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

2018-10-23 0 By worldview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가 피운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를 해체하는 문화 교사(敎唆)
자유-민주주의 문화가치의 재탈환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

 

월드뷰 10 OCTOBER 2018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1.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가 피운 자유-민주주의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포화 속으로>를 합친 말이다. 합쳐도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두 쌍의 동일하고도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두 영화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주적(主敵)이 다르다. 둘째, 두 영화는 휴머니티가 주된 테마라는 점에서 같지만, 역시 주적이 다르다. (하나는 주적이 없고, 하나는 주적이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장동건)는 가족의 생계와 동생 진석의 대학진학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이다. 평화로운 6월의 어느 날, 사이렌 경보와 포성이 온 장안을 메운다. 진태는 가족과 피난길에 올랐지만 길에서 불시에 징집되어 끌려가는 동생 진석(원빈)을 데려오려다 자신마저 징집당해 수송열차를 탄다. 진태는 아직 어린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일념으로 물불 안 가리고 전투에 임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전과를 올리면 동생을 돌려보낼 수 있다는 암시를 대대장이 흘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제는 전쟁터에 적응해나가지만 언제부터인가 형 진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동생을 위한 것인지 무공훈장을 위한 것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냉혈한이 되어가는 것이다. 진태는 내면의 혼돈을 겪다 군과 결탁한 우익단체에 의해 동생 진석이 살해되었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상관을 죽이고 월북해 북한군 전사가 되고 만다. 이 영화의 주된 요지는 한마디로 전쟁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는 것이며, 핵심 주제는 이것이다.

‘북한군과 남한군이 다를 게 뭐 있느냐!’

<포화 속으로>의 주인공 오장범(T.O.P)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진석만큼이나 어린 학생이다. 앞서 진석이 서울 종로에서 징집되었다면, 장범은 포항에서 학도병으로 사변을 맞았다. 곳곳에서 인민군이 승전을 거두며 진격해 내려오고,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에 국군의 패색이 짙기만 하다. UN이 대대적인 파병을 결정했지만 이미 낙동강까지 밀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남은 모든 병력에게 낙동강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포항 역시 위중한 전선이다. 이곳이 뚫리면 부산으로 직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동강으로 떠나는 3사단은 부득이 어린 학도병 71명에게 포항을 맡긴다.

“이제부터 이 지역은 학도병인 제군들이 맡는다.”
“우리끼리만요?”

총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어린 학생 가운데 유일하게 전투현장 경험이 있는 장범을 중대장으로 세우고 3사단은 낙동강으로 떠난다. 소년원 대신 학도병을 자원한 문제아 갑조(권상우)는 패거리지어 사사건건 장범의 명령을 무시하다 끝내 이탈해 가버린다. 갑조는 가던 길에 인민군 유격대 병력이 낙동강으로 가지 않고 포항으로 급습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지만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이내 포항을 지키고 있을 동료 학도병들을 떠올리며 빼앗은 트럭을 몰고 돌아와 장렬하게 싸우다 학도병들과 함께 죽는다. 그렇게 낙동강을 사수하고 돌아온 3사단 병력을 맞이한 것은 전멸한 소년들의 시신이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여기를 지켜요? 우리끼리만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사수하고 지켜낸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덕택에 우리는 천편일률적인 전쟁 영화만이 아니라, 주적을 상실한 전쟁 이야기를 포함, 다양한 전쟁 이야기를 영화에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의 시대에 그것을 보는 시각, 특히 전문가로 자처하는 집단의 시각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2. 자유-민주주의를 해체하는 문화 교사(敎唆)

군사정권의 격동기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선 후에도 한국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포화 속으로’(2010), ‘국제시장’(2014), ‘인천상륙작전’(2016)등 꽤 다작의 전쟁 영화를 내놨다. 하지만 이 다양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그 자체로써 비평가들의 시각에 고착화된 억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그 고착화된 시각을 다음과 같은 도표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

몇 가지 분석을 입혀보면, 1) 전문가는 대체로 관객보다 저평점을 가하는 방식으로써 자신들의 객관성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 전문가는 특정 영화들, 이를테면 ‘포화 속으로’,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강박에 가까운 혐오를 감추지 못한다. 3) 그 세 영화의 공통점은 공교롭게도 주적을 상실하지 않은 영화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끝으로 위 도표에서는 중요한 규칙성 하나가 또 읽힌다. 4) 전문가들은 주적을 청산하지 못한 이 영화들에 대해서는 기필코 평점을 가해야 했지만(주로 저평점), 그렇지 않은 영화(‘동막골’, ‘JSA’,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는 굳이 평점을 가하지 않아도 좋다고 여기는 것 같다. 가령 네이버와 씨네21은 한 곳씩만 평점이 비어 있고 포털 다음(Daum)은 세 곳이 비어 있는 등 데이터의 불규칙성으로 보이지만 세 매체가 일제히 ‘포화 속으로’,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평점을 비워두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평가단 개인들의 경향이라기보다는 이들 매체가 지닌 경향성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분석이 다소 과도한 것도 같지만, 꽤나 실증적인 분석이라는 사실을 다음 도표를 보면 실감할 것이다.

