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입장에서 보는 언론중재법

언론인 입장에서 보는 언론중재법

2021-10-05 0 By 월드뷰

월드뷰 OCTO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글/ 김인영(前 KBS 보도본부장)


인권보도준칙 전례


언론중재법 개정안 논란이 뜨겁다. 각계각층에서 반대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170석 거대 여당의 입법 강행 의지가 강한 듯하다. 보통사람들에겐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이 법에 왜 이리 난리가 난 것인가? 언론계는 어떤 변화가 예상될까? 먼저 다른 이야기부터 해보자.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인권보도준칙에 대해 MOU 형식의 합의를 했다. 이 준칙 8장의 성적소수자(동성애자) 관련 조항에 성적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지 않도록 하고 특정 질환(에이즈)과 연결하지 않는 내용이 들어있다. MOU는 강제적 구속력이 없고, 개별 언론사에 권고하는 수준의 합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 준칙이 언론계 전반에 지켜져서 동성애나 에이즈 관련 보도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동성애 용어조차도 언론현장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받아쓰기 언론만 남나


국가기관의 권고에도 이럴진대 이번에 통과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미칠 영향은 정말 끔찍하다. 언론사가 소송에 질 경우 피해액의 3~5배 징벌적 배상(매출액의 1,000~10,000분의 1)을 해야 한다. 허위, 조작 기사 여부는 언론사가 입증해야 한다. 언론사는 기자에게 책임을 물어 구상권을 청구한다. 언론계 현실과 생태계를 완전히 무시한 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언론사는 특종성 취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취재 이전에 자기검열부터 해야 하고, 언론사마다 대형법률회사를 하나씩 끼고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법학교수회는 성명에서 “대형 언론사를 제외한 중·소형 언론사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언론의 자유는 그림자도 찾기 어렵게 될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언론사로 명맥이라도 유지하려면 정부 부처나 기업에서 내는 보도자료만 다루는 받아쓰기 언론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고, 시민들은 천편일률적 기사만 가득한 언론사를 점차 외면하게 될 것이다. 정권을 바꾸고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대형 특종은 사라지고, 기자라는 직업도 존재감이 줄어들 것이다.


온라인기사도 실종


근래의 미디어 환경에서 인터넷 공간은 다른 매체보다 훨씬 유연하고 탄력적이다. 그래서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 다루기 어려운 1보나 속보의 성격은 온라인 공간에서 많이 소화하게 된다. 그런데 개정안대로라면 기사를 문제 삼아 열람을 차단해달라는 청구가 남발하게 되고, 이는 사실상 ‘기사 삭제’와 마찬가지인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필자가 보도본부장 때 온라인 뉴스 공간에 모 재벌의 첩과 관련된 기사를 중견 기자가 써 올린 적이 있다. 순식간에 조회 수가 올라갔고 기사를 내려달라는 청탁과 압력이 사방에서 쇄도해 왔지만, 기자의 의견을 따랐다. 결국 이 기사는 최고 조회 수를 기록했다. 개정안이 당시 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툭하면 언론 탓, 기레기 탓


물론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가속화된 가짜뉴스의 범람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모르지 않는다. 오죽하면 기레기(쓰레기와 기자의 합성어)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하지만 이는 속보와 특종 경쟁이라는 언론 생태계의 불가피한 특성이다. 시장과 생태계를 법으로 잡겠다는 건 접근 자체가 무리다. 가짜뉴스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시장에서 걸러지기 마련이다. 보통사람들이 이로 인해 직접 피해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피해를 봐도 현행 법체계에서 구제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입장이다. 문제는 권력자들이다. 이들은 뜻대로 안 되면 종종 언론 탓, 기레기 탓을 한다. 이 때문에 언론이 지나치게 거대 악마화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미디어 환경변화로 다원화, 파편화된 언론계에서 개별 언론사는 의외로 허약하다. 언론이 힘을 받을 때는 특정 이슈에 대해 모든 언론사가 같은 입장일 때 정도이다. 이때는 정당성이 여론을 만들어낸 경우이다.


권력이 피해자 코스프레, 그러나 피해는 국민의 몫


이번 정권만큼 언론 환경이 우호적인 정권도 드물 것이다. 우선 공영방송을 보자. 노조와 이심전심이 그 어느 때보다 잘되어 있다. 민주노총 산하에 속한 양 방송사 노조는 정권 교체 이후 파업을 벌여, 사장을 임기 전에 몰아냈다. 민주노총 산하에는 132개 언론사가 노조가 들어있다. 정서적으로 이념적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 다른 언론사들도 대부분 정권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다. 겨우 보수언론이라고 하는 일부 소수 언론사만 정권 심기를 불편케 하는 비판적 기사를 쓸 뿐이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언론 지형이 불리하다고 강조하는 건 피해자 코스프레로 들린다.

언론현장에서 체험해본 권력의 힘은 정말 무섭다. 모든 정보를 선제적으로 독점하기 때문이다. 맘먹으면 ‘가짜뉴스’와 ‘진짜뉴스’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다. 물론 개정안은 현직 고위공직자, 선출직 공무원, 대기업 임원을 언론중재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에 감히 덤벼들기는 쉽지 않다. 권력도 법을 피해 우회적으로 적대적인 언론사 괴롭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퇴임 후에는 이번 개정안을 이용해 얼마든지 재임 당시의 문제나 비리 관련 취재에 대응할 수도 있다. 이번 개정안은 언론이 자초하고 권력이 덧칠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해, 권력이 언론을 제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준 것 아닌가 싶다.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들에 돌아갈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면 권력은 더 큰 문제임을 국민은 직시해야 한다.

<kiy58@naver.com>


글 | 김인영

KBS 공채 기자로 입사해 보도본부장으로 퇴직 후 KBS 미디어 감사를 역임했다. 현재 노원창일교회의 장로로 시무 중이다. 주요 저서로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쿰란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