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구빈 정책의 재검토

국가주의 구빈 정책의 재검토

2018-09-21 0 By worldview

국가주의 구빈 정책의 재검토

 

월드뷰 09 SEPTEMBER 2018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김행범/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종교들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깊게 몰입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에도 가난한 자로 복음을 알게 하는 것(누가 4:18)이 들어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고,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도움이 되고 잊지 않으시며 대적자의 손에서 피난처가 되시고 건지시며 존귀한 자로 세우신다. 그들의 입장에서 판단하며 그들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신다(시편 102:1, 시편 14편, 시편 70편). 즉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깊은 관심을 들인 사람들이다.

둘째, 가난한 자들을 도울 책무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명히 지적하신다. 그들을 도움이 곧 복 받는 길이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면 주를 존경하는 자로 인정받고, 그들을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게 된다(시 41, 잠 14:31, 잠언 28:27). 이것은 가난한 자를 도울 때 얻는 긍정적 인센티브(positive incentive)이다. 그들을 돕지 않을 경우에 받을 징계도 지적한다. 그들을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고, 그들을 학대함은 죄악이요, 학대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죄이며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가 된다. 이것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을 때 징책으로 받는 부정적 인센티브(negative incentive)이다(잠언 14:31, 잠 17:5, 잠언 28:27).

셋째, 특별히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가져야 할 별도의 말씀들이 있다. 가난한 노동자를 학대하지 말며 그 임금을 체납해선 안 된다. 가난한 자에게는 임금에 대한 열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임금 체납은 죄가 된다고 경고한다. 또 생산물(곡식, 올리브, 포도를)을 수확할 때 그 일부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어야 한다(신 24:14, 신 24:15, 신 24:19-21, 레위기 19장). 이는 오늘날 기업가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사항들이다.

 

사회주의적 대안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국가가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정서는 페비언주의 이래로 사회주의가 쉬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생시몽, 푸리에 등)은 자유 시장경제를 새로운 사회 경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협동조합’을 정치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이 갑자기 강조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은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가 지속 가능한 복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협동조합은 경영자가 곧 조합원이니 누구를 해고하는 일이 없다거나, 사회적 기업은 영리성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식의 주장은 희망일지 모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협동조합 방식으로 오늘날 큰 기업을 운영할 수 없고 사회적 기업의 성과 실태는 사실 정부의 인건비 지원만 끊어지면 경영이 즉각 위태로운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그 성과 자체도 비공개인 경우가 현실이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길은 해고되지 않도록 구조를 만드는 것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더 부를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속 가능성이 없다면 결국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은 시장에 의해 노동자만이 아니라 노동자 및 경영자가 다 해고된다. 더욱이, 무산자들의 천국을 실천했던 공산주의도 실패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을 돕는 우리의 대안은 자유 시장 경제를 토대로 모색되어야 한다.

자유시장 경제 속 빈부 차이를 강조하다 보면 ‘부자는 악, 빈자는 선’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누가 16: 19-31)를 읽다 우리는 자칫 지옥에 간 걸 보니 부자는 악이요, 천국에 간 걸 보니 빈자는 선이라는 그릇된 생각의 틀에 빠지는 것이다. 성경은 부자라서 지옥으로 가고 가난해서 천국에 간 것이란 것을 명시한 적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족장 시대의 거부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나 다윗 및 솔로몬은 지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포도원 주인은 포도 수확을 위해 이른 아침 일꾼을 고용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 고용 계약에서 임금은 당시 하루 시장 임금인 1데나리온으로 정해졌다. 한낮에 다시 노동 시장에 나가 일꾼을 고용한다. 일이 끝나는 직전 저녁 또 다른 일꾼을 고용한다. 일을 마친 후 임금을 줄 때 셋 모두에게 하루의 시장 노동 임금(1 데나리온)을 지불했다(마태복음 20: 1-16). 혹자는 이를 보편적 복지의 근거로 든다. 모두에게 1데나리온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이 성경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경제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에 있다. 내가 받은 임금은 계약대로 그대로 주어졌다. 다만 나보다 적게 일한 타인들이 얻은 임금이 나보다 적지 않다는데 따른 시기가 문제이다. 그리고 적게 노동한 자에게 더 주는 것은 주인의 은총이지 그들이 요구할 권리는 아닌 것이다.

