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사료(史料)와 다른 교과서 서술

운요호 사건, 사료(史料)와 다른 교과서 서술

2021-07-25 0 By 월드뷰

한일 관계사 왜곡의 시작: 조일수호조규 – 강화도 조약 (1)


월드뷰 JUL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3


글/ 김병헌(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1876년 2월 3일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속칭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일 관계는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음으로써 회복된 이후,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일본의 대(對) 조선 창구가 쓰시마 번주(藩主)에서 일본 외무성(外務省)으로 바뀌면서 외교 문서인 서계(書契)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국제(國制)의 변화와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통상 조약을 경험한 일본은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고자 하였으나 과거에 얽매여 온 조선은 일본의 변화된 국서(國書)의 표현을 위격(違格)이라 단정 짓고, 서계 접수와 사신 접견을 계속 거부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처사를 수모로 여긴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한때 무력에 의한 교섭 타개를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정쟁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1873년, 막후에서 대일 강경책을 주도하던 흥선 대원군의 영향력 상실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관계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종전과 다름없는 서계(書契) 용어뿐만 아니라 연회(宴會)의 복장까지 문제 삼으면서 외교적 교착 상태는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875년 8월(음력) 강화도에서 발생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7년 넘게 끌어온 국교 단절을 타개하고 새로운 외교 시대를 여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극적으로 체결되었다. 그런데, 이 운요호 사건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이 한마디로 제각각이다.

몇 년 뒤 일본은 군함을 보내 부산에서 무력시위를 한 뒤 강화도와 영종도를 불법 침입하였다(운요호 사건, 1875).

일본 군함 1, 2척을 파견하여 쓰시마섬과 조선 사이의 바다를 측량하게 하면서 우리 측 의도를 시위하면…… 다른 때 대규모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일본 관리의 군함 파견 건의서 –

이는 미국이 자신들을 개항한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이용한 것이었다.

<해냄에듀, 97쪽>

윗글은 일견 하나의 사건으로 보이나 부산 앞바다 무력시위는 1875년 4월에, 강화도 사건은 같은 해 8월에 일어난 다른 사건이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일본 군함 운요호가 등장한다는 점이며 차이가 있다면 4월 사건은 일본 정부에 의한 계획적인 무력시위인 반면, 강화도 사건은 강화도 초지진에서 촉발되어 영종도로 확산된 돌발적 충돌사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강화도 운요호 사건보다 넉 달 앞서 발생한 부산 앞바다의 무력시위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은 위 교과서 언급 중 ‘일본에서 파견된 외교관’인 일본 외무성의 외무 소승(外務少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즉각 외무 6등 출사(出仕) 모리야마를 조선에 파견해 왜학훈도(倭學訓導) 현석운(玄昔運)과 국교 재개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1874년 9월 3일 이루어진 이 회담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관리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조선의 요구에 따라 외무성 외무경(外務卿) 명의의 서계와 구(舊) 쓰시마 번주 명의의 서계를 함께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모리야마 시게루는 1875년 2월 부산에 도착해 서계를 제출하고 다시 교섭을 시작했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에 여전히 ‘대일본(大日本)’과 ‘황상(皇上)’ 등의 용어와 그 본문이 일본어로 쓰인 점, 그리고 조선에서 쓰시마에 주었던 도서(圖書)의 환납(還納), 사신 접대를 위한 연회석상의 양복 착용 등의 이유를 들어 접수를 거부했다. 이 같은 조선 정부의 거부 입장을 확인한 모리야마 일행은 그동안의 협상 결과를 보고함과 동시에 히로츠 명의로 군함 한두 척을 급파하여 쓰시마와 조선 사이를 드나들며 해로를 측량하는 체하면서 무력시위를 해줄 것을 주문한다.

지금 저들이 서로 싸우고, 쇄국파가 아직 그 기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힘을 사용한다면 가벼운 힘의 과시로도 목적을 이루기는 용이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함 한두 척을 급파하여 쓰시마와 이 나라 사이를 드나들게 하고,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해로를 측량하는 체하며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한편, 가끔 우리 정부가 우리들 사신의 협상 처리의 지연을 힐책하는 듯한 표시를 보임으로써 저들에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질 언사를 쓴다면, 안팎으로부터의 성원을 방패삼아 일 처리를 재촉할 뿐만 아니라 국교 체결 상 어느 정도의 권리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 메이지[明治] 8년 4월 외무성 6등 출사 히로츠 노부히로 – <日本外交文書>

이에 일본 정부는 모리야마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로(海路) 측량이라는 빌미를 대고 해군 군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4월 20일 해군함 운요호가 부산에 입항하고, 5월 9일에는 군함 제2 테이묘호(丁卯號)가 입항해 운요호와 함께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이에 대해 동래부는 신임 왜학훈도 현석운을 파견해 항의와 함께 퇴거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현석운 일행이 군함에 승선했을 때 사격 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일제히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부산과 동래 부민들에게 위기감을 갖게 했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 서술 요약

