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침략을 위한 속셈이라는 제1관

2021-09-16 0 By 월드뷰

한일 관계사 왜곡의 시작: 조일수호조규 – 강화도 조약 (2)


월드뷰 SEPT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1876년 2월 3일 강화도에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는 체결의 목적과 과정을 간략히 제시한 전문(前文)과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시작되는 제1관을 포함하여 모두 12개 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제1관에 대한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강화도 조약은 첫 번째 조항에서 조선은 자주국임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주장을 차단하려는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금성출판사, 100>

이 조약에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하였으나, 이는 조선에 대하나 청의 간섭을 배제하여 조선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일본의 의도였다.

<미래엔, 95>

이를 정리하면, 제1관은 청의 간섭 또는 영향력 배제, 청의 종주권 주장 차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7년이 넘는 교착 상태를 극복하고 겨우 성사시킨 조약에서 본질적 내용이 아닌 제3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일부 교과서에서 ‘조선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한 의도가 담긴 것’이라는 해석은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굳건히 한다.(重修舊好, 以固親睦)’라는 전문(前文)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친목을 위한 작은 모임에서부터 규모가 큰 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임을 갖는다. 이러한 각종 모임에는 모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회칙과 같은 운영 규정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들 회칙의 첫 번째 조항은 대부분 모임의 성격이나 취지와 같은 핵심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모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지는데, 이들은 모두 첫 번째 조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조항만 보더라도 그 모임의 성격이나 목적 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작은 모임의 회칙에서조차 해당 모임의 핵심적 가치를 첫 번째 조항에 내세우는데, 하물며 국가 간에 맺어지는 조약에서 제3국의 간섭을 차단하고 조약 당사국에 대한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 간의 조약이든 개인 간의 계약이든 그 본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조항 전체를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이들 문서는 차후 발생할지도 모를 서로 다른 해석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간략하고 분명하게 서술한다. 따라서 해당 조항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또 가능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조약 체결의 배경이나 요인 등이 해석을 위해 동원될 수도 있으나 그러한 경우에도 확정된 조문(條文)이 우선이며, 그 조문의 의도를 벗어난 과도한 해석은 자칫 본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특히, 조약 체결 후 발생한 상황 변화나 사건 등을 무리하게 끌어와서 과거의 조문을 해석하는 것은 곧바로 왜곡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일본이 협상을 위해 제시한 초안은 모두 13관이었으나 협상이 진행되면서 최혜국(最惠國) 조항이 삭제되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12관으로 최종 확정된다. 조선 측 대표인 대관(大官) 신헌(申櫶)이 조약 체결의 전 과정을 정리한 <심행일기(沁行日記)>에 따르면 조선 측의 수정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특히, 조선 측이 ‘달리 논의할 것이 없음(別無可論)’이라 하여 이의 제기 없이 일본 측 원안대로 확정된 제1관은 아래와 같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禮)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린(交隣)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두루 통하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서 영원히 잘 지내기를 기약한다.(第一款, 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 嗣後兩國欲表和親之實, 須以彼此同等之禮相待, 不可毫有侵越猜嫌. 宜先將從前爲交情阻塞之患諸例規, 一切革除, 務開擴寬裕弘通之法, 以期永遠相安.)

교과서에도 언급된 첫 문장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다.’와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다.’라는 부분은 곧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권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국제법에 따라 체결되는 조약에서 체결 당사국의 당연한 자격이자 조건이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각국은 이미 국제법에 따른 통상 조약이 보편화 된 상황에서 주권 국가가 아닌 나라와의 조약 체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타국의 간섭을 받는 나라라면 조약을 체결하더라도 그 조약의 실효성(實效性)을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조약 체결을 경험한 일본도 이와 같은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선언을 통해 조선이 주권 국가임을 국제 사회에 공언(公言)함으로써 조약의 정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성실한 이행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정교(鄭喬: 1856~1925)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최근세사를 정리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아랫글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는 인조 14년(1637) 남한(南漢: 경기도 광주 옛 이름)에서 청 태종과 강화한 후 해마다 방물을 바치면서 자못 속국의 예를 지켜왔다.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를 죽였을 때 프랑스는 청나라에게 힐책하였으나 청나라는 국가적으로 여러 어려운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후 미국 군함을 포격했을 때에 미국 역시 청나라에게 힐문하였으나 청나라는 조선의 선전과 강화의 권리는 그 나라 자유에 있다고 답을 했으니, 이는 바로 청나라가 구미 여러 나라에 대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공언(公言)이다. 그 후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분명하게 말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일본은 해외 각국과 수호를 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공언하였다.(我國自仁祖十四年丁丑, 於南漢與淸太宗講和之後, 歲贈方物, 頗執屬國之禮. 故殺法國宣敎人之時, 法國向淸國詰責之, 淸國以其國事多艱, 答以朝鮮非淸國之屬國. 其後砲擊米國軍艦之時, 米國亦爲詰問于淸國, 淸國答以朝鮮宣戰講和之權, 在其自由, 此乃淸國對歐米列邦, 明朝鮮非是淸國屬國之公言也. 其後淸國對日本亦如是明言之, 至是日本與海外各國修好, 遂公言朝鮮獨立于世界)

