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환곡제도와 전통적 복지의 현대적 의미

조선왕조 환곡제도와 전통적 복지의 현대적 의미

2021-12-03 0 By 월드뷰

월드뷰 DEC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김재호(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어떠한 유형의 복지를 택할 것인가?


저성장이 계속되고, 작년부터 코로나19로 인해서 자영업자를 비롯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급기야 기본소득, 기본자산까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다가올 대선에서도 복지정책이 쟁점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나라는 재정 규모가 다른 OECD 국가보다 작고, 복지지출도 적은 유형에 속한다. 같은 선진국이라도 북유럽은 재정 규모가 크고 복지지출도 많지만, 일본이나 미국은 재정 규모나 복지지출 규모가 작은 유형에 속한다. 최근 우리나라도 재정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복지지출도 급증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떠한 복지 유형의 사회가 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마치 어떤 유형의 복지든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회의 선택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제도의  관성에 의해 제약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사회가 어떠한 제도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구성원들이 자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관성이나 타성도 자각할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와 관련하여 어떠한 경향이나 특성을 보이는가? 


복지제도의 장기적 결과를 고려해야


사회가 생존의 위기에 빠진 구성원을 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복지정책을 두고 의견이 상충하는 것은 복지에도 비용이 소요되며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국가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배급해주는 공산주의 체제의 복지가 더 잘 이루어질 것 같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북한에서는 1990년대에 대규모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복지제도를 평가할 때 정책의 의도나 단기적 효과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은 효과나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공산주의 체제를 처음 수립할 때 최소한의 복지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안전조차도 보장하지 못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살펴볼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 존속했고, 환곡제도도 왕조의 역사만큼 오래 운용하였기 때문에 복지제도의 장기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조선왕조 환곡제도는 국가에 생존을 의존하는 제도


요즈음 시중에 떠도는 복지 관련 논의를 보면 ‘개인의 삶을 국가에 너무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격세유전적으로 조선 시대의 특성이 재현되는 것 같은 우려마저 갖게 된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복지제도인 환곡제도야말로 백성들이 국가에 생존을 의탁하도록 만드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기근에 대비해서 곡물을 저장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조선왕조의 환곡제도는 저장하는 곡물의 규모가 월등하게 컸다는 점, 저장한 곡물을 국가가 중앙집중적으로 운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기근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 매년 곡물의 방출과 회수를 계속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제도였다.


조선왕조는 당대 세계 최대의 곡물 저장 국가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군자창(軍資倉)이나 의창(義倉)에 100만 석이 넘는 곡물을 저장하고 방출했다. 세종 27년(1445년)에는 270만 석이나 분배되었다. 이렇게 곡물을 저장했던 것은 기근이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흉년이 발생하면 방출하는 곡물의 양이 크게 늘어났지만, 흉년이 아니더라도 매년 내보내고 거두는 일을 반복했다. 우선 곡물을 창고에 오래 저장하면 쥐가 먹고 부패하기 때문에 새로운 곡물로 교환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자를 받지는 않았지만 16세기 무렵부터는 방출한 곡물을 거둘 때는 원곡과 함께 10%의 이자에 해당하는 모곡(耗穀)를 함께 거두었다. 환곡은 16세기에 감소하다가 임진왜란 때는 소진되었지만 17세기 말, 18세기 초부터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재정에 다소 잉여가 생겼고 방출한 곡물에 이자가 추가되어 원곡이 복리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국가에서 저장한 곡물이 18세기 초에는 500만 석 규모였는데, 가장 많았을 때는 18세기 후반 영조 45년(1769년)에 1,010만 석에 이르렀다. 쌀로 환산하면 600만 석 정도가 된다. 당시 중앙재정의 공식 세입이 쌀로 환산하여 150만석, 중앙과 지방의 비공식 세입까지 포함한 전체 세입이 400만석 정도였다고 추산되므로, 조선왕조는 중앙의 공식 세입의 4배, 비공식 세입을 포함한 전체 재정의 1.5배에 이르는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1790년대 중국은 상평창, 의창, 사창(社倉)에 저장한 곡물이 쌀로 환산하여 2,300만 석이였다고 하는데 중국이 인구가 월등히 많았으므로 1인당으로 계산하면 조선왕조가 5배 정도 많은 셈이었다. 아마도 조선왕조는 당대 세계 최대의 곡물 저장국가였을 것이다. 중국에도 고대부터 곡물을 저장하는 제도가 발달했지만, 곡물 가격을 조절하는 상평창 제도가 발달하였다는 점이 조선왕조와는 다른 점이었다. 상평창은 흉년에 가격이 폭등하면 국가가 저장한 곡물을 시장에 방출하고 풍년에 가격이 폭락하면 곡물을 사들여 저장하는 제도였는데, 조선왕조에도 상평창이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대부분 환곡으로 운용되었으며 기근 때는 일부가 진휼곡(賑恤穀)으로서 무상 지급되었다.