상기의 두 영화는 <포화 속으로>와 같은 해 한두 달 상간으로 개봉한 영화로서 둘 다 작품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수위 높은 에로물이다. 이 평가단이 대체 어떤 면에서 전문가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화를 통해 대중을 교사(敎唆)하는 이러한 전문가 행위를 우리가 선전(propaganda)이라 부른다. 심지어 근래에는 이러한 선전으로 역사까지 손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 거대 문화 카르텔이 오늘날 저런 학도병만한 연령의 우리 아이들이 읽는 각종 교재에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인, 비민주적 다양성의 함몰이 아닐 수 없다. 에로물에는 후하고, 전통에는 가차 없는 그 손길들이 주도하는.

 

3. 자유-민주주의 문화가치의 재탈환

이와 같이 문화가 대중을 교사하는 시대에 이를 일깨우고 그 문화가치를 환수해내는 일은 오로지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책의 종교(Religion of the Book)인 까닭이다.
기독교가 책의 종교라는 사실이 어떻게 이 문화 담합을 깨뜨리는 능력이 되는지, 우리는 그 적절한 실례를 기독교 세계관의 한 예형에서 들여올 수 있다. 이를테면 AD 1세기 역사가를 자처한 선전가(propagandist)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작품을 읽어내는 기독교인의 시각이다. 그의 방대한 작품 중에는 공교롭게도 영화 <포화 속으로>와 강한 유사(similarity)를 띠는 대목 하나가 지나간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열심당원 일부가 ‘마사다’라는 지대로 퇴각해 그 곳에서 일전을 벌인 기록이다.

마짜다(מצדה)!라는 말은 그 자체가 ‘요새’라는 뜻이다(‘마사다 요새’는 틀린 말).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결코 진 것이 아님을 함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이 그곳을 장장 3년이라는 기간을 포위하고 있을 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총사령관 엘리아살은 ‘로마인에게 굴복하지 않는 참 자유’라는 미명 아래 집단 자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유대의 법도는 자살을 금하였기에 죽는 방법은 이러했다. 전체 인원 960명 중에서 100명을 먼저 선택하여 이들이 자기 가족과 친구를 먼저 죽인다. 그렇게 860명이 서로 부둥켜안고서 죽었다. 이제 남은 100명 중 다시 10명을 선택하여 이들이 나머지 90명을 죽인다. 10명이 남은 것이다. 그러고서 마지막 최후의 1인을 택하였고, 그 한 명은 9명을 죽이고서 마사다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죽는다. 하지만 이 때, 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5명의 아이와 노파 2명이 지하수도관에 숨어 생명을 건졌다. 이들이 죽지 않고 나가 로마인에게 이 이야기를 알렸고, 요세푸스 역시 자기 글에 이 ‘마사다 전투’ 이야기를 실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요세푸스라는 문필가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필치를 이룬다.

“로마군이 처음에는 이 ‘절망적인 보고’를 믿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 없다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타오르는 요새의 불을 완전히 끄고 산처럼 쌓인 (960구의) 시체를 보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적에게 벌어진 비극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기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폄훼하는 이 맹목적인 죽음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 최후를 맞은 그들의 결단력 있는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요세푸스의 이러한 역사 진술이 지나치리만큼 극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의 진술 속에 주적이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 「유대 전쟁사」 7권 9장 ‘마사다 전투’에서 이 독특한 죽음의 방법을 기술하고 있지만, 실은 3권에서 유대인 장교였던 자신이 자기 부대원들은 다 죽고(자결) 자기만 홀로 (구사일생?) 살아남은 전거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The Jewish War VII.9, 10; III.362-386 참조). 즉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극화하는 이 요세푸스 특유의 역사 필치는 바로 유대인이면서 로마 제국으로 전향을 한 자기 신분에 기인한다. 이 문필가의 글 속에서 유대인의 적 로마군은 언제나 주적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사 역사의 예형은 어느 날 갑자기 주적이 사라져버린 우리 사회의 역사를 가장한 문화적 술기(述記)의 모호함과 그대로 평행한다. 분명한 한국전쟁 영화임에도 ‘북한군과 남한군이 다를 게 뭐 있냐’는 명제로 임하는 것은 ‘우리끼리만요?’보다 훨씬 극화된 것이다. 이것은 진태/진석의 에고라기보다는 그것을 유통시키기로 담한한 사회의 에고로 보면 별 무리가 없다. 역사를 감성(pathos)으로 잠식시키는 이러한 문화 침공의 시대에 우리를 깨우는 유일한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단련해온 로고스(logos)의 법식인 것이다.

요세푸스의 문헌이 지극히 주관적 술기임에도 유대-기독교 역사의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속해 온 이유는 그것이 몇 안 되는 배경사를 조명하는 문헌이었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유대-기독교인 가운데 아무도 자살을 칭송하는 이들은 없다. 왜냐. 이미 성서라는 로고스가 중심에 굳건히 자리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역사-교과서’를 분류하는 독법에 상응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제가 대한민국 마짜다의 한 비극으로서 자리한다면, <포화 속으로>라는 작품의 요체는 대한민국 마짜다의 정신, 곧 건국의 총화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3·1운동 선국선열의 정신을 어린 선열들이 행동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비평가들의 평점으로 감소시켰다고 감소되는 사안이 아니기에 로고스인 것이다.

 

에필로그:

1950년 8월 10일 쾌청

어머니,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두고 10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네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같이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 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깐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일기 –

▲ 1950년 포항여중 전투에 실제 참전했던 71명의 학도병 중에서.

 

YOUNG JIN LEE 이영진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