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은 영화도 골라봐야 하나요?

크리스천은 영화도 골라봐야 하나요?

2022-08-04 0 By 월드뷰

책읽는 사자의 [신앙의 참견]

크리스천은 영화도 골라봐야 하나요?

책읽는사자 (예술가 / 독서가 / 작가)

예술학 학사와 석사 졸업 후, 25세에 극작가로 데뷔했으며 현재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M. Div.) 중이다. 또한 복음에 기반한 문화 콘텐츠를 기획 · 제작하는 ‘Art above Art 사자그라운드스타트업의 대표이다. ‘책읽는사자라는 필명으로 교회와 온·오프라인에서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독서, 연애·결혼, 예술가·미디어 멘토링과 기독교 세계관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책읽는사자의 신앙의 참견> 등이 있다.


사람들의 문화 소양이 높아진 요즘, 기독교계에도 영화와 드라마, 가요 같은 문화 콘텐츠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면을 논하기도 하고, 아예 작품 전체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풀어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활동들은 문화 콘텐츠를 이용해 많은 크리스천이 보다 입체적인 복음적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 콘텐츠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문화 콘텐츠 소비자’들이지 그 콘텐츠를 창작하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래서 ‘실제’ 그 작품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보는 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비자 입장의 작품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 분석이 과녁을 벗어날 때가 많다. 이럴 경우, 자칫 문화 콘텐츠에 대한 매우 잘못된 접근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작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작품에는 반성경적 메시지가 담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놓고 악하거나 덜 악해 보이거나 표면적 농도만 다를 뿐, 결과적으로 우리 영혼에 반성경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크리스천 창작자’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세분화하여 표현하는 이유는, 크리스천 창작자라 해도 신본주의적 복음 질서가 바로잡혀 있지 않거나 최소한의 정치철학사적 이념 학습이 전무하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그 작품이 반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주입하는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런 아티스트가 아주 많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평소 문화 콘텐츠를 소비할 때 되도록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 창작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인터넷에 창작자 이름을 검색해서 그의 인터뷰 기사 몇 개만 읽어봐도 대략 감이 온다. 물론 그의 ‘실제 사생활’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의 내용이 세계관과 인격을 가늠할 좋은 힌트가 된다.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필터링이다. 극장이 성인(成人)의 학교라고 한다면 문화 콘텐츠는 성인의 교과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는 건 창작자의 세계관과 작품 의도다. 사람은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기준을 갖고 살아간다. 목사님이 성경에서 옳다고 하는 가치를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자기가 세운 ‘옳다’는 기준을 예술이라는 도구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게 글이면 문학이 되고, 장면이면 영화나 드라마, 그림이면 회화, 소리면 음악이 된다. 핵심은 창작자가 세상에 외치고자 하는 ‘자신만의 진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인데, 그 메시지를 일종의 비유를 통해 전달해서 소비자는 그 비유에만 집중하게 된다.

정작 창작자가 이 작품을 왜 만들었는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의 편견과 편향적인 정보를 취합해 그 작품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반성경적인 창작자가 만든 작품을 ‘기독교적 작품’이라고 해설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물론 아무리 반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어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그 작품을 통해 실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가장 끔찍한 형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구속해주신 복음의 역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십자가 형틀 자체가 선하다고 인식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본 의도와 달리 그 비유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영화와 노래를 만들어 대중에게 복음에 반하는 메시지를 전파한다고 해보자. 영화 연출 기법이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력이 출중하고, 이야기가 감미롭고, 음악 후렴구가 친숙하고 세련된 게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잘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쌓여간다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복음을 수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 기독교인들이 그 ‘잘못된 콘텐츠’ 중 몇 장면, 몇 문장이 자기에게 부분적으로 은혜롭게 다가왔다고 해서 섣불리 그 작품을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창작자들의 사회적 영향력과 신뢰도만 높여줄 뿐이다. 즉 자기 신앙관으로 작품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기에 저 작품은 기독교적 작품이다”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현재 전 세계에 반기독교적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이 아주 많다. 공신력 있는 예술기관과 예술 공동체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떤 예술 분야는 예술가가 ‘크리스천’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게 일종의 커밍아웃이라 불릴 정도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주류 예술가들이 ‘기독교적 가치’는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에 의문을 던지거나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칭하는 것에 높은 예술성을 부여한다.

괜히 반기독교적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양심이 있기에 ‘권선징악’을 사랑한다.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이 죽거나 악한 세력이 승리하는 줄거리의 영화는 매출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영화 속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에게 기독교적 가치를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알고 보니 마약범이라던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교회에서 열심히 예배를 드린다던가 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또는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처럼 아주 멋진 주인공이 세뇌된 교인들을 멋지게 무찌르는 모습(=매우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영화에서 성경적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표독스럽거나 매우 비합리적이고 사악한 존재로 묘사한다. 왜 그럴까. 그게 그 감독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꼭 직접 묘사를 하지 않더라도 작품이 가진 세계관, 메시지 자체가 반성경적 가치를 띠고 있다면 더욱 위험하다. 그 작품 자체가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문화 콘텐츠를 통해 점점 더 반성경적 세계관에 동화되어 악을 익숙하게 여기게 된다. 요새 청년들은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예능에서까지 혼전 성관계를 아름답고 쿨하게, 진정한 사랑처럼 묘사하는 것을 20-30년간 아무런 영적 필터링 없이 소비해왔다.

그러니까 성경적 성 가치관을 말하는 사람이 ‘꼰대’처럼 느껴진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꼰대’처럼 보일까 봐 생각 검열, 발언 검열을 한다. 만약 힙합가수 노래나 대중가요 가사에 반성경적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가정해보자. 직접적인 가사는 아닐지라도 성경에서 금하는 내용을 아름답게 묘사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도 모르게 ‘사단의 설교’를 수십, 수백 번 듣고 외우고 따라 부르는 셈이다.