저축을 감소시키고 생산적 사용을 저해한 환곡의 장기적 효과


환곡제도 덕분에 많은 백성이 생존의 위기를 넘기게 되어 목숨을 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 시대에는 기근이 빈발하여 심할 때는 수십만 명, 특히 현종 대에는 100만 명이 넘게 죽었다고 할 정도의 막심한 기근도 발생했지만, 기근이 민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환곡제도 덕분에 생존의 위기가 정치적 위기로 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환곡제도는 조선왕조가 오래 존속할 수 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제는 환곡제도가 가진 장기적인 효과이다.

첫째, 민간의 저축이 감소했다. 우선 촌락 단위에서 기근에 대비하는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고명한 학자이자 대사헌과 우의정을 역임했던 이단하(李端夏)는 숙종 10년(1678년)의 상소에서 과거에는 부호들이 빌려주는 곡물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근래 지방관이 부호의 곡물을 강제로 빼앗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돌려받으려고 하면 처벌했기 때문에 부호들이 곡물을 늘리려 하지 않게 되어 민간의 축적이 모두 탕진되고 오로지 국가의 곡식에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이와 함께 일반 농민들의 저축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환곡제도로 봄에 환곡을 받아서 종자나 식량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을에 추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소비하고 봄에는 국가에서 나누어주는 환곡에 의지하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과장되었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세종 30년(1448)에 나라에서 스스로 종자를 준비한 자를 조사했더니 양주 군의 경우에 노 씨와 오 씨 두 사람의 60석뿐이었다.

둘째, 환곡의 관리가 매우 부실했고 부패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환곡은 현물로 운영되는 기금이었기 때문에 장부상으로 통합되어 파악되었지만, 공간적으로는 분산적으로 저장될 수밖에 없었는데 곡물을 저장한 창고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관이나 아전에 의해서 포탈되거나 사적으로 유용되어 계절적이나 지리적인 가격 차를 이용한 영리활동에 동원되었다. 1862년 삼남 지방에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던 해의 환곡 총량은 800만 석이었지만,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곡물의 비율이 54.4%에 달했다. 

셋째,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만연하게 되었다. 환곡은 곡물을 저장해 농민에게 빌려줬을 뿐 달리 운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환곡의 수익구조는 매우 취약했다. 농민들에게 빌려준 다음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기적으로 탕감해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서 탕감을 바라고 환곡을 갚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회수하는 것이 곤란해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받지 못한 환곡이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된 아전이 도망가거나, 자살하는 일도 생겼다. 앞에서 언급한 1862년의 민란이 촉발되었던 것도 오래 받지 못해 누적된 환곡을 전체 주민에게 분배해서 징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넷째, 저축의 생산적 사용을 저해했다. 환곡의 이자 수입이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서 정부는 재정 잉여에서 축적된 곡물을 농민에게 환곡으로 빌려주는 것이 다른 지출보다 유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환곡은 단기적으로는 농민을 생존의 위기에서 구하는 역할을 했지만, 사회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령 수리시설 수축이나 농지개간 등의 고정자본투자에 해당하는 곳에 저축을 사용하지 않고, 창고에 저장했다가 농민에게 분배하는 식으로 매년 방대한 곡물을 사용하는 것에 그쳤다.


국가로부터 자립하지 못한 자유는 허구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의 환곡은 단기적으로는 생명을 구하고 정치적인 위기를 방지하는 역할을 했지만, 기근 자체를 방지하지는 못했다. 기근은 저장한 곡물을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방지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농지가 개간되고 농업부문의 자본투자와 기술진보로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어 식량 생산이 증가하는 한편, 시장경제가 발달하여 지역 간 곡물의 이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나아가 외국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소멸했다. 복지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조선왕조의 환곡제도를 살펴보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복지제도 설계에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잘못 설계된 복지제도는 의도와는 달리 개인의 자립을 저해하여 계속 국가의 복지지출에 의존하도록 만듦으로써 더욱 복지지출이 더욱 증가하는 악순환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가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자유란 허구이다.

<jhokim@jnu.ac.kr>


참고문헌

김재호(2001), “한국 전통사회의 기근과 그 대응: 1392-1910”, <경제사학> 30.
김재호(2011), “조선왕조 장기지속의 경제적 기원”, <경제학연구> 59(4).
김재호(2016),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 생각의힘, 21장, 22장.


글 | 김재호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경제사 분야를 전공하고 있으며, 경제사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