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도덕의 근거를 제공해주는가? :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적대감

과학은 도덕의 근거를 제공해주는가? :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적대감

2021-11-15 0 By 월드뷰

사피엔스의 망상(Sapiens’ Delusion) (3, 4)


월드뷰 NOV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3


글/ 손원준(UC Irvine 의과대학교 뇌공학자)


장밋빛 긍정주의를 가진 충성스러운 진보주의 유물론자들을 배신한 하라리: “과학은 도덕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미래는 이성의 시대가 열리며 풍요롭고 전쟁이 억지(抑止)되는 평화로운 시대일 것이라는 장밋빛 긍정주의에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경고의 말을 전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라리는 유대 기독교적 개념,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라는 상상의 질서가 서서히 퇴색하면 다가오는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 것이라는 전망을 전했다. 하라리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가 있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대중에게 점차 ‘지어낸 개념’, 혹은 허구로 인식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에 따라 힘과 권력에 의한 차별, 인종 청소, 적자생존의 법칙을 견제할 명분과 장치가 약해질 것이다. 사회의 윤리와 문화, 종교적 가치관의 해체로부터 오는 ‘해방’으로 인해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데자뷔처럼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통곡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지배한 (자연주의) 무신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러시아의 굴락,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문화대혁명, 폴 포트(Pol Pot)의 인종 청소, 일제의 제국주의 만행 등 주요 참사들은 하라리의 글에 생략되어있다. ‘나는 내 안의 악마를 보았다’라는 말이 인류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20세기 인류의 역사에서 나온 것인데 말이다. 하라리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와 나치 치하의 홀로코스트, 소련의 굴락 등을 언급할 때에 무신론적 유물론의 필연적 귀결을 마치 아직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염려인 양 서술해 나간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질서가 퇴색해가면서 현재 세계 질서가 영원히 평화로울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는 역사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고려해보면 그저 순진한(Naïve) 믿음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하라리의 염려는 합리적이다. 다만 그의 설명은 20세기의 비극을 거의 생략하다시피 하므로 역사가로서는 상당히 부정직한 묘사로 볼 수 있다. 과거 인류의 비극에 대한 정면 대응 대신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은 위험해 보이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인간은)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중략)…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민주사회에 사는 인간은 자유롭지만 독재하에서 사는 인간은 부자유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라리는 동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는 울분을 토하면서도 20세기 인류가 겪은 비극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방(Liberation),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하라리의 입장이기도 하며 해방(liberation)이라고 종종 묘사되는 진화론적/물리주의적 유물론(evolutionary materialism)의 결과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는가? 낸시 피어시(Nanacy Pearcey)는 그녀의 저서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남겼다.

진화론적 유물론의 함의는 일반 대중이 체감하기로 자유 사회에서 누린 권리가 ‘신화(myth)’1)의 지위로 강등된다. 그리고 나서는 누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것인가? 다윈주의(Darwinism)에 기반한 진화론적 관점은 일종의 해방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우리는 그 해방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발견할 때 다소 의외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라리의 진화론적 유물론 관점은 그가 자신의 욕구를 제한 없이 발산하는 것을 견제하는 모든 가치와 전통은 해체되어야 하는 신화로 치부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관점이 주는 해방을 칭송한다. 그러나 사람의 ‘권리’, 즉 차별, 권력의 압제에 의한 사회적 약자의 피탈과 학대, 부, 인종, 피부색, 성별, 사회적 지위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천부적 인간의 권리는 일개 ‘근거 없는 믿음’의 지위로 강등되는데,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해방은 과연 누구를 위한 해방이란 말인가? 그것은 힘과 권력의 약육강식 피라미드의 최상위권에 있는 포식자들이 그 포식 행위에 대한 도덕적 죄책으로부터 해방되게 할 뿐이며 상대적으로 힘의 약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해방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본인이 달릴 때는 속도위반을 하고 싶고 속도 제한을 걸어 놓은 법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남의 자동차가 과속으로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면 그때 한해서 입장을 변경하여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는 꼴이 아닌가?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혐오


그런데 하라리가 유독 기독교에 대해 많이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가 단순히 자연주의자이자 무신론자로서 유신론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에 따라 대표적인 타겟으로 기독교를 고른 정도로 짐작했다. 그는 <사피엔스>에서 현재 인간이 누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기독교의 유산임을 여러 번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실체가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느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평등사상은 창조 사상과 뗄 수 없게 얽혀 있다. 미국인들은 평등사상을 기독교 신앙에서 얻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신이 창조했으면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말이다. 하지만 ‘자유?’ 생물학에 그런 것은 없다. …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민주사회에 사는 인간은 자유롭지만, 독재하에서 사는 인간은 부자유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165).

기독교가 개인의 천부인권과 자유, 평등의 진보적 가치에 미친 결정적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영향을 미쳤는지 그 원인과 소스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다소 의아스러운 전개이며 독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기독교에 대해 눈에 띄게 무지할 뿐 아니라 기독교 혐오 관점을 가진 본인에 의해 기독교를 불공정하게 다루고 있음이 금세 드러난다. 여기서 대표적인 몇 가지만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가 말했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마 19:24)“(437).

