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배우는 대한민국의 외교·국방 전략

이스라엘에서 배우는 대한민국의 외교·국방 전략

2021-08-11 0 By 월드뷰

월드뷰 AUGUST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2


글/ 이성구(Cebu Bible College, PHL 교수)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 대부분 쉽게 동의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라는 이 명제는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개인의 자유, 프라이버시 존중이 팽배해져도 ‘너’가 없는 ‘나’는 존재하기가 어렵다. 에덴동산에 하와가 등장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었고 함께 사는 것은 창조의 원리였다. 요즘 홀로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주택의 형태에서부터 수박 쪼개 팔기까지 삶의 형태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셰어하우스며 공동체 생활을 즐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만남이 어려워지고, 음식점과 술집이 일찍 문을 닫으면서 ‘코로나 블루(Corona Blue)’로 아파하는 사람도 부쩍 늘어났다는 보도가 나온다. 회사에서 자주 갖는 회식이 없어져 좋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모임 인원 제한이 풀리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짧은 시간 홀로 지내는 것은 필요하나 오랜 시간 홀로 지내는 것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사람은 홀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나라도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국가간 의존성은 더 깊어져 이제 국제사회는 개별 국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서로 엮여 있다. 미국도 유럽과의 연계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트럼프 대통령 재직 시절 미국이 독자노선을 강조하는 듯했지만 기실 그것은 기울어가는 제조업을 살려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수단이었지 결코 혼자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바뀌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NATO 같은 군사동맹, G7, G20, APEC, WTO 등과 같은 경제기구, 유엔 아동기금(UNICEF) 같은 각종 기금, 각종 원조기구,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국제 노동 기구(ILO), 국제해사기구(IMO),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전문기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합과 연대의 기구들이 존재하고, 각 나라는 자기들의 유익에 따라 회원국이 된다. 이렇게 어느 나라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혼자 살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외교 국방정책


성경은 그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의 외교와 안보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사건으로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대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고 모든 국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웅 모세가 이끌던 광야 시대에도 아말렉, 암몬과 같이 그들의 앞길을 막는 나라들이 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늘 불레셋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르기에 바빴다. 들쑥날쑥한 사사들로서는 수시로 밀어닥치는 외세의 침공을 막기에 바빴다. 그래도 때마다 사사들이 일어나 나라를 잘 방어했다. 그러다 마침내 사무엘 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백성들은 더 이상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갈 수 없다며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 같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왕정 제도의 도입을 요청했다.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정책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가는 이스라엘의 무례한 요구는 마침내 받아들여졌고 그런대로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단일 왕국 시대는 솔로몬이 죽으면서 통치 철학에 대한 원로 신하들과 소장파의 충돌로 결국 남북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본격화되었다. 둘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은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국가 안정 유지에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BC 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남북조 왕국은 주변 대국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북쪽의 앗시리아가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그 세력을 주변에 넓히려 했다. 남쪽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강대국 이집트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바벨론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주변 모든 나라의 외교와 안보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제국의 꿈을 키우는 앗수르(앗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해 이웃한 아람과 동맹을 체결했다. 국가 간에 ‘합종연횡(合從連橫)’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남유다 12대 왕 아하스도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친 앗수르’정책을 채택했다. 그것은 곧 ‘반(反)북이스라엘, 반(反)아람 정책’으로 외교·안보 노선을 정했다는 말이다. 남북이 전혀 다른 외교정책을 따랐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왕국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유다의 외교정책에 주목하려 한다. 과연 유다의 외교 안보정책은 성공적이었던가?

아하스 왕의 통치 기간은 BC 735~719년으로 남유다 역사 중 매우 혼란한 시기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당시는 급속도로 왕성해지기 시작한 앗수르가 주변국들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앞서 언급한 대로 지리적 위치상 앗수르의 동쪽에 있는 바벨론도 패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아하스의 통치 중에 큰 변화를 경험했다. 아람과 연합해 앗수르에게 저항하던 북이스라엘이 BC722년을 끝으로 앗수르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위기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아하스 왕 이전부터 예언자들의 경고는 거칠었다. 특히 북국을 대상으로 한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철저할 것이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부패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의 길로 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망하자 남유다의 예언자들도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사야 선지자의 역할이 도드라졌고, 아하스 왕과 정책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격돌의 모습이 이사야 7장에 그려지고 있고, 그 결과는 열왕기하 16장에 기술되어 있다.


아하스 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외교정책 충돌


북왕국이 망한 상황에서 유다를 통치하는 아하스 왕은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고 그에 맞는 외교정책을 펴지 않으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하스는 북쪽 이스라엘과 이웃한 아람과의 동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 동맹으로 얻을 것이 많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 중심의 반(反)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지 않자 아람의 르신 왕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함께 유다를 공격해 왔다. 아하스는 다행스럽게도 이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반앗수르 동맹국이 그냥 있을 리 없었고 동맹이 강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하스 왕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사 7:2). 자신이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든지 아니면 다른 동맹국을 찾든지 해야 했다. 그는 더 큰 힘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앗수르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왕의 마음에 있는 계획을 하나님을 통해 파악한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다른 나라를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아무리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철저하게 맺었다고 해도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사 7:4)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들은 결코 유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지 말라는 청원이었다.

