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誤讀) 혹은 현실을 핑계 삼은 성서의 자의적 해석

2019-01-04 0 By worldview

오독(誤讀) 혹은 현실을 핑계 삼은 성서의 자의적 해석

 

월드뷰 01 JANUARY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1. 뜬금없는 영화 이야기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동부 전선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총살형에 처해진다. 죄목은 내통과 반역. 집행에 나선 프랑스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양이를 쏴 죽였다. 대체 고양이가 무슨 재주로 적군과 내통을 하고 국가 반역이라는 엄청난 죄까지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연은 이렇다. 프랑스 참호와 독일 참호를 오가던 고양이가 있었다. 병사들은 고양이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먹이도 주면서 전쟁의 시름을 달랬다. 어느 날 고양이 목에 전에 없던 목걸이가 걸려 있어 열어보았더니 독일군이 쓴 메모가 들어있었다. 어느 집단이나 어이없는 인간은 꼭 하나씩 있는 법이다. 장교 하나가 이걸 보고랍시고 적어 냈고 얼마 후 이 보고서는 프랑스 장군의 책상 위에까지 올라간다. 장군은 원칙대로 해야 한다며 고양이를 체포했고 판결 끝에 총살 명령을 내렸다. 종(種)의 차이를 무시하고 미물(微物)에게까지 이토록 가혹했던 것이 1차 대전의 전장이었다. 그런데 고양이도 아니고 ‘무려’ 인간이 적군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부딪치는 일이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2005년에 개봉한 ‘메리 크리스마스’는 이 놀라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내용부터 보자.

 

 

영화 <메리크리스마스>, 2005  (프랑스 전국 500여개 관에서 동시 개봉하여 박스 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벨기에, 루마니아 합작 영화)

 

 

1914년 12월 24일, 프랑스 북부의 한 전선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 연합군이 지지부진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쟁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다. 사기도 올리고 향수도 달랠 겸 영국군은 백파이프 반주에 맞춰 ‘고향을 꿈꾸네’라는 민요를 합창했다. 그냥 듣고만 있으면 음악의 나라 독일이 아니다. 질세라 마침 병사로 참전하고 있던 테너 가수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받아쳤고 노래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독일 병사들이 친 게 아니었다. 영국군 진영에서 보낸 환호였다. 예상치 못한 박수에 ‘필’을 받은 테너 가수는 ‘참 반가운 성도여’라는 성가를 부르며 아예 참호 위로 올라섰다. 하얀 눈밭에 피를 뿌리고 쓰러져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사격은 없었다. 이 황당한 상황을 수습해야 했던 프랑스, 영국, 독일 세 나라 장교들은 시한부 휴전에 합의하고 병사들은 와인을 나눠 마셨다. 다음 날은 서로 시신을 수습하고 함께 미사를 드렸으며 심지어 축구 경기까지 벌였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은 이때부터다. 적군 참호에 포격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 장교에게 자기네 진지로 피신을 제의한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이 독일군 포격을 피해 독일군의 안내를 받아 독일군 참호로 대피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쯤 되면 이미 전쟁터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다. 다만 특정 지역에서 며칠 동안 한꺼번에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다. 영화는 전선(戰線) 여러 곳에서 있었던 매우 비정상적인 일들을 모아 하나로 엮었다. 대체 전선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1918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도 이런 식의 ‘비공식 휴전’은 드물지 않았다. 전선 중에서 비교적 조용했던 구역에서는 양측 병사들의 암묵적 이해 아래 서로를 결사적으로 죽이려드는 노력이 ‘자제’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병사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졌다. 물론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함구했다. 자신의 편지가 불러올 파장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조심성 없는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초기에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병사들의 편지에 대한 검열이 엄격해진다. 병사들 전부가 모두 비공식 휴전을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병사는 편지에서 “적군을 참호에 들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독일군 참모 시설이 더 좋아서 우리 모두 그쪽으로 갔다”는 편지도 있었는데 영화 속에서 포격을 피해 적군을 아군 참호로 대피시키는 장면은 이 편지 내용들을 토대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나니

 

생존 욕구와 군기의 느슨함만으로 이러한 비공식 휴전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1차 세계 대전의 성격을 따져보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아시다시피 제 1차 세계 대전은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물론 총력전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은 나폴레옹이었지만 그게 시스템화 되어 현실에서 나타난 것은 1차 세계 대전이 처음이었다. 총력전이란 간단하게 말해 국가 전체의 역량이 전쟁에 투입되는 것을 말한다. 이전까지의 전쟁이 왕실과 왕실, 국가와 국가와의 대결이었다면 이때부터는 국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고 국민 대 국민의 대결로 전쟁의 양상이 바뀐 것이다. 증오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국은 면밀하게 사전 작업을 벌였다. 영화 첫 부분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인데 대사가 이렇다.

