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오만이 빚은 트로이 전쟁

2019-02-04 0 By worldview

인간의 오만이 빚은 트로이 전쟁

 

월드뷰 02 FEBRUARY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4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포세이돈은 아폴론과 맞섰다. 헤르메스는 레토와 마주 보고 으르렁거렸고 아테나가 아레스에게 강펀치를 날리는 사이 헤라에게 얻어터진 아르테미스는 울면서 도망쳤다. 분명 집단 난투극 현장 같기는 한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하다. 맞다, 그리스의 신들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스러운 그리스의 신들이다 보니 서로 질투하고 분쟁하는 경우는 흔했지만 이렇게 편을 갈라 난타전을 벌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인간들도 열심히 싸웠지만 신들도 각자 응원하던 양쪽의 편을 들어 싸운 트로이 전쟁은 정말로 있었던 사건일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갑옷과 방패의 묘사가 전쟁 당시로 추정되는 때(기원전 1,250년경)가 아닌 기원전 8,7세기의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기원전 8세기면 그리스의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문자로 옮겼고 그러다 보니 투구와 갑옷에서 자신의 시대에 등장했던 것들이 섞여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을 있었던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왜? 너무 재미있으니까.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한 편의 영화에 담은 것이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트로이’다. 러닝 타임이 163분인데 ‘겨우’ 163분에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밀어 넣었다는 것이 놀랍다. ‘일리아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1만 5천 줄 내외의 일리아드에 도무지 뺄 게 없다는 사실을.

 

 

(포스터 소개 – 트로이의 포스터. 출연진이 워낙 쟁쟁하다 보니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도 포스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신화 속 트로이 전쟁의 원인 제공자는 제우스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우발적 원인 제공론’이다.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놓고 자신의 형이기도 한 포세이돈과 경쟁을 벌였다. 이때 테미스 여신이 제우스에게 충고 한 마디를 흘리는데 테티스가 낳은 자식이 아버지보다 강한 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난감해진 제우스는 고민 끝에 테티스를 인간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다. 아버지가 인간인 한 결코 신보다 강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른 게 인간 펠레우스였다. 펠레우스는 제우스에게 손자가 되는 인물로 제우스가 아이기나 섬의 여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아코스의 아들이다.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는 신들도 대거 참석했다. 딱 하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빼고. 불만을 품은 에리스는 결혼식장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진 황금사과를 투척한다.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의 주인을 놓고 세 명의 여신이 격돌한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다. 골치 아파진 제우스는 항상 그렇듯 무책임하게 이 난처한 판결을 인간인 파리스에게 넘겨 버린다. 파리스는 무조건 고사했어야 했다. 인간이 신을 판단한다는 것은 오만의 극치다. 가뜩이나 태몽부터가 불길해서 조국인 트로이를 화염에 휩싸이게 할 팔자를 타고난 존재 아니었던가. 그러나 예언을 실현할 인물답게 파리스는 기꺼이 판관의 역할을 자임했고 결국 조국 트로이를 전쟁의 피바람 속으로 밀어 넣는다. 참으로 우발적이다.

다른 하나는 ‘계획적 원인 제공론’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너무나 많이 불어나 버린 인간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서 가이아는 제우스에게 인간들을 제거해 달라 부탁했고 방법을 고민하던 제우스는 전쟁을 선택한다. 인류를 절멸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량 살상에 전쟁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레다에게 접근하여 헬레네를 낳았다. 그리고 테티스를 펠레우스와 결혼시키면서 그 자리에 의도적으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배제했다. 제우스의 치밀한 공작 속에 트로이 전쟁이 발발했다는 얘기다. 어느 쪽일까. 평소 제우스의 하는 꼴을 보면 ‘우발적’에 더 힘이 실린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됐든 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들은 대체 왜 패로 나눠 싸움을 벌인 것일까. 일단 전쟁을 놓고 신들이 갈린 것은 이해가 쉽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약속한 신이니 당연히 트로이 편이다. 아프로디테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 호칭을 빼앗겼으니 헤라와 아테나는 자연히 그리스 편이 된다. 친소 관계에 따라 아프로디테의 동맹군은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레토 등이다. 헤라와 그 친구들은 포세이돈,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등이다. 양쪽 진영은 전쟁 초기부터 한 판 붙기를 앙망해 온 처지였고 이를 힘으로 누르고 있던 것이 제우스였다. 어느 쪽이든 편을 들다 눈에 띄면 재미없을 것이라는 협박으로 신들의 참전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제우스는 은근히 트로이의 편을 들고 있었다(제우스의 내로남불?). 이유는 이렇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하자 이를 어머니인 테티스에게 일러바쳤고 테티스는 내가 누구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는데 따위의 하소연으로 제우스를 압박했다. 테티스의 이유 있는 투정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없는 그리스 군이 트로이에 계속 밀리도록 만들었고 다른 신의 개입을 금지했다. 그러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화해하고 아킬레우스의 명예가 회복되자 금전령(禁戰令)을 풀고 신들의 참전을 허락했던 것이다. 신들이 난투극을 벌인 사연이다.

 

신화와 영화는 조금 다르다. 영화에서 파리스는 예쁜 것을 좋아할 줄만 알았지 뒷일은 감당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으로 나온다. 아니다. 활의 명수였던 파리스는 헥토르 다음가는 트로이의 무장(武將)이었으며 아킬레우스 말고도 여럿을 활로 쏴서 보냈다. 전쟁의 원인이기도 한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네는 시간이 멈춘 캐릭터다. 영화에서 헬레네는 내내 20대로 나온다. 그러나 파리스와 손잡고 달아날 때 그녀는 아홉 살 딸을 가진 유부녀였다. 임신 가능 연령으로 추정할 때 최소 20대 중반이다. ‘왕비 탈환’을 위해 그리스 연합군이 모인 것은 달아난 때로부터 10년 후였으니 30대 중반, 트로이가 함락된 것이 그로부터 또 10년이니까 40대 중반이다. 아내를 만나면 바로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그녀의 남편은 헬레네의 아름다운 가슴을 보고 칼을 내려놓는다. 20대에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지천명을 지나고 나니 취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인들이 해변에 남겨 놓고 간 목마의 처리를 놓고 트로이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절대 성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은 라오콘이었는데 그는 아폴론 신에게 그 일과 무관한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라오콘의 개인적인 죄를 몰랐던 트로이인들은 그가 성내 반입을 반대해서 죽었다고 생각하여 바로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결과는 다들 아시는 바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나중에 로마를 건국한 트로이의 후예들이 그리스를 정복했으니 서로 승패를 주고받은 셈이다. 그리스인들이 위대한 것은 그리스 신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황된 이야기를 잘도 지어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인생의 허무함과 운명과 싸우는 일의 부질없음과 인간의 오만을 경계했다. 그리스 신화를 읽고 나면 하루 정도 겸손해지는 이유다. 오만이 판치는 세상이다. 대통령도 오만하고 국회의원도 오만하고 도대체 안 오만한 사람이 없다. 교만과 오만은 다르다. 교만은 잘난 체하며 건방지다는 뜻이지만 오만은 여기에 한 숟가락 더 얹어 남을 업신여긴다는 의미까지 들어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라고 했으니 오만의 결과는 더 볼 필요도 없겠다. 독일 속담에 이런 게 있다. ‘자신이 바보라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 솜씨가 오만이다.’ 요즘 인간들 하는 꼴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collecter1@naver.com)

 

글 |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작가이며 출판영화방송 등 문화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사>, <결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