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겼던 학교 교육에 빨간불이 켜지다
2019-02-04믿고 맡겼던 학교 교육에 빨간불이 켜지다
월드뷰 02 FEBRUARY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
최윤숙/ 다음세대 바른교육 대표
1. 혁신학교에서 피어난 전교조의 꿈
큰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엄마들 사이에 고민과 갈등이 생겨났다. 우리가 살고 있었던 아파트는 단지가 크다 보니 두 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어느 학교를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고민이고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A 초등학교는 그 동네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학교였고 B 초등학교는 아파트 단지가 구성되면서 새롭게 생긴 학교였다. 문제는 A 학교는 일 년 후에 혁신학교가 된다는 것이었고 B 학교는 보통의 초등학교라는 것이었다. B 초등학교는 시설이 깨끗하다는 장점과 주변 초등학교들에 비해 평균 학업 능률과 성적이 우수한 학교였다. 단점은 엄마들의 교육열과 치맛바람이다. 누구나 싫어하지만 누구도 빠짐없이 동참하는 것이 치맛바람이다. 다만 태풍이냐 바람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갈등과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혁신학교였다. 그 이유는 치맛바람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누구와 비교하며 힘겹게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고 아이를 초등학교부터 경쟁구도에 가두어 학업에 억압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자유롭게 즐겁게 학교를 다니게 하자’라는 것에 의미 부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혁신학교에서 오히려 부모교육이 비일비재하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의 올바른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말이 선악과의 유혹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빈번했던 부모교육을 한두 번만 들어도 사람 중심 특히, 아이 중심의 자식 우상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육 세미나에 많이 참여했던 또 다른 학부모들은 강의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혼란스러워했다. 보편적인 것이 아닌 강사의 개인적인 견해로 기준을 정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뱀의 미혹과 진리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선전 선동술처럼 거짓을 진실로 믿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여 거짓 믿음을 뿌리내리게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혁신 학교는 아이들의 인권 신장이라는 말로 공부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재미와 즐거움이 우선인 놀이에 중점을 둔 활동 수업을 늘려갔다. 처음에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하고는 교육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만 생각했다. 요즘 초등학교 수업은 다 그런 줄만 알았기에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혁신 학교의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동네 학원에서 A 학교 아이들과 B 학교 아이들의 실력이 비교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교육이 필요해짐에 따라 학원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 동네에 학교가 있다 보니 학교는 달라도 학원이 겹쳐지는 일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학원마다 들리는 이야기는 B 학교 아이들에 비해 A 학교 아이들이 학업에 임하는 태도나 집중력과 성취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떠도는 소문이 아닌 증명된 실력으로 드러난 사실이었다.
‘놀면서 공부시키자’라며 즐거움과 재미로 학교의 이미지를 부각 시키고 아이들을 학업의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미혹의 선악과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악과의 열매는 사망이었던 것처럼 먹음직도 했던 혁신의 선악과는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고 평준 하향 교육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뱀의 유혹은 전교조를 통해 아이들에게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마치 ‘앙꼬 없는 찐빵’과 ‘붕어 없는 붕어빵’처럼 혁신학교에 혁신교육은 없었고 미래학교에 아이들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미혹은 미래학교와 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전교조의 꿈은 봉우리를 터트렸다.
2.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학교 교육
사단은 하나님의 자리를 끝없이 탐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권세를 주셨다. 사단은 그런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가 되려 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선한 것을 악하다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짓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 중간에 다른 수십 개가 넘는 성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적이 없는, 남자와 여자 중간 사이에 수십 개가 넘는 성이 생겨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에서는 성소수자들을 이해해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교육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초등학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너무도 감사한 것은 큰아들 녀석들은 미주알고주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특히 집에서 배운 성경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 등 학교 수업내용과 다르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항상 나와 함께 이야기하며 의문을 풀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교육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비디오를 본 이야기를 아들 녀석이 재미있었다고 한 적이 있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비디오를 통해 본 것이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웠던 모양이다. 또 학교에서 본 비디오 내용의 기이한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에게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인식시키기 위한 밑밥을 투척한 것이다.
3학년 때도 남녀평등을 양성평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려 ‘왜 양성평등이라고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양성평등과 남녀평등을 같은 뜻이라고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의도를 파악한 나로서는 양성평등은 남녀평등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며 같을 수 없다고 가르쳐주었고 쓰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이해시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시험에 양성평등 관련 문제가 나왔다. 객관식 문제에 남녀평등과 양성평등이 각각 보기가 따로 예시되었다. 아들은 점수에 관련된 민감한 부분이었지만 신앙적 양심을 걸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했고 당당히 남녀평등이라고 적어 냈다. 결과는 오답으로 처리되었다. 교묘하게 양성평등과 남녀평등이 같은 의미라고 가르치고 정작 점수를 결정짓는 갈림길에선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 뱀처럼 간교한 전교조의 수법이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은 남녀평등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양성평등으로 땅따먹기에서 또 땅을 빼앗겨 버린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또다시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은 옳지 않으며, 성소수자는 이해하고 존중해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조금씩 야금야금 교육 영역을 점령하기 위해 똑같은 수법을 이용하여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 학교와 사회는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며 교육한다. 조금의 반대 의견도 용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하고 위험성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개념도 없고 비도덕적인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다. 학교는 더 이상 올바름을 가르치지 않는다. 공교육은 이미 훌륭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공공적인 목적을 상실했다.
