럽에서의 소수 민족들의 사례에만 적용되는 한계 내에서 추진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 전쟁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소수 민족의 문제나 조선의 독립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현실 국제 정치에서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는 많은 장벽에 부딪쳤고 단기적으로는 심각한 좌절과 수정을 겪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의 범위가 축소된 것이나, 미국 상원의 비준 거부에 따라 국제 연맹 가입이 좌절된 것도 국제 사회와 미국 내 현실 정치의 높은 벽 때문이었다. 윌슨의 자결주의 원리는 파리회의에서 유럽 3개 제국의 붕괴와 신생국의 탄생으로 구현되었다. 폴란드와 체코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핀란드가 패전국이자 구 제국주의인 국가들의 통치로부터 독립하였다.

 

31운동 후의 국제적 흐름

 

1919년부터 2-3년간 조선의 독립운동은 3‧1운동의 여세를 몰아서 비교적 활기 있게 전개되었다. 비록 일본이 독일에 대한 승전국 지위를 유지한 상태였기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은 제기되지 못하였지만 열강의 국제 외교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선전 활동은 서서히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특히 1919년 6월부터 10월까지 미국 의회에서 미 상원위원들이 조선의 독립 문제를 놓고서, 일제의 조선 통치를 비판하고 결의안 채택을 둘러싼 찬반 토론을 활발하게 제기하였다. 이런 미국 정치계의 조선문제에 대한 인식 변화의 흐름은 이승만과 서재필, 정한경 등 한인들의 필라델피아 한인 민족대표자대회 이후 지속적인 활동의 결과이다.

중국 상해에서 안창호, 이동녕, 김구, 김규식, 박은식, 조소앙, 홍진, 신채호, 이규갑, 차리석 등 민족 지도자들의 애국적 민족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등장한 것은, 한인 독립운동 가능성의 국제적 평가 기준이 되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 안창호 및 이동휘 등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공화주의 노선의 구체적 시행을 둘러싸고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분열은 일제가 원하는 바이고 한인들의 민족 운동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중시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독립운동 내의 다양성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크게 볼 때에 조선의 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 가능성을 제고하게 된 자산이었다. 강력한 일본의 탄압과 교란책으로 인해 비록 1919년과 그 직후에 단기적인 독립의 획득에는 실패하였지만 1919년 조선의 만세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한반도 내외, 미주, 중국, 러시아, 유럽 등지에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알리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일본은 워싱턴군축회의(1922.11.- 1923.2.)에서 강대국으로 그 우월적 지위를 미국과 영국 다음가는 해군함의 배치 비율(60%)을 통해 인정받았다.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한인 독립 운동가들과 대표단을 현지에 보내 적극적 독립 선전 활동을 벌였으나 열강은 여전히 조선 독립의 요구를 외면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력에 대하여 열강은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독립운동 침체의 구조적 요인은 이러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 정세의 기본적 흐름이 일본에 유리한 상황에 크게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워싱턴회의 이후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1923~1941년)의 시기는 조선의 민족운동에는 침체기였지만 이 시기에도 미주와 중국에서 해외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은 이어졌다.

 

민족자결주의의 부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장기적으로는 시대적 흐름을 앞서간 이념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서의 영토 변경의 주요한 원리로 채택되었고 그 결과 폴란드, 체코, 발틱 3국 등의 다수의 신생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비록 비유럽 지역인 동북아에서는 단기적으로 그 적용이 배제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다시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대서양 선언으로 부활하였고 국제연합의 성립과 더불어 유엔 헌장에서 국제 사회의 원칙으로 채택되었다. 조선의 독립 문제도 1943년 연합국의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전격 채택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오랫동안 유지했던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외교 정책 노선을 포기하고 조선의 독립 지지를 처음으로 공식 선언한 것이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3.1독립운동의 의미는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1942년 3월 1일 미주에서 이승만과 한미협회는 <한인자유대회 Korea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하여 우리의 독립과 민주공화국수립의 의지를 다시금 국제 사회에 천명하고 23년 전 기미년 만세 독립운동의 의의를 재평가하는 큰 행사를 치렀고 이어서 중국에서도 김구와 조소앙이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며 미주와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재개되었다. 조선 독립의 큰 기회가 온 것을 확신한 이들 임정 지도자들은 국제 사회에 조선 독립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미주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and Out>(1941)의 재판이 매진되는 등 대대적으로 한인의 민족주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민족 독립의 달성

 

1919년 조선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당시 여러 약소민족들의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국제 정세를 잘못 이해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또한 이들이 주체 의식이 약해서 외래 사상에만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의 국제 관계와 민족 운동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밝혔듯이 전 세계 식민지 약소민족 지도자들의 상당 부분이 윌슨의 자결주의 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고 1919년 봄에 파리로 모여들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과 3‧1운동 지도자들이 이런 천금의 기회를 민족 독립의 호기로 인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날카로운 국제 정세의 변화와 전개에 대한 판단 능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국내 이승훈, 함태영 등 기독교계와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계 그리고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상해 신한청년당과 노령의 국민의회 등 해외 한인들의 망명 민족운동 단체들은, 세계사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선도적이며 희생적인 활동을 통하여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등장하였고 이런 계기를 통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적극 동참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 10년 만에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조선의 독립국가 수립 의지를 천명하고 민족 혁명의 대장정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정책과 이로 인한 정국 혼란 등의 위기가 있었으나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 아래 한반도 자유 총선거의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윽고 이듬해 1948년 5월의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8월 근대 민족국가를 수립하여 민족 혁명의 대장정의 길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yjpaul@sungshin.ac.kr>

 

김용직 |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국제관계학)을 졸업하고,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근현대정치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국가체제 구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