 

“독일이라는 흔적을 지도에서 없애기 위해선 그 종족을 몰살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남겨선 안 됩니다. 아이들이 울어도 무시하고 여자들도 목을 베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시 일어납니다. 지금 죽는다면 그럴 수 없지요.”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적이 있어요. 증오와 원한, 시기에 가득 차 그들은 독일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단 하나의 적이 있어요.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그 적의 이름은 영국입니다.”

 

 

영화적 설정이 아니다. 1895년에 발행된 회보를 보면 프랑스 공립교육장관은 8세 이상의 소년들에게 실탄을 장전한 라이플 사격 훈련을 지시했다. 영국과 독일의 학교에서도 상대를 비난하는 교육이 실시됐다. 이렇게 배우고 의식화된 아이들이 적을 죽이기 위하여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런 비공식 휴전이 암암리에 벌어졌던 것일까. 처음 하는 총력전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배웠지만 몸에까지 총력전의 개념이 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관대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프랑스 중위는 적군과 놀아났다며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칠면조를 뜯으며 전쟁을 지시하는 인간들보다 독일인이 더 가깝게 느껴져요.” 프랑스 중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전쟁을 주도했던 독일 빌헬름 2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다. 빌헬름 2세의 외종매부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다. 좁게 보면 집안 분쟁이었고 여기에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일반 국민들이 휘말려 들어간 것이었다. 대체 프랑스 시골의 농부와 독일 산골짝의 목동이 목숨 걸고 싸울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학교에서 이런 교육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든 참아줄 수 있다. 어차피 국가주의는 학교와 군대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니까. 영화에서 정말 충격을 받은 장면은 따로 있다. 한 사제의 강연 장면이었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에게 칼을 주러 왔다. 민간인들만이 사는 도시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자식이라 볼 수 있는가? 성탄절에 아이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주님의 자식이라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주님의 도움으로 독일인들을 죽여야 한다. 노인이든 아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전쟁 중이던 1915년 웨스트민스터의 한 주교가 실제로 한 연설이었다고 한다. 신의 뜻에 따라 이교도를 죽이라고 독려했던 십자군 전쟁 당시 주교들의 연설에서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다. 전쟁을 합리화하고 이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는 일은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흑역사’일 뿐일까. 아니다. 이런 식의 현실을 왜곡한 성경의 자의적 해석은 오늘 날에도 여전하다. 아래는 2017년 7월 30일자 가톨릭 신문에 실린, 성직자가 쓴 글의 일부다(다소 길지만 읽고 나시면 왜 이렇게 인용이 길었는지 납득하실 것이다).

 

‘시원하게 뚫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다 남김천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소성리를 향하는 길은 여느 시골 풍경처럼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마을 어귀에 이르면 사뭇 풍경이 달라집니다.
“평화가 안보다! 한반도 사드 배치 중단하라!” “사드 가고 평화 오라!” 현수막들이 즐비합니다.
(중략)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평화이신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답니다. 이 칼,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아니라 평화를 짓밟는 이들에게 쥐어질 칼입니다. 평화이신 예수님에게 향할 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이 칼에 쓰러지심으로써 당신이 평화이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칼을 든 이들은 침묵과 굴종이 평화라고 강변하지만, 십자가라는 칼에 쓰러지시는 힘없는 예수님은 정의와 사랑이 평화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북한의 핵무기라는 칼에 한미 당국은 사드라는 칼로 맞서려 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반도 안에서 이미 그 실효성이 의심되는 사드 자체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칼과 칼이 부딪히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설사 당장 죽지 않더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불안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평화는 평화고, 칼은 칼일 뿐입니다. ‘평화를 위한 칼’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미 사드 배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한반도의 위기가 진정되고, 평화가 오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합니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통해 이룩됩니다. ‘평화’와 ‘칼’,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어느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1차 세계 대전 당시 주교의 연설과 이 글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는가. 하나는 전쟁을 옹호하고 하나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두 글은 완벽하게 같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성서를, 신의 뜻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필요했다면 주교는 ‘평화’를 주장했을 것이고 신문은 ‘전쟁’을 옹호했을 것이다. 사회의 제반 영역들은 각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사법부가 그렇고 행정부가 그렇고 입법부가 그렇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은 이 모든 선이 무너진 상황이다. 종교마저 이 대열에 합류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진짜, 정말, 절대로 없다.

 

< collecter1@naver.com >

글/ 남정욱(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작가이며 출판영화방송 등 문화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사>, <결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