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맞은 K 선교사

2019-02-04 0 By worldview

<선교문학: 정년>

 

정년을 맞은 K 선교사

 

월드뷰 02 FEBRUARY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1

 

나은혜/ 목사

 

올해 9월 8일이 생일인 남편 K 선교사가 만으로 65세가 되었다. 65세는 우리 교단 법에서 선교사로서의 정년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정년과 상관없이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남편 K 선교사는 13년 동안은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30대 초반에 유학을 다녀와서 대학교수가 될까 선교사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고는 선교사로 살기로 하였다. 물론 CCC 맨으로 선교에 대한 도전은 늘 있기도 했었다.

어느 날 청주에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부흥 강사님이 나중에 천국 가면 “껄…껄…껄(걸)”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뜻에 순종할걸(껄)”하고 후회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남편은 그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미국 텍사스로 유학 가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도 포기하고 대신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을 하였다. 오랫동안 ‘난 곳 방언’이라는 선교잡지를 구독하며 기도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남편은 GBT(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로 가려고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청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와. 남편은 서울 장신대 야간 신학과에 학사 편입을 하였다. 낮에는 인천 숭덕여고에서 고3담임을 하면서 밤에는 신설동까지 가서 공부하였다. 나는 아이들 셋을 돌봐야 해서 남편과 같은 서울 장신대생 이었지만 낮에 공부하는 성서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에게 주경야독만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의 길이 녹록지 않을 것을 아시기에 아주 센 기도 훈련을 시키셨다. 남편은 신설동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주안에 내려서 아무도 없는 주안장로교회 고등부실에 들어가 새벽 2~3시까지 기도하고 집에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서울 장신대를 졸업하면 그때는 일 년만 목회연구과정을 공부하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대원(M.div) 과정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인천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가서 밤에 신학을 공부하니 피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번번이 졸다가는 주안에서 못 내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제물포역 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이 없어 택시를 타고 돌아오곤 했다. 남편은 학사 편입해서 2년 동안 한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며, 아무래도 신학공부를 더 해야 겠다는 것이다. 3년이나 더 공부해야 하는 과정을 말이다. 결국 시험 준비만 2년을 더 해야 했고 40세가 되어서야 신대원에 입학을 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는 길이 좀 늦어졌다. 목회 연구 과정을 마치고 바로 선교사로 나갔으면 1992년 한중 수교가 되었으니, 얼마 안 있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곧장 선교지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대원 공부를 3년 마치고 선교훈련을 또 1년 (중국어 문선교회 4개월, GMTC 6개월, 총회 선교훈련 3개월)을 받고서야 1997년 3월 드디어 대망의 선교지인 C 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올망졸망한 세 아이를 데리고 도착한 C 국은 그때만 해도 화장지도 사서 쓰기 어려운 곳이었다. 우리 가족은 C 국의 가장 가난한 성 가운데 하나로 들어갔다. 초5, 중2, 중3의 사춘기 아이들을 데리고 선교지로 간다는 것은 사실 큰 모험이었다. 그래서 어떤 선교 단체에서는 우리에게 일 년만 시험적으로 선교지에 들어가서 살아보고 아이들이 잘 적응하면 장기 선교사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준비하고 들어갔다. 선교지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우리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죽으면 내 뼛가루를 사역하던 선교지의 강가에 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개월 전 C 국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이 여전한 것을 보면 내 정체성은 계속해서 C 국 선교사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여하튼 우리 가족은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만 8년을 준비 했다.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해서 인지 남편 K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선교사로 살기를 원했고 늘 그렇게 기도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내가 공안에게 비자 제한을 당해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 년을 혼자서 선교지에 더 있었다. 세운 지 몇 년 안된 교회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남편은 교회에 후임을 세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성도가 백 명 남짓 된다는 경북의 한 지역에서 담임목사 제의가 있었지만 K 선교사는 가지 않고. 계속해서 국내에서도 선교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총회 파송 선교사로 있기를 원했지만 교단에서는 국내에서의 해외 선교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우리는 2013년 총회에서 선교 15년 감사패를 받고 사표를 냈다.

그 후 K 선교사는 국제단체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스스로 ‘한국어 교육선교회’를 설립하여 대표로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K 선교사의 사역은 한국에 와있는 중국 유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해 주고 졸업시켜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다. 그렇게 유학생을 도와주며 전도를 한다. 벌써 17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한국에 이런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거의 없다. 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선교사로 가기 전 13년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 K 선교사의 달란트가 빛을 보는 것이다. 한국어 교육선교회는 25개 중선협(중국선교 협의회) 여러 단체들과 연계해서 사역을 하고 있다. 우리가 C 국에서 추방을 당하지 않았어도 올 9월에 K 선교사가 만 65세가 되었으니 아마 2018년 12월까지 교단 소속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소속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였다.

남편은 평북노회 소속이고 나는 함해노회 소속이다. 남편과 나는 각각 자신이 속한 노회의 전도 목사이다. 남편은 한국어교육선교회의 대표로 나는 선교문학선교회 대표로서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 사역을 해 나갈 뿐이다. 기쁜 소식은 두어 달 전에 남편에게 노령연금을 신청하라고 우편물이 왔다. 아직도 한 교회의 후원에 의지해 사는 K 선교사에게 20여만 원은 큰 도움이 된다. 내년 7월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에 경전철이 개통되면 지하철 요금도 무료가 된다. 이것도 도움이다.

대구 사는 큰딸이 아빠의 생일날 벌써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이제 오늘부터 지하철 무료네요. 그 중고차 이제 폐차하세요.” 우리 큰딸은 알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구다. 중2 때 선교지에서 우유팩을 씻어 말려 접고 있기에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한국에 가지고 나가서 팔 거라고 했던 친구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알뜰하더니 결혼 11년 만에 자신들의 힘으로 집을 장만했다.

벌써 18살이 된 우리 집 황금 소돌이(소나타 골드)가 늙어서 고장이 자주 나니 아빠 엄마의 안전이 염려스러워서일 것이다. 나는 딸의 그 문자에 대해 얼른 답장을 보냈다. “어머, 애는 무슨 소리니? 엄마는 아직 65세 되려면 3년 남았다.” 그랬더니 가족 카톡 그룹에 있던 아들이 키득키득 웃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막내가 예전에 엄마에게 SM 5 사 준다고 했는데 새 차 사주기까진 헌차라도 안 버릴 거야. 할머니 병원 모시고 다니려면 차가 필요해”라고 답했다. 지난 6월 갓 결혼한 목사 부부인 막내딸이 글쎄, SM5를 우리에게 사 줄 형편이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딸이 못해 주면 하나님께서 사 주시겠지 하고 믿고 있다. 믿음의 말은 딸이 하고 응답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번에 교회 건물 분양도 큰딸의 입을 통해 수년전 말하게 하신 것이었는데 이번에 응답을 받은 것이니까 말이다. 어떤 직업이든 정년이 되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년퇴직은 누구나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정년 후의 삶을 잘 준비하는가가 그 사람의 정년 후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남편 K 선교사는 정년 후의 준비를 잘한 것 같아 보인다. 선교지에서 현지 대학 교수로 대학생들을 섬기며 사역했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우리나라로 온 선교지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렘 31:13)”

 

(luomingshu@hanmail.net)

 

글 | 나은혜 (목사)
남경사범대학 한어언문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 신학대학교에서 M.div 및 선교학 석사(MA), 미국 그레이스 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D.miss)를 하였다. 1997~2007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현재 한국에서 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GMLS)를 설립하여 대표로 문서 선교와 선교사 멤버 케어 사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