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善行)의 기능

선행(善行)의 기능

2019-02-04 0 By worldview

이신칭의론(以信稱議論)
이행칭의론(以行稱議論)
칸트의 윤리주의
성령을 통하여 일어나는 변화들

선행(善行)의 기능

 

월드뷰 02 FEBRUARY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이상원/ 총신대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이신칭의론과 이행칭의론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이신칭의론(以信稱議論)과 이행칭의론(以行稱議論)이 진자운동처럼 반복하여 나타난 과정이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아니다. 아담 때부터 말라기까지 전 구약시대 동안 이신칭의론이 구원의 길로 제시되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은 구약의 구원론의 중심이었다. 구약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대교가 지배하던 중간기 시대에 진자는 이행칭의론으로 깊이 기울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님과 바울은 유대교의 왜곡된 구약 해석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고 본래 구약의 구원론인 이신칭의론을 회복시켜 놓았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롬 3:21-22).” 그러나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행칭의론을 담고 있던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외경(아포크리파)을 정경으로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행칭의론이 들어와 공로설이 구원론의 중심이 되었다. 성경으로 돌아간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시대의 공로설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구원론임을 확인하고 이신칭의론으로 돌아갔다. 종교의 목적은 윤리적 실천에 있다는 칸트의 윤리주의가 세계를 강타하면서 진자는 다시 이행칭의론으로 돌아가서 현재 신학계에는 이행칭의론으로 기독교를 재정의 하려는 시도들이 자유주의 전통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일어나 있는 상태다.

 

선행의 기능이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은 선행의 기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선행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조건인가? 정통주의적인 개혁주의 신학은 선행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조건이라는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믿음을 통하여 어떤 윤리적 선행에도 의지하지 않고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다. 이처럼 선행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선행은 왜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행이 차지하는 기능은 무엇인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하나 들고자 한다.

네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보자. 1) A는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바른 교리에 걸맞은 바른 행실을 지니고 있다 2) B는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짓된 행실을 보여 주고 있다. 3) C는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행실을 보여 주고 있다. 4) D는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있고, 거짓된 교리에 상응하는 거짓된 행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네 가지 경우에 대하여 타당성의 정도를 순위로 매겨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우선 A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로서 현실 속에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다. 이 경우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 둔다. 나머지 B, C, D는 모두 심각한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어서 순위를 매기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통상적으로 B와 C는 바른 교리든, 바른 행실이든 적어도 하나는 바른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바른 것이 하나도 없는 D보다는 더 나은 입장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도덕적인 영향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B, C보다는 D가 더 나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D는 교리가 잘못되면 거짓된 행실이 나온다는 도덕적인 진리를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 경각심을 갖게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B와 C는 사람들을 도덕적인 혼란 속에 빠뜨린다. B와 C는 사람들을 어떤 도덕적 혼란 속에 빠뜨리는가? B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할 때 사람들은 그 진리가 과연 참된 것인가를 의심한다. 왜냐하면 B는 ‘어떤 말이 진리라면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를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B가 기독교인이라고 가정하자. B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알고 있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기독교인이다. B가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사람들에게 전하면 사람들은 B가 전하는 참된 교리를 의심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진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면 C는 어떤가? C가 자기가 알고 있는 거짓 교리를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참된 교리로 오해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행이 수반되는 말은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단과 거짓 이념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다. 특히 이단은 적극적인 전도활동의 실천과 신비한 영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그리고 거짓 이념들은 일정한 사회문제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행동에 나섬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한다. B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경우이고, C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는 경우다.

두 경우가 다 문제이지만 구태여 어느 경우가 조금 더 위험한가를 따진다면 C의 경우가 더 위험하다고는 할 수 있겠다. 왜냐 하면 잘못 주입된 이론적 교리를 교정하는 것이 이론적 교리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B에 해당한다. 이들에 대하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는 반면교사의 도덕적 권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가 C에 해당하는데 예수님은 이들의 가르침을 단호하게 “믿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마 24:23).

 

신자를 구분하는 방법

B와 C의 경우는 선행이 차지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 준다. 선행은 이론적 진리를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고, 거짓된 진리를 진리로 믿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선행의 강력한 기능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신학은 아주 풍부하고 정확한 근거와 답변을 제시한다. 신학의 답변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죄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죽어 있던 우리의 속사람이 거듭나게 하신다(중생). 우리의 속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가 의로움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의로움을 지닌 의인으로 여겨진다(칭의). 또한 그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의 신분을 부여받는다(수양).” 성령을 통하여 일어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들은 한 사람이 재탄생하는 엄청난 변화이며, 신비롭고 경이로운 사건들이다.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엄청난 내적인 변화는 우선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 안에 이런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는가의 여부는 다른 사람이 들여다볼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어떤 근거에서 판단할 수가 있는가? 근거는 하나밖에 없다. 외형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행위’를 근거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행위’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정확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행위’에 근거한 판단은 오판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행위’ 이외에는 달리 판단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뜻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줄을 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5-16).” 세상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등불이 방 안 전체를 환하게 비치는 광경 곧,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선행이 아름답게 사회 전체에 그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면 전도와 선교는 성공한다.

 

맺으며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선행이 담당하는 역할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공로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일을 하실 뿐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전도전략상 선행이 차지하는 기능은 절대적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선행에 힘써야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선행을 기준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할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선행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선행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과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과 인식에 맞지 않을 때 분명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행위가 발견될 때 그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관계, 교회, 사회에 물의가 일어나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고 단정하여 말하는 일이 자주 목격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되 그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의 여부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반을 두어 하나님이 값없이 부여하시는 은혜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swlee7739@hanmail.net)

 

SANG WON LEE 이상원 |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M)와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톤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