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유 매리 미? Will You Marry Me?

윌 유 매리 미? Will You Marry Me?

2023-05-15 0 By 월드뷰
최이든 / 이데닉 라이프 (Edenic Life) 대표

www.youtube.com/@edeniclife

조평세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월드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마 작년이었죠? ‘이데닉라이프’ 채널에서 대표님이 저를 인터뷰하시면서 처음 인연이 닿았었는데, 이렇게 또 입장이 바뀐 자리에서 뵙게 되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놀랍습니다. 먼저 저희 독자들을 위해서 본인 소개와 하시는 사역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이든 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최이든입니다. 예명같지만, 본명입니다. 아쉽게도 바이든 대통령과는 아무런 친인척관계가 없습니다(웃음). 현재 아내와 두 아이의 아빠로 용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선교사 열전> 만화를 보면서 선교사의 꿈을 키워왔고, 그래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사역을 하기 전에 8년 동안 영어 회화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현재 ‘이데닉라이프(Edenic Life)’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한국 교회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바른 크리스천 결혼관을 심어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이데닉라이프의 결혼관에 동의하는 미혼 크리스천 청년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남의 장을 제공하고자, ‘크리스천 결혼관 학교’도 운영 중에 있습니다. 동시에 크리스천 청년들이 결혼과 연애에 대한 어려움을 온라인으로 상담하는 ‘크리스천 연애 상담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평세 지금까지 두 차례 크리스천 결혼관 학교를 치르셨는데, 결과가 어떤가요?
최이든 무엇보다도 너무나 감사하고, 개인적으로 큰 기쁨으로 와 닿는 것은 크리스천 결혼관 학교(이하 크결학)를 통해 실제로 결혼의 결실을 맺는 가정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작년 10월에 진행된 크결학 1기에서 만난 형제자매 중에 이미 두 가정이 결혼 발표를 해서 올해 5월 결혼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2기는 현재 진행 중인데, 이번 2기에서도 건강한 크리스천 결혼관을 가진 많은 크리스천 가정들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반응도 참 재밌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결혼시키는 것이 숙원사업인데, 그걸 대신 감당해주는 사역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는 분도 뵈었습니다. ‘크리스천 결혼관’이라는 주제의 강의와 교육프로그램은 교회 내에서 진작 활성화되어야 했던 부분이라고 봅니다. 각 교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청년들의 결혼과 연애 문제를 고민해왔지만, 교회는 그 역할과 방향성이 ‘영혼 구원’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춘 만큼, ‘결혼’이라는 이슈는 논외로 놓는 경우가 많았지요. 사실 청년들의 가장 큰 관심은 ‘연애와 결혼’에 있는데, 교회가 이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하니 청년들이 세상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도 “이건 이렇게 하는거야.”, “그건 그렇게 하면 안돼.”라고 뚜렷한 성경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지 못하니, 청년들이 세상 기준에 맞춰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크결학’과 ‘크결가(크리스천 결혼 가이드)’ 강의를 들은 많은 청년과 목회자분들이 ‘정말 필요한 사역’, ‘정말 중요한 사역’, ‘누군가는 꼭 해야할 사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이든 대표와 그의 아내


조평세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 필요한, 정말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어떻게 더 발전시키실 계획이신가요?
최이든 크리스천 결혼관 학교는 아직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지방으로까지 확대해볼 계획을 하고 있고, 가능하다면 상당한 요청이 있는 미주지역에서도 진행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데닉라이프의 구독자가 1만3천6백 명(3월 21일 기준)밖에 되지 않고, 아직은 대부분 신청자가 서울과 수도권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더 많은 청년이 이데닉라이프를 알 수 있도록 유튜브 채널을 더 확장하기 위해 후원과 투자를 받아 웹드라마를 제작할 계획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크결가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도 집필 중에 있습니다.