성경을 아는 기독교인이면 이런 표현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어야 할까? ‘도대체 어떤 기독교인이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어야 한다. 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구글 검색만으로도 저것은 기독교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결여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신약성경(New Testament)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love of money)이 문제라고 수차례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기에 이는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재정을 사용하는 것과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딤후 3:2).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 13:5).

또한, 기독교 신학과 교리에 대한 설명의 시도가 없으며 역사적으로 심각한 왜곡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의…(468).”라는 대목을 보자. 기독교와 나치즘을 종교적으로 평행선상에 놓은 것도 변호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는 말 뒤에 단 하나의 인용도 설명도 따라오지 않는다. 대학교 2학년생이 과제를 제출해도 자료 인용 하나 없이 이렇게 쓰면 그 과목을 패스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인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인용한 자료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만 명을 살해한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예를 들고자 했다면 그는 공산주의 무신론과 이슬람의 예를 드는 것이 먼저여야 했을 텐데 정치적 올바름(PC)과 종교적 보복의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구미에 당기지 않는 예이기에 회피하지 않았을까?

<사피엔스>에서 반복되는 프레임은 근대 이전을 지배하던 세계관인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지(ignorance)에 기반을 둔다는 프레임이며, 따라서 점차 폐기되어야 할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세까지 종교가 지배하던 시절 과학의 부재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미 밝혀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부나 목사에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기심이 독려되지 않았고 과학 발전도 없었다는 식이다. 그리고 계몽의 시대가 도래해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고, 이전의 종교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과학이 발전해 수많은 위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믿는 교리에 대해 한 마디 설명하려는 성의가 없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기독교를 그저 중세 암흑기를 선도했던 무지한 종교로 간단히 묘사하고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며 질의응답 한번 없이 빠져나간다. 물론 하라리는 역사적으로 올바른 설명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형성된 자유주의적 정치, 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다는 설명, 그리고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신성한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본성에 대한 믿음이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기반을 제공해주었다는 역사적으로 올바른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가치들이 다 실존하지 않는 망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을 기독교 신학이 구분했다고 지목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 기독교 신학이라고 지목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 정도는 있어야 공정하지 않았을까? 불교에 대해서 4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며 이 책의 문맥에서 더는 다루지도 않을 고타마 싯다르타(釋迦)의 삶에 지면을 할애하면서 정작 기독교의 믿음, 핵심은 놀랍게도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예수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으로 보이고 간혹 피상적으로 언급이 될 때도 하라리의 기독교에 대한 무지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루어 보아 하라리는 기독교에 대해 감정적으로 배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다른 현상을 설명할 때처럼 공정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중요한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자세, 그리고 방대한 관련 역사자료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 하라리의 지적 불성실성(혹은 무지)은 <사피엔스>에서 발견되는 실망스러운 부분 중 하나이다. 실제 많은 역사가가 근대 과학 발전의 태동에 기독교 신학이 필수적 역할을 했다는 많은 연구 자료와 논문을 검토해보면 과학과 중세 암흑기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 하는 하라리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다.2)

앞서 하라리는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관념이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자연스러움’이란 말의 신학적 의미는 ‘자연을 창조한 신의 뜻에 맞는다’라는 뜻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의 몸을 창조할 때 사지와 장기가 특정 목적을 수행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218).”라며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마치 증거라도 제시하는 듯 “수고롭게시리 남자에게 광합성을 금지하거나, 여자에게 빛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음전하를 띤 전자가 서로에게 끌리지 못하도록 금지한 문화는 하나도 없었다.”라는 우스꽝스러운 첨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진지하게 사리판단을 할 그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는 부조리한 ‘꽝’언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미워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바가 없으므로 그저 ‘자연스러운’ 일인가? 저 우스꽝스러운 설명에 의하면 누군가가 땀 흘려 모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모욕을 주는 행위가(자연법칙을 위배하는 행동이 아니므로) 부자연스럽다고 말할 근거가 없는가? 하라리는 자신의 욕망 성취에 제재를 가하는 모든 것(사회 관습법적, 성문법적, 윤리적 제재)은 해체되어야 할 신화로 치부하고 싶은 것이다. 저런 터무니없는 일차원적 설명을 누가 진지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한 분야의 전문가들만 그 분야에 의견을 개진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라리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무지한 채 대중들을 가르치려 하는 것은 도덕학(도덕철학) 전문가들에게 황당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시대, 문화와 종교를 초월하여 인정되는 윤리적 본능(moral instinct)의 실재에 대한 고민 없이 ‘자연스러움’의 정의에 대한 이런 단정은 <사피엔스>의 격을 떨어뜨리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wonjsohn@gmail.com>


1) 신화, 혹은 근거 없는 믿음.
2) “For the Glory of God: How Monotheism Led to Reformations, Science, Witch-Hunts, and the End of Slavery (Book),” Choice: Current Reviews for Academic Libraries, vol. 41, p. 561, 2003


글 | 손원준

UC Berkeley 전자전산공학과 (B.S.)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전자공학 석사(M.S.), 의료생명공학 박사학위 (Ph. D.)를 받았다. 현재 UC Irvine에서 운동장애가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재활공학과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