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자연주의자 유발 하라리의 숨겨진 갈등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자연주의자 유발 하라리의 숨겨진 갈등

2021-12-19 0 By 월드뷰

사피엔스의 망상(Sapiens’ Delusion) (5, 6)


월드뷰 DEC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3


글/ 손원준(UC Irvine 의과대학교 뇌공학자)


자연스러움에 관한 패러독스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자신의 설명 프레임에 기독교를 끼워 맞추려 한 나머지 기독교에 대해 그가 풀어야 할 더 큰 패러독스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움(natural behavior)은 기독교에서 종종 통제되지 않은 죄인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상징한다(고전 2:6 이하 참고). 여기서 자연적 본성에 따르는 인간(the natural man)은 다른 의미로 다윈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생존과 이익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본성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인간이 원수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것, 고발자가 없는데도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것, 자신을 학대한 이를 용서하는 것 등은 본성만으로는 자연히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다. 자유, 평등, 인권, 자발적 희생과 용서는 절대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가 아님을 모르고 있는가? 이제 거꾸로 자연주의자에게 그의 세계관으로 윤리적 본능을 변호하라는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스스로가 주창하는 세계관이 암시하는 책임에서 벗어나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무신론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무질서(disorder)에서 이어지는 모든 것의 해체(disintegration)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과학 도그마인 열역학 법칙에 의하면,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는 우주에서 엔트로피(entropy)의 증가로 우주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먼지와 같이 해체되어 사라지는 열사(heat death) 상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연주의 세계관 내에서 이와 같은 암울한 필연적 종말로 향하는 전 과정이 무작위적이며 목적 없는(undirected random process) 과정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주의 세계관 신봉자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인권과 자유, 평등의 가치를 변호하며 인간답게 살게 해줄 수 있는 교리를 도출해 낼 수 있는가? 그들은 거짓과 속임수 없이 불가능한 이 무거운 입증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피엔스는 과학적인 근거로 무장되어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충돌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무장해제시키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것은 나의 오판이었다. 저자의 기독교에 대한 집착과 반감이 암시적이 아닌 공개적이라는 증거는 <사피엔스> 제1부 인지 혁명의 소제목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지식의 나무(선악과)’,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대홍수’ 등의 소제목에서 하라리는 성경의 서사 구조를 의도적으로 차용해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정작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빈약한 이해를 드러냈고 기본적인 조사조차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라리 자신의 표현대로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사실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객관적으로 기술해보려고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이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미덥지 못한 설명 대신, 미워하는 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와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포용하는 이유를 참 기독교인들이 어디서 찾으려 하는지를 알려고 했다면 말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의 속성을 닮도록 그의 모습(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라고 여긴다. 타인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신)에 대항하는 가장 무거운 죄의 대가를 하나님이 직접 십자가에서 나 대신 치러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게 해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은혜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라면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술했으면 적어도 기본적인 조사에 성의 없었다는 평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의 논의: 칼 세이건, 버틀랜드 러셀, 그리고 하라리


“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 명언을 코스모스(Cosmos)라는 우주의 역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통해 남긴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라고 표현했다. 물리적 물질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과학적 유물론(materialism)과 자연주의(Naturalism)의 대변인이기도 했던 세이건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리는 그림을 거짓 없는 진솔함으로 표현했다. <정신과 우주(Mind and Cosmos: Why the Materialist Neo-Darwinian Conception of Nature is Almost Certainly False, 2012)>에서 저명한 무신론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 교수는 다윈주의적 유물론으로는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여 많은 유물론자의 심기를 건드린 바 있다. 그가 말하기를 유물론적 관점이 묘사하는 세계에는 세상의 소리와 색채, 자유의지 혹은 의식, 혹은 옳고 그름, 자아 그리고 자아 희생의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했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칼 세이건은 철학적으로는 자연주의 유물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광대한 우주와 유물론적 세계관이 주는 함의에 감정적으로 저항한 흔적을 보였다: “작은 생명체로서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이 갈등으로 인해 때로는 자신을 불가지론자라 정의하기도 했다(물론 불가지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주의자일 수 없다). 세이건은 <코스모스>와 <창백한 푸른 점>에서 과학도서이지만 감성적인 서사로 독자들이 회의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독려했다. 이와 비슷하게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하나인 버틀랜드 러셀(Bertrand Russell) 또한 스스로 자연주의자라 칭했지만, 그 세계관이 암시하는 냉혹함으로 빠지는 것은 일면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그는 니체를 혐오했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자연주의 세계관의 함의와 자신이 느끼는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해 치열히 갈등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이 주창하는 세계관과 일관성 있으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세계관에 대한 거짓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이건과 러셀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일관성의 문제를 겪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칼 세이건, 버틀랜드 러셀, 유발 하라리, 그리고 무신론자로서 그들의 정통 교리와도 같은 다윈주의적 유물론을 비판한 토마스 네이글 교수의 저서 <정신과 우주>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이단 낙인이 찍혀 화형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대한 리뷰에 이러한 소개를 추가하는 이유는 자연주의자 (Naturalist)로서 하라리 개인이 책에서 취하는 입장이 위에서 소개한 두 사상가와 꽤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대한 질문에 칼 세이건과 러셀은 자연주의 세계관은 냉혹하고 암울하지만, 거기에 얽매여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고 선을 추구하며 고양된 가치를 위해 살라고 조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달랐다. 한 번은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다소 난해한 답변을 했다. 그는 인생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새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으며, 마치 부처(Budda)의 말을 인용하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Do nothing. Absolutely nothing.)’이 최선이라는 유의 답변을 한 것이다.1) 하라리는 자신의 세계관과 실제 삶 사이에 갈등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는 일관성의 무늬를 띤 기만(deception) 혹은 무지(ignorance) 중 하나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는 <사피엔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blind evolutionary process)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소 염세주의적이지만 일반적인 자연주의자가 정석대로 할 법한 말을 했다. 유발 하라리의 평소 주장이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구(fiction)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기에 삶의 목적과 윤리적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허무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라리는 세이건과 러셀이 이룩하지 못한 외견상 일관된 철학적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외견상의 주장과는 달리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도출해낼 수 없지만, 선택적으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인류의 범죄에 대한 도덕, 윤리적 비판”을 빈번히 가하며 자신의 세계관에 모순을 만들어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촌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모순은 이 책의 주요 수맥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하라리는 자신이 쓰고자 한 내용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것뿐이다.