조평세 뉴스에 청년들 사이에서 결혼식이 아니라 ‘비혼식’을 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결혼과 육아를 족쇄나 짐처럼 여기고, 부모님과 어른들의 눈총이 싫어서 아예 ‘나는 결혼을 안 하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해요. 또 결혼한 친구들한테 지출한 축의금을 되돌려 받겠다는 심리도 작용한다고 하더라고요. 여기에 더해 요즘 많은 기업에서 비혼을 선언하는 직원에게도 결혼하는 직원에게 제공하는 축하금과 유급휴가 등을 동일하게 지원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직원과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 간의 형평성을 명분으로 한 제도라지만, 우리 사회와 문화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청년들의 ‘비혼주의’의 배경에는 무엇이 작용한다고 보시나요?
최이든 저는 이 모든 문제의 뿌리가 ‘인본주의’와 ‘균형을 잃어버린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개인의 취향과 의사를 가장 우선시하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제는 부모와 어른들조차도 청년들에게 결혼하라고 부담 주는 것을 인권침해라고 여기며, 자녀의 의사를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인식돼 가고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과 개인의식의 저울은 반드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 세대 문화는 공동체보다 개인의 의사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대가족의 핵가족화로 인해 공동체보다 개인의 의사를 가장 존중하는 시대가 된 것, 의료기술의 발달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들이 이러한 풍조를 더 부추기고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비혼주의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잃어버린 사명 의식입니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는 이스라엘입니다. 2020년 기준 이스라엘의 출산율은 여성 1인당 2.90명입니다. 한 가정에 5~6명은 기본이며, 9~10명씩 자녀를 갖는 가정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민은 다산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고, 결혼과 출산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으로 여기지요.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임을 믿고, 실제 삶에 구현하려는 것입니다. 결혼과 출산을 비롯해,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 복을 받고, 기쁨과 만족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오히려 인간은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그런 인간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을 ‘힙’한 인생으로 그려내며 비혼을 유행시키고 있습니다. 여성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의 끝은 어떠할까요? 비혼식을 치르면서 지금껏 지출한 축의금까지 거둬들이겠다는 의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말로는 어떠할까요? 자신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 그 모든 것을 어떤 존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행복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정상적인 가족을 이룬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배우자와 자녀들, 손자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가족에 쏟아왔던 헌신과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하겠죠. 이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간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조평세 창세기 2장에서 보다시피 결혼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제도이고 사실상 기독교 문명을 통해 발전되어 온 문화와 전통인데, 결혼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비혼을 부추기는 이런 사회 움직임의 이면에는 결국 기독교라는 문명과 복음, 가정을 훼손하려는 암묵적인 의도도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것 같은데요. 주어진 사명을 잃어버리고 시대의 유행을 따라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크리스천 청년에게 한 말씀 해주시겠어요?
최이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결혼은 사명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독신의 사명을 주셨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명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셔서(창2:18) 하와를 창조하시어 아담에게 이끌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러한 보편적인 계획과 사명, 그리고 그에 따른 복을 주셨습니다. 청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결혼은 인간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두신 사명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위해 결혼을 제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그 목적에 맞게 써야 합니다.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입니다. 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체를 자신의 쾌락을 위해 본래 용도와 목적에 따라 쓰지 않으려는 의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쟁점은 비단 동성애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성애도 똑같습니다. 결혼을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질서와 목적대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뜯어고쳐서 쓰려한다면,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동성애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요?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결혼을 해야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불신자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결혼을 한다면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저는 단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하나님 앞에 인상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과 추억을 나눌 스토리가 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 청년들이 그런 스토리가 있는 인생,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간증이 있는 결혼을 이루길 바랍니다.

조평세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결혼제도와 부부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비밀(엡 5:31-32)을 말해주고 있다고 표현했어요. 결혼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결혼을 통해서 복음의 어떤 본질을 엿볼 수 있을까요? 인간 사회가 결혼제도를 버리면, 그 자체 외에 무엇을 잃게 되는 걸까요?
최이든 성경은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신부 된 성도들을 부르심으로 다시 온전한 연합과 회복을 이루고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함으로 종결되죠. 결혼을 통한 남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어떻게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지를 예표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들여다보면 이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결혼풍습은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위한 예식을 두 번에 걸쳐 진행하는데요. 키두쉰(Kiddushin)이라고 불리는 정혼식과 니쑤인(Nissuin)이라고 불리는 결혼식입니다. 키두쉰은 신부의 집에서 열리고요, 니쑤인은 신랑의 집에서 열립니다. 먼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부의 집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모하르라고 하는 납폐금을 신부의 집안에 전달합니다. 신붓값이라고도 하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바 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붓값을 치른 신랑은 신부에게 포도주로 청혼을 합니다. 신부가 그 포도주를 마시면 승락을 하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믿음으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찬식 때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고요. 그리고 신랑신부는 케투바라고 하는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이것은 신랑신부가 서로 약속을 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굉장히 상세하게 적혀져 있습니다. 심지어 이 케투바를 위한 전문가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부동산 서류를 작성할 때 공인중개사를 끼고 작성하는 것처럼, 여기에도 이런 케투바 전문가를 끼고 작성하는 거에요. 당연히 이 케투바는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케투바가 바로 구원의 약속으로 가득 채워진 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아직 육체적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정혼한 상태, 혼인하기로 약속된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신랑은 신혼집을 마련하기 위해 신부를 1~2년간 떠나있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순결을 지키며 신랑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죠. 신랑은 떠날 때 마탄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고 떠납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거할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선물을 주시고 떠나셨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리며 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순결한 신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본질이 바로 이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예비한 처소에 영원히 거하기 전까지, 그 약속을 믿으며 사명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구원의 약속을 이루심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실 것입니다. 결혼을 통한 남녀의 온전한 연합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온전한 연합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제도를 통해서, 에베소서 5장 31, 32절에 나오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해야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을 3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아내는 남편이 존경할만하면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가 사랑할만하면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이 적용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고, 아내가 남편을 존경해야 남편도 아내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선순환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그러한 창조원리로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약속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남편과 아내가 온전히 연합할 수 있는 비결이자, 그리스도와 교회가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가 결혼제도를 버리면, 남편과 아내가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비결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곧 교회가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비밀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하신 가나안을 취하는 사명과 목적의 삶을 잃어버리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앞에 두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만 하다 인생을 끝낸 출애굽 1세대와 같이 그저 과거 애굽에서 누렸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문제를 모른 채 답을 찾는, 헛된 인생인 것입니다.