노래만 듣는가. 우리는 유튜브,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 게임, 웹툰, 팬픽, 인스타그램, 예능 프로그램 등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러는 와중에 주일에 잠깐 교회에 가서 길어야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집에 돌아와 6.9일 동안 또다시 아무런 복음적 필터링 없이 세상 문화 콘텐츠들을 마음껏 소비하는 생활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렇듯 사단은 문화 콘텐츠를 통해 이 땅과 우리 영혼에 자신의 악한 열매를 마음껏 심어놓는다.

한국은 영화를 좋아하는 나라다. 어느 영화가 재미있다고 소문나면 전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영화관에 우르르 몰려간다(영화 〈명량〉은 약 1,700만 명이 봤다고 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수준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매우 부자연스러운 문화 현상이다).

크리스천도 예외가 아니다. 개인의 취미생활로 또는 연인끼리 필수 데이트 코스로 극장에 몰려간다. 또는 넷플릭스나 HBO, 왓챠 서비스를 이용해 방에서 영화나 미국 드라마를 몰아서 보기도 한다. 문제는 크리스천이 영화를 자기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제3의 콘텐츠’로 여긴다는 점이다. 하물며 교역자도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가장 깨어있어 주의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모든 영적 무장을 해제하고 ‘여가’를 만끽한다. 많은 청년 크리스천이 아무런 의식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취미생활, 데이트 시간이라 여기며 행복해한다. 어디 영화뿐이겠는가.

문화 자체를 ‘악’으로 보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와 세상을 선과 악으로 생각하는 걸 ‘이원론적인 세계관’이라고 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이런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화는 악 중의 악이다(상당 부분 이 관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예술’의 본래 의도가 상당히 오염되었다고 해서 예술의 본질 자체가 악한 건 아니다. 예술도 하나님의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칼빈주의 강연〉에서 말하듯 우리는 “세상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중하여, 구원을 이루는 특별 은혜와 하나님이 세상 생활을 유지하시면서 세상에 임한 저주를 완화하고 부패 과정을 붙들어 창조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우리 생활의 자유로운 개발을 허용하려고 베푸시는 일반 은혜가 있다는 위대한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계든 가요계든 미술계든 이 세상 모든 영역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 땅을 바꿔야 하는 사명이 있다. 실제로 전 인류 최초의 예술가는 아담이다. 그는 지구의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창작해 주었다(창 2:20).

다윗은 수많은 시를 창작했으며, 악기 연주도 이스라엘 전역에 소문이 날 만큼 수준급이었다(삼상 16:18). 예술은 원래 우리 거다. 악해서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가서 정복해야 할 우리의 땅이다(전문적인 크리스천 예술가 멘토링은 다른 책을 통해 설명하겠다).

성경을 읽어야 진리를 구분할 수 있다.

영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 콘텐츠를 분별해서 보려면 먼저 ‘온전한 분별력’을 갖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이 중요하다. 어려워할 것 없다. 성경을 읽자. 설교를 많이 듣고 기독교 서적도 많이 읽자. 복음 콘텐츠에 자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노출시켜라.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의 법칙이 살아 숨 쉬게 하라.

그러면 문화 콘텐츠의 부적절한 포인트마다 거룩한 성령의 빨간 불이 밝혀질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의식만 하더라도 많은 것이 바뀐다. 그러니 아무리 유명한 영화감독, 작가, 가수라도 그가 뽐내는 창작물이 아무리 인정받을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부합하지 않은 가치관을 투영하고 있다면 자신 있게 거절하고 그것을 평가하라. 거만한 영화 평론가들을 평론하라.

그 창작자의 세계관이나 창작물이 드러내놓고 너무 악하다면 다시는 그의 작품을 소비하지 말자. 또한 예술업계 종사자가 아닌 이상 영화 관람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예술적 조예가 깊은 문화인’ 코스프레는 안 해도 된다. 연극이나 뮤지컬, 전시회도 마찬가지다. 성경적 가치관이 단단하게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리는 예술적 허영은 먼지와도 같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 중에는 예수님을 위해 이 세상 모든 걸 쓰레기처럼 여겼던 사람도 있다(빌 3:8).

그러니 남들이 보고 듣는 것을 기웃거리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지 말고, 과감히 그 틀에서 벗어나 복음 콘텐츠에 몸을 맡겨라. 그게 더 예술적이다. 영화관 갈 정성으로 서점에 가서 비소설을 구매해 읽으라. 넷플릭스 변태 콘텐츠, 사단적 콘텐츠를 볼 시간에 사놓은 책의 표지를 넘겨라. 시편을 소리 내어 읽어라. 그게 가장 탁월한 예술적 소양이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문화 콘텐츠를 소비할 때(되도록 소비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항상 내 마음속 성령의 신호등을 기억하자. ‘이거 좀 찜찜한데?’ 하는 경우는 거의 크리스천이 옳은 경우가 많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도 엄청 찝찝한 게 영적인 구정물이다. 더 나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봤던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영상, 뮤직비디오에서도 영롱한 성령의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자.

드라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PD나 극작가의 기획 의도나 프로그램 정보를 읽어보고, 예능프로그램도 PD의 기획 의도를 살펴보자. 유난 떤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 길만 걸어가면 된다. 이런 게 비판적 사고를 증진시키며 AI에 대체되지 않는 스마트 크리스천이 되는 생활 속 비법이다. ‘매스 미디어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와 생각의 상류층이 되는 길이다.

그동안 반성경적 문화 콘텐츠를 통해 들어왔던 사단의 모든 미혹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으로 끊어지고 소독되고 환기되길 소망한다.


인스타그램, 네이버포스트 thelion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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