3. 귀신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 학교
아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는 없애고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는 기념하는 것이 오늘날 학교의 모습이다. 그날이 되면 꼬박꼬박 유치원과 학교에서는 호박 등이나 호박 모양으로 만든 바구니를 만들거나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온다.
학교 지침도, 교육내용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해마다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 기념행사를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크리스마스 장식도 사라진 학교에서 할로윈 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이들과 교사가 교실에 할로윈을 상징하는 귀신 모양을 만들고 붙이며 장식을 한다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는 무엇인가? 죽음의 신에게 제사하는 의식이다.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기 위한 의식으로 악령에게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자신의 모습을 악령으로 착각하도록 괴기스럽게 꾸미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당 푸닥거리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사이비 종교의식을 놀이의 개념으로 가르치며 아이들의 영혼을 잡아 지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는 마치 사단의 하수인 악마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귀신놀이를 다른 곳도 아닌 학교 안에서 합법적으로 하도록 터를 만들어 준 것이다.
마치 동전 두 닢에 영혼을 팔 듯 전교조 교육은 아이들의 영혼을 과자와 사탕으로 팔게 하였다. 상당수의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귀신놀이에 동참하였고 눈앞에 보이는 달콤한 사탕과 과자에 영혼을 넘겨 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열광했고 할로윈 데이는 아무런 통제와 제재 없이 매년 새롭게 기념하며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화로 자리 잡은 할로윈데이에 귀신들은 섬뜩함이 아닌 친근한 모습으로 아이들의 친구가 된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인정해주었고 함께 동조하여 아이들에게 귀신 복장을 더 그럴싸하게 꾸며주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교육 현실을 만들었다.
보다 못한 나는 학부모로서 할로윈 데이를 교실마다 기념하기위해 장식하고 수업시간을 할애해가며 할로윈 축제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항의했다. 당연히 의견을 받아들인 척했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 할로윈 데이는 일 년에 한 번뿐이고 담임도 일 년에 한 번씩 바뀌기 때문에 다음에 우리 아이의 담임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믿고 맡겼던 학교에 거짓의 아비가 켜놓은 빨간불이 켜졌지만 아무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 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을 문화로 받아들이는 학부모가 많다는 것이다. 어떤 학부모도 항의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하는 학부모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상당수가 기독교인인 학부모들이다. 그들의 믿음은 둔감하여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1:21).”
4. 교육의 불신으로 선택하게 된 홈스쿨
평소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바른 인식과 더불어 근대사 공부를 집에서 따로 하고 있던 아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가끔 표현하곤 한다. 그런 아들 녀석이 어느 날 학교 수업 중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속상해하니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학교에서 선생님이 혼을 좀 냈다고 억울해하는 것도 제자의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설명하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선생님이 혼낼만하니까 혼낸 것이라고 도리어 아들을 더 따끔하게 타일렀다. 그런데도 학교 다니기 싫다는, 평소와는 다른 아들의 태도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수업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인물과 그 인물을 왜 존경하는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아들의 차례가 되어 아들은 “저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고 이승만 대통령처럼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발표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담임은 “이승만은 훌륭하기보단 민주주의를 막아선 독재자이고 남과 북을 나뉘게 한 분단의 원흉”이라고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에 동조하여 반 친구들은 아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한마디씩 던졌고 졸지에 왕따 아닌 왕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이렇게 까지 교육이 무너진 현실이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아들의 말을 들어주기 전에 교사를 두둔한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상한마음을 만져 주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은 의로움이 자랑스럽다며 안아주었다.