조평세 어르신들은 ‘결혼은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서로 좋아하는 감정의 단계를 넘어 현실적인 고려와 판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충동적일 수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한편으론 필요한 냉철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젊은 청년들이 나서서 여러 가지 이상화된 조건과 사정을 따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려면 돈은 얼마 이상 모아놓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한다거나, 직장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등이요. 어떤 분들은 이런 구체적인 조건들을 ‘배우자 기도 제목’에 담아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상적인 조건들을 따지면서 결혼을 피하거나 미루는 청년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시겠어요?
최이든 이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혹시 레드필(Red Pill) 이론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남성우월주의와 진화심리학에 기반한 남녀 연애 구조에 대한 프레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알파남(강한 리더십, 높은 자신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우수한 남성을 이르는 말로 여성에게 쉬이 끌려다니지 않는 매력적인 남성)을 롤모델로 하여 강한 남성성을 추구하는, 어찌 보면 페미니즘의 남성 버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회문화적 요소 등으로 점점 남성성을 잃어가는 현대사회 남성들의 남성성 회복 추구 등 얼핏 성경적 결혼관과 비슷한 부분도 있어 보이지만,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던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로 삼는 부분,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병적이라고 치부하는 것 등은 성경적 결혼관과 상당히 다르지요. 그런데 이미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사님께서 질문하신 ‘소위 스펙이 좋으면 여자가 줄을 설 것이다’, ‘우등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결혼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는 그것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부부의 연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며(마 19:6), 하나님께서 정하신(창 24:14, 44)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자주하는 착각 중의 하나가 배우자를 잘 찾아내는 것에 우리의 결혼 여부가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사명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시면 우리가 직접 그 약속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있으라는 자리에서 말씀에 따라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여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듯이, 약속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정된 배우자도 각자가 그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연히 서로에게 이끌어오시는 것이죠.
최근에는 ‘돈 있고 빽 있고 능력 있는 사람만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진짜 돈 없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 가정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아닌, 내가 가진 돈에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것이 과연 어디로부터 온 생각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배우자의 조건들을 두고 기도하는 그 마음의 동기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어요. 꼭 배우자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배우자와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롬 8:28) 여러분의 길을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조평세 크리스천 청년들의 연애는 어떤가요? 찾아보니 ‘연애는 결혼 후에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같은 주제로 칼럼도 써주셨지만, 여기서는 핵심만 요약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최이든 ‘연애하지 말고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연애와 이성 교제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 말씀드리는 ‘교제’는 이성 교제가 아닌, 성도 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결정하기 위해 반드시 연애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고정관념입니다. 저희 부부는 그런 과정 없이 교제만으로 결혼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결혼 후에 연애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주변의 많은 부부들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성경의 이삭과 리브가 역시 연애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혼을 결정했으며,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잃은 슬픔을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연애’는 결혼을 위한 필수코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연애를 하게 되면, 객관적인 시각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감정으로 인해 콩깍지가 씌여서 모두 다 좋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다가 관계가 틀어지고 감정이 상하게 되면, 또 모두 다 안 좋게 보이게 되고요.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남녀가 만날 때 서로에 대해 사실 더 잘 알게 되지요. 교회에서 커플이 가장 많이 생기는 때가 언제일 것 같으세요? 단기선교 때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깊이 있게 알아가며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연애 말고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연애를 결혼 후에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죄짓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유대인의 결혼풍습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올라가신 예수님과 훗날 다시 만날 그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순결한 신부의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혼에 있어서도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나의 배우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애를 하다보면 순결을 잃게 만드는 죄의 유혹들이 생깁니다. 많은 크리스천 청년이 연애하다가 순결을 잃고, 사랑이 아닌 죄짓는 관계에 함께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전까지는 그 누구도 나의 배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배우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스킨십을 나눈다는 것은 남의 것에 손을 대는 행위인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골 3:8).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보다 자신의 정욕을 더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이제는 연애하면 스킨십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한 사회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연애하지 말고 교제해야 합니다. 연애는 결혼 후에 하고요.