보편주의 복지는 필연적으로 타인들의 재산을 내게로 더 많이 이전할 것을 요구한다. 보편적으로 제공할 복지 항목이 늘어남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혹 정부가 주는 복지혜택 예컨대, 노인 수당을 더 깎아달라고, 혹은 이러이러한 항목은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위의 셋 모두에게(보편적으로) 같은 복지를 지불하는 것이 복지청구권으로 인정된다면 이제 포도원 주인은 아침에 일꾼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성경의 핵심은 업무량과 상관없이 동일 임금을 주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침부터 일하러 나올 품꾼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아마 모든 일꾼은 저녁 직전에만 고용되기를 원할 것이다.

또 보편적 복지는 도와야 할 삶의 항목들이 특정한 것에서 시작하여 널리 확산되게 한다. 임금 외에 다른 정신적 가치, 예컨대 문화적 복지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혹 정말 그런 수준까지 베푸는 훌륭한 기업가나 자본가가 있다면 우리는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꾼이 포도원 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닌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복지에서 이처럼 자격(entitlement)과 권리(right)가 혼동된 경우가 많다.

 

고용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최선의 복지

여기서 주목할 또 다른 점은 품꾼들을 돕는 방법이다. 주인은 길거리에서 돈을 나눠주지 않고 포도원 일로 사람을 고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임금을 받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장 경제 현실에서 보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이다. 포도원 주인이 소득이 낮은 품꾼을 돕는 최선의 길은 시장경제의 노동계약을 통하는 것이다. 일 안하고 그냥 돈을 나누어 주는 관계는 더 편리한 소득 이전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일꾼의 건강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노동을 당당히 거래하고 그 수고에 합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일꾼에게 더 나은 길이다.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시장 경제의 당당하고 책임 있는 주체, 남의 소득을 이전 받는 지위에서 그 소득을 자본가와 공동으로 창출하는 주역으로 말이다. 지속적으로 품꾼에게 임금을 주려면 즉, 계속해서 이런 고용 관계가 유지되려면 이 포도원이 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시장 경제의 본질인 카탈락시(Catallaxy) 곧,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결과이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하루 임금인 1데나리온 보다 적게 준다면 품꾼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포도원은 유지될 수 없다. 또 일꾼들이 하루에 해당되는 노동을 하지 않은 채 하루치 임금을 요구한다면 포도원 주인의 선의만으로는 이 포도원은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역시 망할 것이다.

 

국가가 최선의 구빈 대안인가?

개인의 도움만으로 가난한 사람을 담당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의 상황에 관한 정보를 모르고, 재원이 부족하며, 필요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경우 개인이 이웃을 돕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국가가 복지를 담당한다. 이런 최소한의 복지 기능 중 가장 기본이 공적부조(public aid)이다. 저소득층에 대한 기초생활 및 의료보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개인들 간의 부조로 빈곤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사회보험(social insurance) 제도 및 각종의 복지 서비스들이 추가된다.

우리는 이 경우에 큰 가정을 했다. 민간(개인, 기업, 종교단체 등)이 빈곤한 이웃을 돕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 국가가 이를 잘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가라는 것은 실은 추상적 개념이고 실제의 복지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그 안의 또 다른 개인, 즉 정치인 및 복지 관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개인보다 더 이타적이고 이웃 사랑에 더 충만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개인은 이기적이어서 스스로 남을 잘 도우지 않는다고 불신하면서 국가 속 또 다른 개인인 공무원은 더 이타적이고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을 더 잘 도울 것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실은 복지 공무원 역시 타인과 똑같이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진정 그들이 우리보다 더 이타적이고 헌신적 복지 공무원이라면 아예 국가가 주는 월급을 안 받고 일하겠지만 그런 복지 공무원을 본 적이 없다.