참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감정을 누르고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인의 의견을 소신껏 발표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받게 된 옳지 않음에 대한 항의였다. 그런 학부모를 상대로 전교조 선생은 교묘한 사상교육을 하려 한다. 믿고 보낸 학교 교육에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설전의 마침표로 얻은 것은 전교조 교사의 실체와 어떻게 아이들에게 침투하여 전교조식 교육을 하는지 알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교육이 계속된다면 더는 참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교조와 제대로 싸워보자, 진짜 치맛바람이 무엇인지 한번 해보자 결의를 다졌다. 결의를 다지기 무섭게 이후로 빈번하게 담임과 싸울 일들이 생겼다. 계기수업을 통한 4.19혁명, 4.16 세월호, 5.18 광주사태 등의 왜곡된 교육이 비일비재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심각성을 인지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진짜 교육을 걱정하는 학부모들과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교육의 실태를 가감 없이 주변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 교과서를 꼼꼼히 봐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들의 바른 교육이 침해받고 있는 것을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식 기 살려준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더 버릇없이 키우는 비효율적인 학교 간섭이 아닌 아이들의 질 높은 교육 향상을 위한 교육을 간섭하자고 설득하였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동조는 하되 뒤로 물러나 관망의 상태로 있고 싶어 했다. 혹시라도 제 자식에게 불이익이 갈까 걱정스러운 마음들을 비추고 하나둘 뒤돌아섰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백히 교육의 불의였고 침묵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길을 혼자라도 가기로 했다.
처절히 홀로 싸웠고 왜곡된 역사교육에 눈 감지 않았다. 아들이 위험천만한 사상교육과 젠더 이데올로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수업을 받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수요자로서의 정당한 목소리를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침묵으로 일관하는 동일한 반응뿐이었다.
아이를 학교에서 빼내겠다, 교육청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성(?) 멘트를 날려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교장을 찾아가 이러한 실태를 적나라하게 항의를 해도 어떤 시정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끝까지 싸워 보려 했으나 학부모들의 둔감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만 깨달았다. ‘내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지’에서 ‘내 아이만이라도’로 방향을 바꾸어 학교를 나와 홈스쿨링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5. 막다른 길 확고한 선택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지만 대안학교의 높은 문턱은 끝내 넘지 못하고 홈스쿨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우여곡절 많았던 초등학교는 한 학기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래서 초등학교는 졸업하기로 하고 중학교부터 집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는데 마음은 흔들렸다. 잘 가르칠 자신도 없었고 홈스쿨을 하게 되면 하던 일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해야 하는 길이었다. 도저히 학교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여전히 갈등을 만들어 냈다.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곱씹어 보면 참 억울하기도 했다. 의무교육이라는 좋은 제도를 만들어낸 분들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의무교육의 혜택을 못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장에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내심 중학교는 그래도 한번 보내볼까 하고 타협하려고 하는 마음이 자꾸 비집고 들어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다 보니 되돌아갈 여지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확고한 선택을 하게 만든 일이 또 터졌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를 다녀온 후 “정말 학교는 안 되겠어요 엄마”하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본즉 이러했다. 부모님과 의견 차이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에 아이들의 답변을 들었던 모양이다. 다들 부모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한 마디씩 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차례가 와서 아들은 “저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없습니다.”라고 발표하자 그럴 리가 없다며 잘 생각해보라고 불만을 이야기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재차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부모에게 불만이 없는 자식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못해 아들은 “불만이 생기거나 의견 차이가 있으면 항상 엄마와 대화를 하면서 의견 차이를 좁히고 서로 이해하게 됩니다.”라고 말하자 “그럴 때 가끔이라도 너의 감정대로 이야기를 해라. 그것이 반항이 되어도 상관없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아들은 오히려 집에 와서 학교교육에 힘겨움을 토로했던 것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 6:16).”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성경 어디에도 자식에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부모에게 반항하라고 가르치고 말씀하신 것이 없다.
이번에는 감정을 다스릴 여유 없이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담임선생님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교육,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우리의 주관자로 모시고 모든 우선순위에 하나님을 두는 교육이다. 두 번째는 효를 바탕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교육이다. 세 번째는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교육과 세상의 흐름을 주도한 성경적 세계사를 바르게 아는 교육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 모든 교육을 철저히 무너트리고 새로운 교육을 시작했다.
인본주의적 교육,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어야 하는 이상한 교육, 인종 혼합 교육, 음란과 음행의 성문화 교육, 사회주의 사상 교육, 공산당의 이념교육, 가정의 기본 상식의 틀을 깨는 남자보다 애견이 우선인 교육 등등 새로운 교육의 틀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이 모든 교육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육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뒤집는 사단의 전략적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철저히 지우고 미워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이것이 현시점에 다른 나라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앞에서 자행되고 있는 심각한 교육 문제인 것이다.
다음 세대의 미래가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도 없다. 지금이라도 자각하고 인식하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소망이, 이 나라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학교 밖 아이가 되었고 학교 밖 아이의 부모라 학부모가 될 수 없지만 다음 세대를 향한 거짓 교육과 사악한 교육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공교육을 포함한 무너져가는 대안학교 안에 아이들에게 진리가 선포되고 바른 교육이 실행될 때까지 선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7).”
<samma-1@hanmail.net>
글/ 최윤숙(다음세대 바른교육 대표)
story of Rhee study cafe 대표이자 교육을 통해 역사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한 다음세대 바른교육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