이것이 4월 부산 앞바다에서 일어난 무력시위 사건으로 일본이 과거 미국에 당했던 포함(砲艦) 외교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해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다음은 8월에 있었던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으로, 이에 대한 전후 상황은 1934년 동아일보에 <속조선최근세사(續朝鮮最近世史)>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이선근(李瑄根) 박사의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다.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는 황해 연안 항로 측량의 명령을 받아 청국(淸國)의 우장(牛莊)으로 향하던 도중 음료수가 결핍(缺乏)하게 되자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일시 투묘(投錨: 닻을 내림)한 후 단정(短艇)을 내리어 함장 이하 수십 명 수병이 한강의 수로를 소상(遡上)하였던바 초지진 포대를 지키던 조선 측 수병(守兵)이 그들을 포격한 데서 사단은 발생된 것이다. 그리하여 포격(砲擊)을 받았지만 별단(別段) 손해(損害)도 받지 않은 운양호의 단정이 전진을 단념하고 본함(本艦)으로 회항케 되자 이 보고를 받은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키(井上良馨: 당시 육군소좌)는 함수를 돌려 초지진 포대에 대한 보복적 행동으로 초지진과 영종도의 양 포대를 함께 포격하게 되었으니 이 당시 이미 정예한 무기를 갖추어 사기왕성한 일본해군과 새끼오리에 화승총을 매고 대하는 조선군과는 피차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수삼 십분 맹렬한 포격이 계속되자 영종도를 지키던 조선 수병은 모두 다 패주해 버리고 뒤쫓아 상륙한 50명 못 되는 일본 육전대에서 영종성이 일시 점령당하게 되었으며 파괴당한 포대에서 대포 삼십육 문과 화승총 백삼십여 정 및 다수한 창검 등속은 전리품으로 빼앗기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4. 1. 9. 雲揚號事件의 全貌, 현대어로 순화함>

이선근 박사의 이 글은 또, 조선 말기에 정교(鄭喬: 1856~1925)가 저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수록된 아래 기록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1875) 8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청나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인천 외양(外樣)에 정박(碇泊)하고 함장인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가 단정(端艇: 短艇)을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강화도 수병(守兵)이 발포하여 공격하였는데 사실 그 배가 일본 군함인지 몰랐다. 초9일 일본인이 드디어 영종진의 포대를 포격하여 공략(攻掠)하자 수장(守將)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일본인이 드디어 입성하여 불태우고 노략질한 다음 돌아갔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이를 정리하면, 일본 군함 운요호가 서해의 항로를 측량하면서 요하 하구에 위치한 우장(牛莊)으로 가는 도중 담수(淡水)를 공급받기 위해 모함인 운요호를 난지도 부근에 정박시켜 놓고, 작은 배로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초지진의 수병(守兵)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전진을 포기하고 곧바로 모함(母艦)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이노우에 함장은 피격에 대한 보복으로 초지진을 공격하고 이어서 영종진의 포대를 공격하는가 하면 일부는 영종도에 상륙하여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이때 조선인 사망자는 35명이나 되는 반면 일본인 피해자는 경상자 2명에 그쳤다. 운요호는 우장으로 가던 길을 포기하고 곧장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가 사건의 전말을 도쿄[東京] 정부에 보고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차례의 운요호 사건 중 4월 부산항 운요호 사건은 국교 재개와 개항을 요구한 계획된 무력시위라 할 수 있으나, 8월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은 무력시위나 개항 요구가 없었던 돌발적 충돌 사건이었다. 물론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은 이듬해 1월에 진행된 조일수호조규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의 압력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현행 9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이 같은 강화도 조약에 대해 부정확하게 서술한 경우가 적지 않다. 교과서별로 어떻게 서술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875년 운요호가 허락 없이 강화도로 접근하자 강화도의 포대에서 위협사격을 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인과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피해 배상과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경기도 해안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동아출판, 88쪽>

이에 일본군은 초지진을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민을 살상하였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 일대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며 문호 개방을 강요하였다.

<리베르, 96쪽>

동아출판에서 8월 강화도 운요호 사건 후, 일본은 피해 배상과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경기도 해안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다. 또한 리베르 교과서에 서술된 무력시위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조선이 포격한 행위는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또다시 군함을 동원해 통상 조약을 맺자고 요구해 왔다.

<씨마스, 108쪽>

조일수호조규 협상 과정에서 일본 병사들이 본함(本艦)인 운요호에서 단정에 옮겨 타고 초지진으로 접근할 때 조선 수병이 포격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는 하였으나, 주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통상 조약을 맺자고 요구한 사실이 없다. 협상의 중요 의제(議題)는 서계와 사신 거부에 관한 것이었으며 운요호 사건은 잠시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로만 거론되었을 뿐이다.

이후 일본은 운요호 사건 당시 조선이 자국의 배를 향해 포격한 것을 구실로 대규모 군함과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다.

<지학사, 104쪽>

일본이 구로다 키요타카를 대표로 한 협상단을 파견한 데는 서계와 사신 거부가 실질적 이유였으며, 자국의 배를 포격한 것을 구실로 대규모 군함과 병력을 파견했다는 서술도 사실이 아니다.

강화도에 나타난 일본 군함 운요호는 초지진을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하며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다.

<천재교육, 107쪽>

영종도에 상륙해서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하기는 하였으나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한 사실은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운요호 사건은 4월 부산 앞바다와 8월 강화도에서 두 번 일어난 사건으로 반드시 구분해서 서술하고 설명해야 한다. 특히 강화도 사건의 경우 일본이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적이 없는데도 이를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울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많은 자료에 운요호로 소개되고 있는 그림은 운요호일 가능성이 적다. <고종실록>과 신헌(申櫶)이 정리한 <심행일기(沁行日記)>에는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세워서 우리나라 배를 표시하였다(雲揚艦三帆, 皆建國旗, 以標我國船)’라고 되어 있어 돛이 두 개밖에 없는 이 그림은 운양호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처럼, 모든 한국사 교과서의 운요호 사건 서술이 중구난방인 데다 그동안 ‘운요호’로 알고 있던 이미지조차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그림이다. 이 또한 시급히 수정해야 할 서술 오류다. (다음 호에 계속)

<cleanmt2010@naver.com>


글 | 김병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 대학교와 경원대학 강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국역 사재집(思齋集)>, <국역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주 이아주소(爾雅注疏) 전6권>, <화사 이관구의 언행록>, <國史, 이대로 가르칠 것인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