이제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국가’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의 국가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느 여름 방학 중 태풍이 닥쳐 많은 이재민이 생겼다. 온 국민 사이에 그들을 돕기 위한 성금을 보내는 분위기가 되자 대학 당국도 동참하였다. 교직원 당 얼마씩의 기준선을 제안하며 단과대학 및 학과별로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수가 출타 중이어서 학과 조교는 우선 제 돈으로 이를 대납하고 나중에 그분에게 받기로 했다. 평소에 거대 담론으로 사회정의를 외치던 그가 정작 귀국 후 대로 하며 보인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일은 국가가 해야지 왜 개인이 개입해야 하나?”
이웃에 대한 개인의 마땅한 구조 책임을 전가하고, 나는 거기서 벗어나려는 마음에서 가난한 계층의 보호를 국가의 책임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개인을 떠나 따로 실존하는 유기체가 아니다. 개인이 내는 돈으로 예산을 결집하고 인력을 공급받아 국방을 하는 개인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개인으로서 이웃을 도울 진정한 마음, 곧 그리스도의 진정성 없이는 구성원들의 집합체인 국가 또한 제대로 이웃을 돕지 못한다.

 

행정비용을 줄이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는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제정 러시아의 유태인 학대(포그롬 Pogrom)직전, 빈곤한 마을의 (마치 가파른 지붕 위에서 유태인의 자존심이 담겨 있는 악기인 바이올린을 위태롭게 연주하는 사람과 같은) 유태인의 불안한 삶을 보여준다. 빈한한 마을에도 작은 빈부 차이는 있다. 거지가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하던 대로 동전을 구걸한다. 누군가 동전을 준다. 거지의 반응은 ‘어제는 두 푼을 주더니 왜 오늘은 한 푼이냐?’이다. ‘경기가 안 좋아 그렇다‘고 답하자 거지의 답이 걸작이다. ‘네가 경기가 안 좋은 것으로 왜 내가 피해를 보게 하나?’ 지독한 억압 속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분명 틀렸다. 걸인이 과거처럼 두 푼 혹은 더 많이 동냥으로 받기 위해서라도 부자는 더 부유해지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걸인이 사업 잘 되는 이웃에게 고용되어 구걸을 통해 소득을 이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개인별 경제 상황이 불안정하니 그에 의존 말고 마을에서 돈(세금)을 모아 걸인(A)을 도울 수 있다. 비유하자면 ‘복지제도’를 만드는 셈이다. 이제 모든 주민에게서 돈을 걷어 걸인의 기본 의식주를 돕는다. 100푼의 돈을 걷는다면 50명의 주민들은 각각 두 푼을 내는데, 주민 개인들로서는 이는 종전에 자신들이 평균적으로 걸인에게 던져주던 금액과 동일하므로 복지제도 하에서도 개인의 추가 부담은 없다. 그런데 이런 복지제도를 운용하려면 마을(나라)에 이 일을 전담하는 직원(공무원 및 기관)이 생겨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복지행정 비용)이 들어야 한다. 그래서 A는 종전에는 50명에게서 개인적으로 두 푼씩 받아 총 100푼의 자선 수입을 올렸지만 이제는 복지기관이 이렇게 걷은 100푼 중 복지 행정비용(15푼)을 뺀 85푼만이 A에게 전달된다. 최종적으로 A의 후생은 15만큼 줄어든다. 복지제도에는 많은 관료 혹은 준 관료들이 필요하며 그들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들고 빈자를 돕는 일은 공무원의 삭막한 행정절차가 된다.

개인, 교회, 기업, 자원단체 등과 같은 민간 기제도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혹자는 이들의 역할이 잘 안 보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국가가 과다 개입 할 때 민간의 역할을 오히려 위축하는 구축효과(drive-out effect) 때문이다.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데 민간이 굳이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민간이 가진 효율성이 추가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 위주의 복지가 사무화되고 거대 국가의 비효율성을 겪으며, 그러면서도 복지가 그 본질을 넘어 정치적 득표 도구로 오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미 성경 속에도 가난한 자들의 배려와 보호에 대한 수많은 요구들 대부분이 국가를 향해 주어진 것이기 보다 주로 개인들을 향해 주어지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복지가 가난한 이웃을 향해 한 개인이 품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누락된 채, 포퓰리즘 정치로 급조되고 남의 소득을 이전 받는 위주의 정책 내용으로 구체화되어 몰 인간적 복지관료의 행정사무절차로 집행되는 구빈정책 일변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Haeng Bum Kim 김행범 교수 | 서울대학교 행정학 박사. George Maason University 객원교수,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공공선택론, 정책론)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고급 입문서, 새 테마행정학, 자유주의 자본론 등의 공동 저역서 및 법의 지배, 지대추구 등의 정치행정 현상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출석하며 영성 발전 및 대학 속 복음의 근본 회복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