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사람’이 아닌 ‘국민’을 위한 법체계
2018-09-25모세 율법의 현대적 적용
국민에서 사람으로 변경한 법체계의 문제점
법의 틀에 윤리와 종교를 담으려는 시도의 비극
헌법의 주체는 누구인가?
월드뷰 09 SEPTEMBER 2018●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1 |
이상원/ 총신대 신대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현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헌법 개정안에서뿐만 아니라 최근 절차적 과정의 불법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국가인권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에서 재차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부터 사람으로 변경하였다. 현 정부는 이처럼 기본권의 주체를 확대한 이유를 국제사회의 기대와 외국인 200만 명 시대라는 새로운 사회 변화를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문재인 정부의 기본권의 범위 확대 시도는 과연 대한민국의 헌법이 세계시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불만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역차별의 문제, 그리고 외국인 난민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 난민들로 인해 예상되는 사회적 혼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비판과 저항을 받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헌법상 기본권의 확대는 국가와 인종과 성별과 빈부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하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가페 사랑을 베풀 것을 촉구하는 기독교 윤리와 부합하는가? 또한 이 시도는 법에 대한 성경의 이해에 의하여 지원받을 수 있는가?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기독교적 규범과 법 이해는 헌법의 주체를 국민으로부터 사람으로 확대하는 것을 반대한다.
모세 율법의 현대적 적용 –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성경은 헌법의 위치와 기능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성경의 법사상은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세 가지 유형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세 가지 유형의 법체계는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가리킨다. 물론 모세의 율법 안에는 이 세 가지 법체계가 분류가 되지 않은 채 섞여 있다. 그런데 모세 시대에는 이 법체계들을 구태여 산뜻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었다. 모세의 율법을 모두 합해도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분류한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는 정치 지도자, 경제 지도자, 종교 지도자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는 ‘원시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역으로 분화되고 발전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모세의 율법의 현대적 적용을 말할 때는 각각의 영역에 상응하는 율법의 항목들을 모은 다음, 각 영역별로 분류하고, 각 영역의 특성에 맞는 해석과 적용을 말해야 한다. 모세의 율법을 분류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이 세 가지 법체계로 분류하는 것이 표준적인 분류법이다.
도덕법은 사랑의 대강령(구약: 레19:18; 신6:5, 신약:마 22:37-40), 황금률(구약: 출23:9,신10:19, 신약: 마7:12), 십계명, 동성애를 포함한 성 윤리와 관련된 규례들(레18장), 산상수훈(마5-7장)을 가리키는 법체계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체계다.
의식법은 제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의식을 규정한 법체계다. 절기, 제사, 정결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 질병, 성막, 제사장의 의복 등을 규정한 항목들이 의식법으로 분류된다. 구약시대의 종교적 의식들은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사건을 예표 하는 법체계로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또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자구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법이 신약시대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의식법 그 자체를 자구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의식법이 상징하는 의미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오늘날도 모두 유효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율법 안에 있는 의식법들 가운데 신약시대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시민법은 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정치 및 경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하여 주신 법체계로서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한다. 시민법은 도덕법을 범함으로써 이웃과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법률들과, 행정조직에 관한 규례들 곧, 70인 장로회, 백성들을 10명, 50명, 100명 등의 단위로 나누고 부장을 세워 재판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라는 규례들을 가리키는 정치적인 규례들과, 희년 제도, 안식년 제도, 토지 제도, 이자 제도 등을 규정한 경제적인 규례들로 구성된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기간 동안 살아야 하는 특정한 백성들 특히, 백성들 전체가 신앙을 고백하는 신정적 공동체의 경영을 위하여 주신 실정법 체계이기 때문에 지역과 시대와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성격이 달라지는 곳에서는 자구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법이 신약시대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시민법 그 자체는 자구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없으나 시민법의 배경에 깔려 있는 법의 정신이자 법철학인 정의의 원리는 모든 시대의 기독교 정치윤리의 보편적 규범이 된다.
헌법은 ‘사람’이 아닌 ‘국민’을 위한 법체계
이와 같은 성경의 법체계에 대한 분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시민법에 속하는 헌법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인 규범체계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서, 시대가 바뀌고, 지정학적인 위치가 바뀌고 구성원들이 바뀌면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변경될 수 있는 법체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법은 보편적인 개념인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법체계가 아니라 ‘국민’을 위하여 제정된 법체계다.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그의 『이론적 사유의 신비평』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에서 법의 양상, 윤리의 양상, 믿음의 양상을 구별하고 법의 양상 위에 윤리의 양상을 두고, 윤리의 양상 위에 믿음의 양상을 두었다. 이런 구도의 의미는 법의 양상은 믿음과 윤리의 양상의 지도하에 있어야 하며, 또한 믿음이나 윤리에 비교해 볼 때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두셨음을 말함으로써(롬2:14,15) 윤리의 양상은 보편적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을 두시고 모든 자연만물 안에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두셨다(롬1:19-20)고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의 양상 곧 종교의 양상이 보편적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시사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시민법이 보편적인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시사를 한 일이 없다. 법은 외형적인 사회구조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윤리는 외형적 사회구조를 지도적으로 포괄하면서 마음과 양심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믿음은 외형적 사회구조와 마음과 양심을 모두 포괄하면서 영혼의 깊은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믿음의 양상보다 윤리의 양상이 더 폭이 좁고 경직되기 마련이며, 더욱이 법의 영역은 믿음과 윤리의 영역들에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폭이 협소하고 경직이 심하다. 따라서 믿음의 영역이나 윤리의 영역에 속한 사안들을 법으로 정의하고 규제할 때는 매우 위험한 경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특정국가의 헌법이 보편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법의 틀에 윤리와 종교를 담으려는 시도의 비극적 결과
모든 국가는 법의 양상 안에서 작동하는 기관이다. 법 – 여기에는 헌법이 핵심으로 포함 된다 – 이 없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법은 곧 국가다. 국가는 특정한 지역과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국민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가 이처럼 국민을 위하여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사람’을 위한 기관으로 변역시키려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것이 공산주의 국가들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사람’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인민’을 위한 국가를 지향했다. 이 말의 의미는 법을 윤리와 믿음 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인식하고 법으로 윤리와 믿음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법이라는 좁고 경직된 차원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힘으로 법 보다 훨씬 넓고 탄력이 있는 마음, 양심, 영혼의 깊은 차원에서 작동하는 윤리와 믿음의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법의 틀로 윤리와 종교를 담으려고 하니 윤리와 종교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 구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남은 러시아는 국민들의 윤리 문제에 대하여 지도하거나 발언하는 사람이 없는 윤리적 진공상태에 빠져 있다. 구소련 시대의 후유증이다. 믿음, 곧 종교가 무너지면 그 자리를 무시무시한 무신론적인 유물론이 대신한다. ‘사람’을 ‘법’에 가두려고 한 시도의 비극적인 결과다. 지금 우리 사회에 바로 이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헌법을 ‘국민’을 위한 법이 아닌, ‘사람’을 위한 법으로 개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를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구성원을 고유한 대상으로 해야 하는 국가가 부당하게 그 영역을 확대하여 전 세계 시민들을 포괄하려는 것은 국가주의적 발상인 동시에 국가 해체주의적 발상이기도 하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인 동성애의 문제를 법, 그것도 헌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도 이런 발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들은 국가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윤리’와 ‘믿음’의 기관들 곧,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민간 기관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루어서 해결해 나가고 국가는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