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현상과 방황하는 소년들

페미니즘 현상과 방황하는 소년들

2021-07-07 0 By 월드뷰

월드뷰 JUL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글/ 이명준(한국성범죄무고상담센터 소장)


먼저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젊은 세대의 남녀갈등 현상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성세대 또한 이 현상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단순히 남의 일이나 요깃거리를 대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세대와 앞으로 태어날 후세대를 비롯한 국가공동체가 심히 걱정되어서 쓴다.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길을 잃은 정체성 고아와 같다. 이들은 역사상 가장 자기 성별에 대한 자긍심이 떨어지는 세대다. 소년들은 남성성에 대해 죄의식을 갖도록 교육받고 있으며, 소녀들은 여성성에 대해 부정하고 벗어나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즉 소년과 소녀로 하여금 타고난 남성성과 여성성에서 회피하고 도망치도록 배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갈등 이면에 자신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고유한 영역, 즉, 성별을 잃느냐 회복하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나 성별이라는 고유한 터전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페미니즘 언어와 문화가 오히려 갈등으로 치닫도록 왜곡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언어와 세계관은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터전을 곡해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망가뜨리고 구겨서 호도한다.

사실 남녀갈등은 남성도 여성도 일으킨 적이 없다. 남자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남성성은 나름대로 매력적이고 멋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페미니즘은 네가 가진 남성성이 바로 여성성을 핍박하는 악한 것이라고 호도한다. 여자아이들은 위대한 여성성에 대해 말하지만, 페미니즘은 그것은 바로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부장적인 제도 때문이니 그 틀을 깨기 위해 남자를 공격하면 된다고 호도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과 깊이 있는 논의를 회피하고 묻어버리고자 여성을 방패막이 세워 원치도 않는 여성과 남성이 이유도 모른 채 일단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을 곧 성차별주의자, 여성 혐오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마치 북한이 제시하는 평화통일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통일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을 전쟁을 추구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전쟁광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는 여성들을 남성과 여성의 화합으로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페미니즘의 의도, 배제된 남성의 서사


현재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대한 서사를 저주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보고 배울 수 있는 그 무언가의 역할, 자신에게 사명감을 부어줄 수 있는 롤모델이 부족하다. 소년들에게 비치는 아버지는 피곤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소년이 배우고 따를 수 있는 남성상이 부재하다. 즉 남성의 서사가 이어져 내려오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학교에 가도 여자 선생님밖에 없다. 여자 선생님은 소년들이 거칠게 뛰어노는 것을 ‘산만하다’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많은 소년이 주의력 결핍(ADHD) 취급을 받는다. 예쁘장한 소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 길을 잃은 소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아니면 반항적으로 행동하기에 이른다.

이것에 대해 페미니즘은 ‘루저남’ 혹은 ‘잠재적 범죄자’라고 진단한다. 소년들을 사회구성원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다. 남성이 되지 못한 소년들은 온라인상에서 남성상을 갈급한다. 유튜브 예능에서 화젯거리였던 ‘가짜사나이’, ‘머니게임’이 연이어 화제가 된 것에는 방황하는 소년들의 갈망이 녹아 있다. 가짜사나이에서는 멋있는 남성상, 그리고 머니게임에서는 말 잘 듣는 예쁜 소년상(像)에 대한 반발심이 드러난다.

우리는 소년이 남성으로 거듭나는 서사와 남성이 아버지가 되는 서사를 회복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위대한 서사에 흠을 내고 축소시켜서 젠더라는 허구의 개념으로 채우려 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온라인상에서 남성상과 여성상을 배우고자 갈급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제공되는 온라인상의 정보는 누군가의 수익을 위해, 누군가의 영향력을 위해, 누군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상품일 뿐이다.


권능의 욜로 정체성, 젠더의 위협


페미니즘은 정체성 고아의 상태에 놓여있는 소년과 소녀에게 새로운 터전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사람이 만들어낸 젠더라는 허구의 개념이다. 젠더는 마치 권능의 터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터전에 사명감은 없다. 책임감 또한 없다. 이 터전을 영위하고 존속시킨다고 할지라도, 그 터전이 그 개인을 책임지지 못한다. 설명하지도 못한다. 결국, 허구개념에 자아를 의탁했던 아이들은 자라나서 자신을 잃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려도, 페미니즘은 그 개인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또한, 젠더라는 개념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자긍심이 사라지고 있다. 소년과 소녀에게 사명감과 숭고함을 부여해줄 수 있는 강고한 성별이라는 터전이 이제는 도망치고 회피해야 할 터전이 된 것이다. 소년과 소녀들은 길을 잃었다. 이들에게 우리가 제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이 이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욜로 성별과 욜로 부부라는 개념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개념은 꽤나 폭력적이다. 자신의 터전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가꾸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터전의 서사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소년과 소녀가 물려받을 고귀한 선대 역사가 담긴 터전을 훼손하고 빼앗으며 이곳으로부터 도망치라고 한다. 터전을 잃은 소년과 소녀에게 젠더라는 터전과 성 평등이라는 우상을 상으로 줄 테니 너희들끼리 칼과 창을 들어 서로 싸우라고 하는 것이 바로 남녀갈등이다.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현상을 남녀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겠냐는 것이다. 필자는 이 현상을 ‘페미니즘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고 남녀갈등으로 해석하는 이상, 오히려 페미니즘이 깔아놓은 그들의 판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이 현상은 성 파시즘이냐, 성 화합주의냐의 전쟁이다.

<hanseongyeon0902@naver.com>


글 | 이명준

성평등의 개념에 회의를 느끼고, 성평화의 대안을 만들기 위해 한국성평화연대를 설립했다. 2019년 전국학생수호연합을 만들어 성평화 문화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성범죄무고상담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