다음으로 조선은 이미 주권 국가임을 천명(闡明)한 사실이 수호조규의 마지막 서명 부분에 ‘대조선국개국 485년[大朝鮮國開國四百八十五年]’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까지 조선은 대부분의 공문서에 청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으나, 이때 이르러 청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 연도 표시법인 개국 기년(開國紀年: 개국은 연호가 아님)을 사용하였다. 개국 기년은 조선이 개국한 1392년을 기산점으로 삼아 연도를 표시한 것으로 1876년은 ‘개국 485년’이 된다. 현행 교과서에는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조선은 이때 이미 조선 개국을 기산점으로 삼은 독자적인 연도 표시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기년법은 조약 체결 직전인 1월 25일 서계 문제와 운요호 사건에 대한 해명을 담은 <서술책자(敍述冊子)>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약 체결 과정에서 개국 기년 사용에 대한 논란이나 별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을 비롯한 구미 여러 나라가 맺은 조약이나 <만국공법(萬國公法)>을 통해 독자적 기년법에 대한 입장이 정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개국 기년은 이후 여타 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도 모두 적용된다. 물론 청의 주선으로 맺어진 조약에서는 청의 광서(光緖) 연호가 부기(附記) 되기도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다.

즉,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다.’라는 조문은 국제법상 조약 체결 당사국인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공언(公言)한 것이며, ‘대조선국 개국 485년’은 이러한 공언의 명시적(明示的) 표현이다. 이를 보면 수호 조규의 체결은 조선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맺은 굴욕적 외교가 아니라 주권 국가로서 당당하게 국제무대에 첫걸음을 내디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조선이 일본과 주권 국가 대 주권 국가로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언급이다. 또, 이어지는 문장의 ‘동등한 예로 대해야 하고 권리를 침해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평등한 권리의 실행에 관한 부연 설명이다. 이것이 표면적 해석이라면 이러한 표현이 나오게 된 원인을 서계(書契)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장기간 조선과의 관계가 단절된 원인은 서계 문제이며 문제의 핵심은 서계 주체의 위상(位相) 차이, 즉 국격(國格)의 불평등이었다.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서계 문제와 같은 이유로 재연될 수 있는 외교 단절 사태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종전의 교린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를 혁파하여 없애고’라는 문장에서 그러한 속내를 알 수 있다. 물론 이 언급은 그때까지 왜관을 중심으로 진행된 무역에 수반된 각종 불합리한 규례와도 관련이 있지만, ‘교린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것’은 역시 서계 문제가 핵심이다. 따라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본 문장은 조약 체결 당사국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선언이자, 서계 문제와 같은 국교 단절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자 했던 일본 측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약이나 계약은 기본적으로 효력 발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효력의 발생은 조약 또는 계약 당사자 간에만 가능하다.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시도할 때 제1관을 들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령, 제3국의 간섭이나 주장에 의해 조약 당사국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조약 당사국은 상대국에게 조약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는 있어도 제3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효력도 발생할 수 없다. 제1관이 청의 종주권을 차단하거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조항이라는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유다. 또, 조약 체결 과정에서 청의 간섭이나 종주권과 관련한 어떠한 기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초안 심의 때 제1관에 대해서 조선 측은 ‘달리 논의할 것이 없음[別無可論]’이라 하여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침략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다. 정한론을 비롯한 조선 침략에 대한 언급은 조약 체결 이전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이는 침략 자체가 아닌 외교 교섭 타개가 목적이었다. 구로다의 조선 파견도 명분은 서계 문제와 운요호 사건의 변리(辨理:사건을 분별하여 처리함)에 있었으나 실질적 목적은 조약 체결에 있었다. 협상 과정에서 구로다는 조선의 거절로 조약 체결이 무산될 경우 조선을 침략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한 적이 있으나, 조약 체결이 성사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사라졌다. 이러한 정황을 보더라도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조문에 ‘청의 종주권을 차단하고 조선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라는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다.

조일 수호 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조선이 국제법에 따라 체결되는 조약에 주권 국가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국제 질서 속으로 진입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와 연이어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제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게 된다. 또, 구미 여러 나라가 조선과의 통상 교섭을 시도할 때 이를 선점하고자 했던 일본은 서계 문제의 핵심인 국격(國格)의 불평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자 ‘조선은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조일 수호 조규 제1관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 (다음 호에 계속)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國史, 이대로 가르칠 것인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