조평세 결혼생활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고 서로 보완적인 것처럼, 결혼을 앞둔 상황이나 일반 사회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인지, 과거 강조되었던 남자들의 ‘기사도 정신’을 폄하한다거나, 남성 특유의 ‘거친 성향(masculinity)’을 ‘해로운(toxic)’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 인식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나약한’ 것으로 단정하는 흐름도 있지요.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경계조차 모호하게 하려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보전해야 할 남성성과 여성성의 유익한 상호보완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최이든 최근 영화나 대중 미디어를 보면 여성이 전쟁터에서 싸움하거나 남성이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마치 ‘다양성’을 인정하는 유토피아로 표현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남녀의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와 정서적 차이를 부정하고, 전통적 사회구조를 비롯한 기존의 모든 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PC 주의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문화에 수긍하고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창조 질서가 어그러집니다. 성경은 분명히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고, 어떤 것이 남자다운 것이며 어떤 것이 여자다운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의 각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자체부터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2장 2절에 다윗은 소천 직전 솔로몬에게 유언하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여 해석해보면, ‘너는 굳세어서 남자가 되어라’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이미 남자입니다. 남자보고 남자가 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남자의 ‘성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닌, ‘굳세다’는 ‘남자다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어 자체에 남자라는 단어는 남자다움, 여자라는 단어는 여자다움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 역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분명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다르게 창조하신 이유는 그들이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자가 임신할 수 없고,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세기 힘듭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이성적이며, 여자는 남자보다 감성적이고 세심합니다.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위해 남녀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남자를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두시고, 그 역할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인정할 때 안정된 사회 안에서 우리 삶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며 그 목적과 방향성에 맞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차이도 있지요. 서양 여성이 동양 남성보다 체구가 큰 경우도 종종 있어요. 하지만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남녀 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조평세 정부는 초저출산, 초고령화 현상을 해결한다고 수십 년간 천문학적인 돈을 지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뒤늦게 남녀 갈등을 해소해보겠다고 피상적인 실태조사와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혹시 남녀 갈등 해소와 결혼에 대한 긍정적 인식개선에 있어서 국가 차원에서 정부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가령 지자체의 결혼지원금이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국가가 결혼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부터 그만두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최이든 결혼을 원하지 않던 사람 중 결혼지원금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명입니다. 대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던 것 역시 한편으론 사명감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개인주의를 가장한 인본주의가 우리 삶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상태에서는, 정부가 그 어떤 정책을 내어놓는다 한들 남녀 갈등과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혼을 인정하고, 동성혼까지 인정하면 혼인가정을 늘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그것이 남녀 갈등이나 저출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저는 정부가 인본주의에 대항하는 정책을 내놓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인본주의에 기초하여 고안된 정책들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평세 결국 세상의 바른 결혼관을 세우기 위해서도 크리스천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책임도 크고요.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청년들의 바른 결혼관, 연애관을 세우는 데 부족했던 것들, 앞으로 더 힘써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이든 그래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예로부터 사회를 개혁하고 선도하는 주역은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회복하고,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야 사회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 기간동안 교회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왔습니다.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죠. 오히려 교회가 사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 내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물든 사람들이 상당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유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와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 사회는 교회를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 소금은 내다 밟힐 뿐이죠.