그러나 아하스는 자신의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하나님만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굳어 있었다. 그는 앗수르와의 동맹을 최고의 정책이라고 믿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호소를 하기에 이른다. 그는 아하스 왕에게 구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중 하나인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라는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을 들려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아하스는 자신의 외교정책을 바꿀 생각이 없었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물론 결과는 비참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데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아하스 왕은 비굴할 만큼 저자세로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해 위기를 넘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성전과 왕실 곳간의 은금을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야 했다. 그뿐 아니었다. 아람을 점령한 앗수르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이방의 땅 아람의 다메섹까지 아하스 왕이 직접 올라가 티글랏 빌레셀을 알현하고, 그곳에 있는 제단의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앗수르의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도록 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역사에 남기고 말았다. 앗수르로 인해 패망하는 일은 없었으나 이런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진행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왕이 되고 만 것이었다(왕하 16장).

이러한 외교정책에 대해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뜻은 명백했다. 첫째, 일련의 사태는 하나님의 세계 경영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친(親) 앗수르 정책’ 철회를 촉구했다. 제국주의 깃발을 치켜든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 외교정책은 결국 실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끝내 ‘친 앗수르 외교정책’을 고집하고 집행했다. 이에 앗수르는 제국주의 속셈을 숨긴 채 곧바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침략, 멸망시켰다. 그 결과 유다는 자연스럽게 앗수르의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히스기야와 이사야,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외교정책


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치세를 강화한 후 한때 동맹 관계였던 앗수르를 더이상 종주국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 왕 즉위 14년에 이르러 유다 왕국 곳곳을 공격하고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히스기야 왕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해야 했고,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모든 은을 내어 줄 뿐 아니라 성전 문의 금과 왕궁 모든 기둥의 금을 벗겨서 바쳐야 할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히스기야는 ‘이집트와의 동맹’으로 외교 노선을 바꾸게 되자 산헤립은 아예 대군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당황하는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이 앗수르 왕에게 들려주시는 심판의 메시지와 유다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왕하 19장). 이집트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의 단호한 말씀 앞에 마침내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18만5000명의 앗수르 군대가 밤사이에 송장으로 변했다. 유다는 멸망 직전에 구출되었다.

이후 BC 6세기는 바벨론의 시대로 이어졌다. 이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반(反)바벨론 정책’을 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이없게도 바벨론에 ‘항복하라’라고 요구한다. 외교·안보권을 포함한 모든 국가 경영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반역적 행동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로서는 이유가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바벨론 포로 사태를 통해 유다를 징계하고 교육할 기간을 70년으로 확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시드기야는 끝까지 예루살렘 사수를 외쳤지만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불살라버렸다. 예레미야가 울면서 외친 ‘항복 외교’는 이러한 불상사를 막아내고자 함이었다. 눈앞의 이익 계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따라야 함을 예레미야를 통해 역사는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과 더불어 살아가기


대한민국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반도 국가이다. 고래로부터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시달렸다. 몽고족도 침략했고 러시아, 일본도 늘 넘보던 나라였고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이웃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고 가해자였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귀로 들으면서 살아왔다. 지금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엄연히 친미파, 친중파가 존재한다. 친일, 반일이라는 말이 예사로 운위된다. 북한이 주적인지를 국방부 장관에게 묻는 기이한 광경이 여전히 벌어진다. 친북에서 나아가 종북(從北)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릴 만큼 대한민국은 복잡한 나라이다. 특히 두 대국과는 경제와 군사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쪽은 혈맹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적군의 동맹군이 되었음에도 이제 우리는 두 나라와 동시에 경제적으로 깊이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친북 반북, 친일 반일, 친중 반중, 친미 반미, 친러 반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정체성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에게 유리할 것인가? 북한은 국가로도 인정할 수 없는 곳이고, 일본은 여전히 반일 감정이 남아있으며, 중국이나 러시아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도록 허락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침략행위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수만 명의 젊은이가 한반도에서 피를 흘렸지만, 그 와중에 미국에 대해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가진 대한민국에 남겨진 과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그 어떤 나라도 의지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맹이 필요한 현실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언제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남에게 냉정해질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변함없는 진리가 아닌가. 모두를 ‘이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교훈이라면(마 22:39, 막 12:31, 눅 10:27, 롬 13:9), 그런 넓은 가슴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은 ‘여호와의 열심’이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고(왕하 19:31) 이웃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자강론(自强論)이라고나 할까.

<sungklee814@hanmail.net>


글 | 이성구

부산대학교,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구약윤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경성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고, 현재 통일교육문화원 이사장,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