하라리와 진보주의 유물론 독자의 만남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바로 이 사람이라며 첫눈에 반한 데이트 상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중적이며 일관성 없는 삶을 보고 서서히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헤어짐을 결심하게 되는 인연이 아닌 두 사람의 만남과 비슷할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본래 평등하다는 믿음을 과학이 뒷받침해줄 것으로 믿었던 충성스러운 진보주의 유물론자의 신념을 조롱하며 뒤통수를 치는 이가 하라리이다. 이들은 인간의 본래적 평등이 종교적 교리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는데 하라리는 자연주의, 환원주의적 세계관 신봉자들 사이에서 터부시되는 사실을 솔직 과감하게 말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진보주의 유물론 독자들은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 중의 소수는 이 사실을 묵묵히 수용하며 신은 죽었고 인간은 본래 평등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개념은 상대주의적이기 때문에 누구를 도덕적으로 비판할 정당성 또한 누구에게도 없다는 도출된 진실을 수용하고자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반전은 하라리 자신도 아직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 벌어지는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하라리식 글쓰기의 특징: km 범주를 넘나드는 주제, 각 범주 내에서 근거와 인용의 미비에도 꿋꿋한 단정형 어조, 그리고 난사식 소주제와 일관성 결여


저술가와 강연가로서 단정형 어조가 주는 카리스마의 맛을 보면 확실성이 떨어지는 추정을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정도의 겸손한 표현을 습관적으로 피하게 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피엔스> 내의 단정형 어조의 비범한 주장들에 대한 비범한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사료나 분야 전문가의 사고를 인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라리는 종종 대중 언론에 의해 독창적인 사고가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유명 저술가들의 아이디어를 짜깁기하는 일이 잦다는 지적이 있는데 근거 제시와 인용이 실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의심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인용과 근거 제시의 부재로 인해 사피엔스는 일관성과 논리가 전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과도한 비평이 아니다. 종합해보았을 때 학문적 진실성의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엔 주장에 대한 반론 소개 실종, 비범한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 미비, 주요 인용(Citation)의 실종 등이 해당한다. 즉, <사피엔스>는 튼튼한 학문적인 토대 위에 그 사상과 철학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비유와 양념을 더하여 쉽게 쓰인 책의 종류라고 평가해 줄 수 없다. 오히려 <사피엔스>는 학문적 검증의 책임 없이, 동료 심사(peer review)라는 최소한의 검증 과정도 하지 않고 출판할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남용한 책이다. 또한, 일관된 주제 없이 광범위한 소주제를 난사하는 것도 전체적인 논지의 응집성을 흐리는 데 일조했다. 챕터 사이에 근본적 모순점들이 발견되는데 마치 챕터별 저자가 다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일 들 정도이다. 하나의 아이디를 열두 명이 공유할 때 오는 현상과도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자는 일관성 없는 세계관을 지닌 채, 책을 쓰고 있다. 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따라 일단 후자라고 의심했다.

<wonjsohn@gmail.com>


1) [1]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Library Journal, vol. 143, pp. 55-55, 2018.
[2] “In Harari’s Sapiens, Meaning of Life Is Just a Delusion,” Psychology Today, 2020


글 | 손원준

UC Berkeley 전자전산공학과 (B.S.)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전자공학 석사(M.S.), 의료생명공학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현재 UC Irvine에서 운동장애가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재활공학과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