교회가 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교육과 성령 사역입니다. 먼저 성경적 결혼관을 교육하고 공동체 내에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세워서 청년들이 건강한 교제를 통해 결혼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굳이 뭐 이런 것까지 교육을 해야돼? 그냥 각자 알아서 잘 해야지’라고 미뤄두기엔 세상이 너무 전략적으로 결혼 문제를 통해 교회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복음뿐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성경적 결혼관을 교육해야 합니다. 크리스천 연애상담소에서 상담한 내용 중 하나 말씀드리자면, 자신이 교제하는 형제가 청년 목사인데 혼전성관계를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자신은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그 청년 목사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지키려고 하느냐’, ‘혼전순결은 구시대적인 관점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고 합니다. 명확한 기준이 없이 각자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사기 시대와 같이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암흑기를 맞이한 것입니다(삿 21:25).
교회가 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성령 사역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혼전성관계를 요구하는 청년 목회자부터 시작해서 성중독으로 인해 이성 친구를 정리하지 못하는 교회 자매까지, 크리스천 청년 중에는 정말 심각한 관계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무분별한 이성애 문제는 물론 동성애 문제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요. 하지만 교회 청년들에게 보편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이성애 문제입니다. 동성애는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슈였기 때문에 청년들이 자기들과는 관련 없는 문제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애 문제는 청년들 스스로 자신의 인본주의와 정욕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교역자들도 충분히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청년들이 자신이 이성 문제로 죄를 짓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 죄를 끊어낼 능력이 없는 것은, 사실 동성애자들의 문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뿐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성도의 죄 문제 하나도 도울 수 없다면,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이 핵심 사역 둘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조평세 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국 교회 청년들과 목회자들이 대표님의 이야기를 통해 사명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표님 가정을 소개해주세요. 저도 아내를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는데, 대표님은 그보다도 더 빨리 결혼하셨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분과 함께 이번에 저희 <월드뷰> 5월호 표지도 장식하셨는데요. 사모님과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최이든 저희 교회에 중보기도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주 귀엽고 아담하게 생겼는데, ‘오! 우리 교회에 저런 자매가 있었나’라고 생각했지요. 호감이 생겼는데 개인적으로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교회 사모님을 찾아가서 이 자매를 두고 기도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께서 알겠다고 기도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배우자가 맞습니까’라는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답 대신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어요.
갓 3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어요. 직감적으로 이 아이가 제 딸인 것을 알았죠. 제가 요리를 하면서 식칼로 음식 재료들을 자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식칼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전 당연히 줄 수 없었지요. 식칼은 장난감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아이가 14살, 중학생 정도 되었어요. 그때는 이 아이가 부엌에서 아주 능숙하게 식칼로 칼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주 맛있는 요리를 딱 만들어서 저에게 대접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들아, 결혼도 이와 같단다. 너는 결혼을 원하지만, 결혼이 너에게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너 자신이 먼저 준비되고,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내가 너에게 결혼을 복으로 줄 수 있단다. 준비되지 않은 결혼은 오히려 너와 너의 배우자를 상하게 하고, 너의 가정을 힘들게 할 수 있단다. 나는 널 사랑하고,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단다.”
이것이 제가 결혼 기도하면서 받은 첫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이 응답을 시작으로 이후 수개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인도하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에 대한 말씀도 하셨고, 기존의 연애 방식에 대한 회개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결혼이 청년들에게 본이 될 거라는 말씀도 주셨어요. 사실 그때 기도를 통해 저를 인도하셨던 과정을 정리한 것이 지금 제가 유튜브 채널 이데닉라이프에서 연재하고 있는 ‘크리스천 결혼 가이드 시리즈’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자매를 두고 결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큰 영적 성장과 변화, 그리고 깨달음이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자매를 나의 배우자로 예정하셨다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제가 아내를 두고 기도한 지 9개월째부터는 아내에게도 세 번의 꿈을 통해서 확증을 주셨다고 해요. 첫 번째 꿈에서는 한참 사막을 걷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그 물을 마실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마시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해요. 이것을 통해서 저에 대한 기도를 계속하게 하셨답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담임목사님이 나타나서 우리 둘은 서로 돕는 자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세 번째 꿈에서는 교회 소식지에 저와 아내가 부부로 나왔다는 겁니다. 제목은 ‘뿌리내린 상’이었다고 하더군요. 이 세 가지 꿈을 꾸고 사모님께 확증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답니다. 그제서야 사모님께서 저에게 그 자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만나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케이크 가게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이후 42일 만에 결혼식 준비를 시작하고, 5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조평세 하나님께서 대표님에게 약속하신 대로 대표님 가정의 스토리와 사역을 통해 하실 일들이 많이 기대가 됩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계속해서 귀한 사역을 통해 이 시대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결혼의 사명을 회복하게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문서로 기독교 세계관을 전하는 <월드뷰>를 위해서도 기도로 함께해주세요. 좋은 말씀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이든 감사합니다. 더욱 많은 분들이 <월드뷰>를 통해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게 되길 저도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